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그리움이 사무쳐도 고향은 없네 게시기간 : 2020-09-0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8-31 10:2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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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의 첫 무대, 벌교 가는 길 서재필 사당의 영정, “어찌하면 노인이 되어서도 저리 단아할 수 있을까?” 과도정부 최고의정관 시절이다. 청년 시절 누구라도 견딜 수 없었을 상흔이 씻긴 것인가? 아스라하다. 학창 시절 국사선생님은 ‘이자겸이 권력을 위하여 금나라를 섬기고, 김부식이 고구려 부흥을 꾀하는 묘청을 진압하면서 우리나라는 사대국(事大國)으로 전락하였다’고 가르쳤는데, 난로가 없어 교실 밖 양지바른 터에 모인 우리는 그렇다! 하였다. 그때 선생님은 ‘서재필 박사는 미국에 귀화하고 미국여자와 결혼하였다’는 사실을 빠뜨리지 않았다. 선각자지만 국외자란 각인이었다. ‘1905년 미국과 일본은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필리핀과 한국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분하고, 미국인과 동행하는 여성을 보면 ‘양공주(洋公主)가 아닐까?’ 눈총을 보냈던 시절이라서 그랬을까? 한동안 서재필은 너무 멀었다. 서재필은 또한 백성은 어리석다는 우민관(愚民觀)에 젖어있었고, ‘러시아를 반대하고 중국을 멸시하고 미국과 너무 친밀한’ 정세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오월 광주’를 겪으면서 ‘미국은 한국에게 무엇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 광복 50주년에 즈음하여 ‘서재필기념공원’이 조성된다는 소식에 멀뚱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덧 우리 시대 ‘사랑하는 아들딸이 의문사와 고문치사’를 당하던 기막힌 죽음, 그들의 부모 형제가 투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억울한 세월을 만나면서 문득 ‘미국 귀화, 미국인 아내를 문제 삼으면 아니 되겠다’ 하였다. 서양인 주교에게 박해 사실을 알리려고 하였던 황사영(黃嗣永)을 ‘민족’을 기준으로 단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민관 문제도 달리 생각해보았다. 시대의 구각(舊殼)을 벗어나려면 일반 대중을 지도하고 계몽해야 하지 않을까? 대중의 무지와 나태를 질타하고 개탄하였대서 그 자체가 잘못인가? 백성의 무지와 미몽(迷夢)을 누가 바라는가? 탐욕과 부정을 숨기고 권세와 재산에 골몰하는 거짓 세력이야말로 ‘깨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백성’을 바라지 않는가? 한 것이다. 역사의 진보는 하나의 길만을 앞세우지 않는다. 다른 길이 얽히고 다른 생각이 섞이는 갈등과 투쟁, 경쟁과 협력을 통하여 이룩된다. 오직 하나를 편들면 독단이며 배척이며 혐오다. 서재필 또한 여러 길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오늘, 여기, 우리의 모습이다. 서재필이 말년에 살았던 메디아 주택은 기념관으로 꾸며져 미국인조차 심심찮게 찾고 있는데 막대한 예산을 들인 우리의 기념관은 덩그렇게 우람할 뿐, 오가는 이들마저 의아해한다. 이제라도 가내마을을 글을 읽던 옛 도서관 마을로 꾸미고, 서재필 기념공원을 작가와 학자의 작업실 집필실로 바꿔내며, 개혁과 독립, 해방과 분단, 전쟁과 평화를 공부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하여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가까운 곳 노사의 문인 정시림이 강습재(講習齋)를 열었던 동산리 법화마을에서 머슴의병장 안규홍이 의기를 세웠고, 송광면 우산리에는 안방준과 그 후예들의 강학 공간인 빙월정(氷月亭)ㆍ송매정(松梅亭) 등이 주암호를 바라보며 아늑하다. 또한 주암댐 건설 때 쏟아진 유물을 모아놓은 고인돌공원은 선사학습체험공간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 독천 삼거리에서 주암호를 벗어나 15번 국도를 타면 낙안읍성 들기 전 순천시 외서면이다. 1998년 시굴 조사부터 구석기유물이 알차게 출토된 ‘월평유적’으로 국내외 고고학계에 알려졌지만, 『태백산맥』의 시리게 아프고 서럽다 못해 분(忿)마저 삭혀버린 여인, ‘외서댁’으로도 유명하다. 벌교읍이 가깝다. 1948년 남로당이 단선단정 반대를 앞세우고 일으켰던 ‘2ㆍ7총파업’은 비합법무장투쟁으로 비화하며 유혈이 낭자하였고 ‘제주 4ㆍ3’은 피울음을 쏟아냈다. 가을이 되어서도 산하는 핏빛으로 검붉었다. 이때 제주도 출정을 앞둔 여수 14연대가 ‘동족상잔 반대’의 기치를 세우고 무장투쟁을 일으켰다. 10월 하순, ‘여순항쟁’이었다! 삽시간에 전남 동부 여러 지방에 인민위원회가 출현하였다. 『태백산맥』은 농민의 삶과 갈망, 슬픔과 분노가 차가운 갯바람에 넘실대는 벌교 뜰에서 시작한다. * 채동선, 토속적 서정으로 조국의 아픔을 노래한 가인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며 한때 좌익을 했던 사람들은 전향서를 쓰고 ‘국민보도연맹’에 들어갔다. 충청도 옥천 출신으로 이화여자대학에서 문학과 라틴어, 서울대학교에서 『시경』을 가르치며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였던 시인 정지용(鄭芝溶)도 그랬다. 강진의 김영랑, 광주의 박용철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발표한 「고향」은 아릿한 언어로 그리운 옛집의 풍광을 그림처럼 담아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 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리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은 1933년 채동선(蔡東鮮)이 곡조에 담으면서 고향을 앗긴 사람들을 울린 당대의 애창곡이 되었다. 그러나 시인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납북되는 바람에 곡조는 그대론데 가사는 박화목의 「망향」, 이은상의 「그리워」로 바뀌었다. 1988년 월북 문인의 작품이 풀리면서 노랫말이 제자리를 잡았는데, 간혹 ‘채동선의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즈음 채동선이 ‘벌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지상에 오르내렸다. 홍교 가까운 벌교공원 아래에 생가가 있다며…. 채동선은 벌교에 보통학교가 없을 때 이웃 순천으로 다녔는데 머슴이 업고 다녔다. 경성고보에 진학해서는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까지 갔다. 부친은 유학 가서 경제학을 전공하라고 당부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친은 벌교에서 남선무역회사를 경영하고 벌교사립학교를 세웠던 부호였다. 금융조합장ㆍ학교평의원을 지내며 총독 표창도 받고 1934년 세상을 떠나자 벌교에서는 송덕비까지 세웠다. 채동선은 일본에서 교향악단에 들어가 순회연주를 다녔고, 미국서는 아예 진로를 바꿔 독일로 가서 음악을 전공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을 때 최고의 격찬을 받았다. “겸허하고 심중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적막한 반도 악단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천재 음악가.” “조선이 처음 만나는, 풍부한 음악적 지식, 정확한 소리, 인격의 고결함을 예술적으로 표상한 최고 예술가.” 그러나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전시체제로 들어가자 활동을 멈췄다. 고향 땅을 처분하여 서울 수유리에 2만 평 농지를 구입하고 원예농업에 종사하였다. 성북동에서 수유리까지 10여 리, 새벽에 나가 저물녘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며 『농사일지』를 적었다. 전쟁을 찬양하고 생명을 죽이는 노래와 글을 지어야 했던 세상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민요를 채집ㆍ편곡하였다. 해방은 채동선을 불러냈다. 대학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며 창작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민주주의민주전선에 참여하여 ‘민족주의 음악가들은 중간에서 단합할 것’을 역설하였다. 극단의 세월, 중도를 추구한 것이다. 또한 「문화정책의 수립」 「문화정책 우감(偶感)」 등에서 신국가 문화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음악문화 건설에 관하여」에서는 예술지상주의를 데카당적 악마주의로 비판하고 ‘국민 된 책임감으로 민족자결 정신을 신봉하고 정통적 순수음악의 수립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전쟁통에 부산에 살면서 그만 영양실조에 복막염이 겹치며 회복하지 못하였다. 1953년 2월, 향년 53세. 채동선을 만나고 싶다. 해방 공간 채동선의 논설을 검토하면 요즈음 계속되는 ‘예술의 참여ㆍ순수논쟁과 문화정책’이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랜 숙성을 거친 주제임을 알 수 있다. 혹여 민요 찾기와 민족극 운동에 남긴 흔적은 없을지? 또한 『농사일지』를 분석하면 일제강점기 근교원예농업의 한 페이지를 넉넉히 채울 수 있을 듯싶다. 그렇다면 농사와 율려(律呂)는 비록 영역은 달라도 천시(天時)ㆍ천운(天運)에 따르며 자연과 생명을 키우는 사람의 마땅한 사업임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채동선의 가족은 벌써 벌교 땅과는 멀어졌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벌교공원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모하고 있다. 벌교에 ‘채동선 음악당’을 짓는다고 하니 반가운 소식이다. 기왕에 세워질 음악당이라면 채동선이 평생에 그토록 열의를 가지고 채록 편곡한 민요를 전시 보급한다면, ‘서편제 본향’에도 걸맞을 것이다. 벌교의 점심은 달콤하였다. 그런 중에 누군가 물었다. “『태백산맥』 문화부 중대장 조원제가 박현채 선생이라는데요, 그렇습니까?” * 박현채, 기억과 인연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70, 80년대 ‘의식화 학습’의 필독도서였다. 일찍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임교수가 거의 다 되었는데, 공부 성향이 문제가 되어 탈락하였고 이후 여러 대학 시간강사로 살며 ‘인민혁명당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사건’ 등에 연루되어 순탄치 않았다. 당신의 글은 시대를 향한 편지와 같았고, ‘민족경제 수립을 위한 정치적 당면과제’ ‘민중의 민족적 과제와 전술’ ‘축소 지향적 민족적 생활양식’ 등의 화두는 그 반향이 깊고 넓었다. 어쩌면 살아남은 자로서 시대 변혁을 위하여 먼저 떠난 사람에게 들려주는 고백이었는지 모른다. 일찍이 풀빛 나병식 형에 이끌려 중구청 앞 골목길 허름한 사무실로 처음 찾았는데, 조선대학교가 민주화되면서 정교수로 초빙되고 나 또한 공채되면서 자주 만났다. 언젠가 물었다. “선생님, 왜 문장이 이리 길어요?” 그런데 태연자약, “어허, 원고료가 있잖아.” 조정래 작가가 선생을 만나러 왔을 때도 옆자리에 낀 적이 있었다. 1950년 10월 서중학교 2학년 16살에 마을 가까운 백아산에 들어가서 소년돌격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복무하다가 총상을 입고 환자비트에 있다가 1952년 88월 하산 체포되었던 전력이 있었다. 세무서 다니던 부친이 온 재산 바치다시피 하여 겨우 살아났다. 선생의 입산 장면이 『태백산맥』에 나온다. “실례하겠소. 무슨 일이오?” 염상진의 목소리는 거칠고 위압적이었다. “누군디, 왜 그요?” 총을 든 젊은이가 조금도 달라지는 기색 없이 염상진에게 눈길을 딱 고정시켰다. 그 당돌한 것 같기도 하고, 당당한 것 같기도 한 태도에 염상진은 어이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셋 중에 키나 몸집이 제일 작았고, 얼굴까지 하얘서 그런 태도가 영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눈만은 예사롭지 않게 총기가 서리고 날카로웠다.… 보성군당위원장 염상진에 당돌하였던 총을 든 젊은이가 박현채였다. 어느 날 물었다. “박준옥이란 분을 아시지요?” “우리 중학 다닐 때 교장선생님이셨어, 일본 구주제대 나왔지. 입산해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공부 가르쳤어.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치기가 쉬운가. 그런데 아주 쉽게 말씀하여 사람들이 좋아했지. 환자들이 있는 ‘비트’에서도 많이 가르쳤다. 그러면 사람들이 ‘선생님 오셨다’고 하면서 먹지 않고 아껴놓은 떡이나 과자를 드리곤 하였지. 그러면 다 잡수고 않고 나한테도 주고 가셨어. 하루는 엿을 받고 ‘현채 갖다 주어야겠다’ 하시며 오셨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겼지. 거기에서 총 맞고 돌아가신 거야. 자네가 왜?…” 『태백산맥』에서 박준옥은 ‘출판과장’으로 나온다. 오랜 교단생활 경험으로 출판과장은 어려운 이론을 아주 쉽게 풀어서 강연하는 솜씨로 지구의 모든 대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특히 배움이 없는 기본출들에게 그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그 인기는 인기로 끝나지 않고 기본출들 거의는 출판과장을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가 주로 하는 강연은 ‘사회발전사’였다. 인간의 원시생활과 노동의 시작, 노동의 신성과 평등, 농경생활과 집단사회, 공동경제사회와 정치권력구조, 봉건사회와 경제착취, 착취의 부당성과 노동신성권의 회복, 혁명의 필요성과 인민이 주도하는 혁명, 이런 단계로 풀어 가는 강연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웠고 설득력이 강했다.… 그런 존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투(補鬪)를 나간 대원들은 출판과장에게 선물할 물건을 따로 챙기게 된 것이었다. 꿀, 조청, 약 같은 것을 손에 넣게 되면 출판과장에게 갖다 주었고 그런 귀한 것을 구하지 못한 대원들은 지고 온 쌀을 축내 선물하기도 했다. 박준옥은 넉넉하지 않으나 자존심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성 미력면 출신으로 본관은 진원. 구주제대를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대지주였던 호남은행장 현준호(玄俊鎬)의 장학금 덕분이었다. 현준호는 비록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지만, 박준옥만이 아니라 여러 유망 청년에게 그런 혜택을 베풀었는데, 일찍이 김성수ㆍ송진우 등과 같이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에서 배우고 휘문의숙을 거쳐 일본 메이지 대학을 다녔다. 박준옥은 한때 유명한 친일기업인 박흥식의 화신백화점에서 근무하며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나온 규수와 결혼하였다. 해방 후 공산당에 몸을 담고 한동안 정읍 등지에서 지방조직을 추스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한 곳에 살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부인은 이제나저제나 부군이 돌아올까 밥상을 차릴 때면 먼저 부군의 밥그릇을 먼저 챙겼다. ‘인공’ 때 서중학교 교장에 부임하며 만났지만, 곧바로 영영 이별하였다. 당시 부인은 29살, 주위에서 재가를 권유하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찌 그런 분을 다시 만날 수 있겠소?” 부인은 농번기에는 광주 양과동 친정에서 농사짓고 농한기에는 날품을 얻어가며 세 딸을 키웠다. 딸들은 단정하게 자랐고 모두 일류 ‘전남여자고등학교’를 나와 큰딸과 둘째 딸이 직장을 잡고 막내만 고학으로 ‘일류’대학을 마쳤다. 부인은 사위를 보고 서울에 올라와 외손자들을 키웠다. 남동생 집안일도 해주었다. 서울 온 조카를 옆에 두기도 하였다. 그러고도 자주 친정을 오르내렸다. 오는 길에 메주나 말린 밑반찬을 가져와 여기저기 나누었고 자라는 외손의 옷은 조카의 새아기에게 모아주었다. 부인은 환갑이 되자 친정에서 부모를 모셨다. 세 노인이 함께 살았다. 배추 심어 김장하고, 무우 심어 동치미 담고, 콩을 심어 메주 찧고…. 이제 서울은 가기 싫었고 몸은 지탱하기 쉽지 않았다. 이때도 부군의 밥을 따로 차리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새벽 마을 저수지에 싸늘하게 누워버렸다. 아마 부군과 함께 거닐었을 꿈을 꾸었을 게다. 향년 예순다섯. 출판과장 가족이야기에 선생은 시선을 천장에 꽂았다. 탄식은 짧고 깊었다. “아아, 그래.” 이돈명 변호사가 임기 마치고 조선대학을 떠나고 1년여 진통 끝에 정병휴 선생이 차기 총장으로 확정되었을 때였다. 큼직한 수박을 가져오며 좋아하였다. “이돈명 변호사가 학교 안정을 찾았으니, 정병휴 선생은 내실을 다져야지.” 광주의 식사는 거칠고 때가 없었으며, 서울과 광주는 항상 고속버스였다. “새마을 타세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간혹 터미널로 마중 나갔다. “전화하시면 나갈게요.”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그러다가 ‘어디십니까?’ 묻기 전에 공중전화가 끊기면, 2시간을 너끈히 기다린 적도 두어 차례, 그런 날도 어김없이 후배 교수나 광주의 벗과 어울렸다. 어느 날 저녁 모임 자리를 따랐는데 대학병원을 들렸다. 사과 봉지만한 약을 받으며, “약이라도 들 수 있음이 다행이다.” 어느덧 추스를 수 없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퇴직과 투병, 미국 방문교수로 나갔다가 전화가 놓이자 이곳저곳 알리던 중에 부음을 들었다. “아아, 보라매 병원을 다녀오는 것인데….” 1995년 8월 17일 향년 61세, 지금 천안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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