[풍경의 기억] 전라좌수영에서 여수군으로 1 게시기간 : 2020-08-29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8-28 09:1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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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현의 폐현(廢縣)와 전라좌수영 1997년 9월 9일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의 삼여통합에 대한 주민 의견조사 결과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합이 확정되었고, 1998년 4월 1일 통합여수시가 출범하였다. 이후 여수시가 놀랄만큼 달라지고 있다. 전남에서 인구 1위의 도시가 되었고 남해안의 거점도시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조선시기에 여수민들은 순천부로부터의 분읍(分邑)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치열하게 여수현의 복설(復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897년 전라좌수영의 폐지를 계기로 비로소 ‘여수군’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그후 일제강점기에는 돌산군을 통합하였고, 정부 수립 이후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으로 나뉘었다가 네 차례의 시도 끝에 삼여통합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한편 여수의 역사에서 전라좌수영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거북선의 고향, 여수”라 하듯이 ‘여수’ 하면 ‘이순신’, ‘이순신’ 하면 ‘전라좌수영’이다. 그런데 전라좌수영과 여수군은 동시에 존재하지 못했다. 어찌 된 사정이 있었는지 「여수현의 폐현과 전라좌수영」, 「여수현의 복설운동과 여수군의 탄생」 두 편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여수현의 폐현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여수는 본래 백제의 원촌현(猿村縣)이었는데, 신라에서 해읍현(海邑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여수현으로 고쳐서 승평군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충정왕(忠定王) 2년 경인(1350)에 따로 현령을 두었는데, 본조 태조 5년 병자(1396)에 본부[순천도호부]에 환속(還屬)시켰으며, 돌산(突山)은 본래 백제의 돌산현이었는데, 신라에서 노산현(盧山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다시 돌산현으로 고쳤다.”1)
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 때인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모든 주‧부‧군‧현의 이름을 개정하면서 해읍현을 여수현으로 바꿔 불렀는데, 그때 처음으로 ‘여수’라는 지명이 나왔다. 다만 이때까지는 승평군[순천]의 속현이었다. 그러다가 1350년(충정왕 2)에 여수현에 처음으로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되어 주읍으로 승격하면서 속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수현은 왕조가 바뀐 1396년(태조 5)에 폐현되어 도로 순천부 관내에 편입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이때의 폐현 시점이나 사유에 대해서는 기록들이 엇갈린다. 1726년(영조 2) 5월 27일 지평(持平) 이광운(李光運)이 “순천의 여수면(麗水面)은 고려 말엽의 일개 작은 현인데 국초에 본부[순천도호부]에 소속시킨 것은 성조(聖祖)의 심사숙고 끝에 나온 것으로 더 이상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
라거나, 이듬해인 1727년(동 3) 순천 유학 김우하((金遇河)의 상소에 “태조대왕께서 백성의 폐해를 진념하시어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여수를 순천부에 합속하신 것은 분읍을 하면 백성이 수고롭고 합속을 하면 백성의 힘을 덜 수 있어서였습니다.”2)
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들을 보면, 폐현 시기가 태조대로 되어 있어 『세종실록』 「지리지」와 부합한다. 여수를 순천부에 합속한 이유로는 “성조의 심사숙고”라거나 “백성의 폐해를 진념하시어 시의를 참작하여”라는 정도로만 되어 있다. 그런데 『해주오씨한림공파세보』에는 폐현의 사정에 대하여 “태조는 나라를 세운 후 신왕조 건국 교지를 전국의 수령에게 보냈는데, 이때 여수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성문을 굳게 닫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니, 태조가 이를 듣고 즉각 여수현을 폐현시켰다.”라고 하여 이를 ‘역향(逆鄕)’이라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으로 보았다.3)
하지만, 대부분의 관찬 기록들에서는 “여수는 전라좌수영을 설치한 곳이기 때문에 그 여수현을 혁파하여 순천부에 통합하였는데”4)라고 하여 흔히 폐현의 이유로 전라좌수영의 설치를 들고 있다. 그런데 좌수영 설치는 1479년(성종 10)이기 때문에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말하는 1396년과는 큰 차이가 있다. 훗날 1897년에 여수군을 신설할 때 의정부의 청의서(請議書) 제목이 「전라남도 구역 내 폐지한 좌수영에 여수군을 신설하는 청의서」로 되어 있고, 그 내용에도 “좌수영을 설치함으로 인하여 (여수)현을 폐지하였던 것인데 지금 이미 (전라좌수)영을 폐지하였으니 현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여수현 폐지의 원인이 좌수영의 설치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역향’이란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좌수영 설치 때문인지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좌수영의 설치와 여수현의 폐현이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여수현과 좌수영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음도 분명하다. 한편 여수현이 폐현될 때 돌산현도 폐현된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의 설치 - 여수의 정체성인데…
여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이순신과 거북선, 그리고 전라좌수영이다. 여기서는 전라좌수영의 설치 연혁과 그 역할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5) 조선 초기 수군제도는 고려말 지방군제를 이어 기반을 다져오다가 세종말 이후 일련의 변화를 거쳐 1455년(세조 1)에 크게 달라졌다. 즉 평안도와 함길도에 설치되었던 중‧좌‧우익 편성의 군익도(軍翼道) 체제가 전국으로 확장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2년만인 1457년(세조 3)에 다시 진관(鎭管)체제로 바뀌었다. 진관체제는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들이 수직적 계열을 이루게 하였다. 주진을 중심으로 거진‧제진이 부속되게 함으로써 일원적 군사체제를 분명히 하였다.6) 진에는 위계에 따라 각각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水使),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만호(萬戶)·도위(都尉) 등을 두었다. 수군절도사가 있는 주진이 곧 수영(水營)이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 즉 전라좌수영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해안방어를 강화할 목적으로 1479년(성종 10)에 설치하였다. 이에 앞서 1423년(세종 5)에 진례(進禮)만호가 폐지되고 대신 내례(內禮)만호를 두었는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전라도순찰사 이극배(李克培)의 건의로 내례만호진을 대신하여 좌도수군절도사가 담당하는 전라좌수영을 설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는 내례포진에 자리잡았다. 아마도 성보를 신축하면서 며포(㫆浦)에 있던 전라좌수영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 같다. 전라좌수영의 성은 다른 수군진들과 마찬가지로 1485년(성종 16)에 계획되어 1490년(동 21)에 완공되었다.7) 전라좌수영이 설치되면서 해남에 자리잡았던 기존의 전라수영은 전라우도만을 관할하는 전라우수영으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좌‧우수영으로 나누어 운영되는 전라도 수군의 체제는 『경국대전』(성종 16, 1485)에 법제화되었다.8) 그런데 이렇게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자 이때부터 여수지역은 순천도호부의 일반행정과 전라좌수영의 군사행정이란 중첩된 지배구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임직(專任職) 수군절도사는 경기도,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좌·우도에 각 1명씩 모두 6명이 임명되었고, 그밖에 관찰사가 예겸(例兼)하는 수군절도사가 8도에 1명씩 있었다. 북방에서는 함경남·북도와 평안도의 병마절도사가 수군절도사를 겸직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수군절도사는 전국에 모두 17명이었다. 수군절도사가 근무하는 수군절도사영에는 수군우후(水軍虞候)와 진무(鎭撫)·영리(營吏)·지인(知印)·영사(令史) 등의 관리 및 많은 직속 수군과 전함이 있었다. 수영에는 모두 석성(石城)을 구축하고, 직속군을 두었다. 직속군과 속읍·속진의 군선·병력은 그 숫자가 정해져 있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을 계기로 방어체계가 기존의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전라좌수사는 관할 수군진 뿐만 아니라 연해지역 각 읍에까지 수군의 훈련과 군선 관리 등에 대한 권한도 갖게 되었다.9) 연해지역 전체가 수군기지화(水軍基地化)하였다. 이에 따라 전라좌수영의 관할 지역은 ‘○관(官)‧○포(浦)’로 구분하게 되었다. 한편, 이순신은 1591년(선조 24) 2월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여수와 인연을 맺었다. 곧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해 나갔다. 특히 이때 거북선[龜船]도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10월에 여수의 전라좌수영은 전라·경상·충청 등 삼도수군통제사의 본영, 즉 통제영으로 승격하였다. 이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이 통제사라는 직을 겸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국난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듯 조선 수군의 주력은 바로 좌수영군이었다.
이순신이 순국한 후 1598년(선조 31) 11월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을 통제사로 삼았다.10) 이시언은 1601년(선조 34) 5월에는 경상우수사에 제수되었다.11) 이때 그는 삼도수군통제사도 겸하고 있었는데, 여수의 통제영이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길목인 부산과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를 들어 통제영을 거제로 옮겼다. 이에 따라 여수는 전라좌수사의 본영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할 때 진해루(鎭海褸)가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1599년(선조 32) 이시언이 진해루 터에 75칸의 거대한 객사를 지어 진남관(鎭南館)이라 이름하였다. 1716년(숙종 42) 불에 타버린 것을 1718년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다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상징 건물로 조선시대 사백여 년간 수군의 본영이 자리한 역사적 현장이다. 한편, 전라좌수영은 고종이 즉위한 이후 약간의 변화를 겪는다. 1866년(고종 3)부터 각 지방 연해안의 군비도 적극적으로 강화하고 특히 조선 해안 일대에 이양선이 출몰하는 것은 해방의 소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여 수군의 강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에 따라 전라좌수영의 본영과 그 관할 지역의 영을 복설하고 관아 등을 개축하였다. 1871년(동 8)에는 낙안군과 광양현에 별무사(別武士)와 포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라좌수영의 전력은 상당히 증강되었으며 그 면모도 새롭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12)
전라좌수영 관할 해역의 변화 『경국대전』에 따르면, 설치 당시 전라좌수영의 관할 해역은 해남반도의 남단을 경계로 하여 그 동쪽의 전라도 해안지역 즉, 강진현‧장흥도호부‧보성군‧낙안군‧순천도호부‧흥양현‧광양현 등 7관이었고, 진포(鎭浦)로는 달량(達梁)·마도(馬島)·회령포(會寧浦)·녹도(鹿島)·발포(鉢浦)·사도(蛇渡)·여도(呂島)·돌산 등 8포(浦)였다. 즉 전라좌수영은 ‘7관·8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522년(중종 17)에 강진현 완도에 가리포진(加里浦鎭)이 설치되면서 관할이 달라졌다. 즉 가리포진이 전라우수영 소속이 되면서 좌수영의 관할은 ‘6관·6포’로 줄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관할 해역이 해남반도 동편에서, 보성군의 동쪽 전남 해안지방으로 축소되어 현 해남군의 일부와 강진군 및 장흥군의 해역이 전라좌수영의 관할에서 빠졌다. 따라서 전라좌수영 아래 속읍(屬邑)으로 수군이 편성되어 있는 곳은 순천부·낙안군·보성군·광양현·흥양현 등 5관이었고, 수군진은 속진(屬鎭)인 방답진(防踏鎭)·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 등 5포였다. 즉 ‘5관·5포’였다. 그 후 1686년(숙종 12) 9월에는 좌수사 신유(申鍒)의 청에 따라 장흥 회령포진의 전선(戰船)과 기타 변장(邊將), 그리고 강진의 경내에 있는 가리포·마도·신지도(新智島)·고금도(古今島) 등 4개의 진을 좌수영 소속으로 옮겼다.13)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690년(동 16) 경오년에 어사 심계량(沈季良)이 왕래하는데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자 다시 우수영으로 환속시켰다. 그 뒤 어사 권상유(權尙游)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장흥의 전선과 회령포의 전선 1척을 좌수영에 예속시키게 했다. 이런 이속(移屬)의 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777년(정조 1)에도 전라좌수사 이문덕(李文德)이 강진 경내의 4개 진(鎭)을 좌수영에 이속시킬 것을 청하였다. 왜 강진 경내의 4개 진들이 이처럼 좌‧우수영으로 그 소속이 왔다갔다 했을까? 그 까닭은 육로와 수로의 원근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즉 육로로는 우수영에 가깝지만, 배는 수로가 중요한데 좌수영 쪽이 파도가 없어 선척 운행에는 좌수영이 용이하였던 것이다.14) 어느 쪽의 통행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소속이 왔다갔다 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좌·우수영간의 힘의 우열, 또는 해방(海防) 요인의 변화 등도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19세기 초에 장흥의 회령포진이 다시 좌수영 관할로 복귀하고 고돌산진이 복설되면서 6관 7포를 관장하게 되었다.15) 이처럼 관할 해역은 시기에 따라 들락날락하여 일정하지 않았는데, 대체로는 ‘5관·5포’로 통용되었다. 전라좌수영의 폐영(廢營)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4년 6월 28일 군국기무처에서 의정부 이하 각 아문에 대한 중앙관제의 대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때 군무아문(軍務衙門)을 두어 “전국의 육군·해군의 군정을 총할하며 군인·군속을 감독하며 관내 제부(諸部)를 통솔”하도록 하였다.16) 그리고 이듬해인 1895년 7월 15일(양 9월 6일) 칙령 제139·제140·제141·제142호를 동시에 발표하여 삼도통제영을 비롯하여 각도의 병영·수영 그리고 각 진영과 진보, 감목관 등을 모두 폐지하였다. 소속된 장교와 병졸들은 해방시켰다. 말이 해방이지 사실상의 지방군 해산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소속 군물(軍物)·선척(船隻) 등은 군부(軍部)로 이속하였고, 그 나머지는 소재 지방부청 및 군청에 이속하고 탁지부가 관리하도록 하였다.17) 이에 따라 조선의 수군은 소멸되었다. 이때 전라좌수영도 폐영되었다. 400여 년을 넘게 조선 수군의 주역으로 해양 방어의 혁혁한 역사를 썼던 전라좌수영은 이렇게 이순신의 이름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혁파 이후 좌수영은 방치되다가 관아건물들이 훼철되었고, 특히 일제의 식민통치기인 1916년의 해면 매축(海面埋築)과 민가 조성으로 좌수영지의 파괴가 더욱 가속화하였다.18) 이렇게 전라좌수영은 진남관 등 일부만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순천도호부
2) 『영조실록』 11권, 영조 3년(1727) 2월 3일 경신 2번째 기사 3) 『海州吳氏翰林公派世譜』(호남문화사, 1982), 5쪽. 이민규, 「제4장 제1절 조선의 건국과 여수현의 변천」(『여수시사』 제1권, 여수시사편찬위원회, 2010), 157쪽 4) 『국역비변사등록』 166책, 정조 8년(1784) 2월 29일 5) 좌수영의 역사에 대하여는 鄭淸柱, 「全羅左水營의 역사」(『全羅左水營의 역사와 문화』, 순천대박물관, 1993) 참조 6)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한국연구원, 1983), 247〜249쪽 7) 김만호, 「제4장 제2절 전라좌수영과 여수」(『여수시사』 제1권. 여수시사편찬위원회, 2010), 165〜167쪽 8)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조선시대 수군진조사 Ⅱ- 전라좌수영 편』(2014), 19, 27쪽 9) 송은일, 「조선 전기 고흥지역 水軍鎭의 설치와 水軍의 동향」(『역사학연구』64, 2016. 11), 49쪽 10)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5일 8번째 기사 11) 『선조실록』 137권, 선조 34년(1601) 5월 3일 2번째 기사 12) [김만호, 앞 글, 178쪽] 13) 『국역비변사등록』 40책, 숙종 12년(1686) 9월 17일 14) 『국역비변사등록』 158책, 정조 1년(1777) 4월 6일 15) 김경옥, 『수군진 – 물고기 비늘처럼 설치하다』(민속원, 2019), 119쪽 16) 『고종시대사』 3집, 고종 31년(1894) 6월 28일 17) 『고종시대사』 3집, 고종 32년(1895) 7월 15일 18) 徐致祥, 「全羅左水營城에 대한 復原的 考察」(『全羅左水營의 역사와 문화』, 순천대박물관, 1993), 54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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