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호남한시산책(2) “산 중턱엔 안주상, 가을 골짝엔 술잔이” 게시기간 : 2020-09-03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0-09-02 10:5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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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는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이 지은 「소요당에 쓴 배율 40운」의 일부분이다. 시제에서 ‘40운’이라 했으니, 총 80구로 이루어진 장편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려운 한자도 여러 개 쓴 시이기는 하나 두 구절씩 묶어 문장 형식으로 좀 더 상세히 풀이해 보았다. “난간 밖에서는 배가 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새가 훨훨 날아가는 듯하고, 처마 앞에서는 마치 고기를 잡는 어부가 그물을 던지는 듯하였다. ‘양양(颺颺)’은 새가 힘차게 날아다니는 모양을 말하고, ‘예예(濊濊)’는 그물을 물에 던질 때 나는 소리를 뜻하니, 각각 의태어와 의성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산 중턱에는 안주상을 늘어놓았고, 가을 골짜기에 술잔과 바리, 즉 놋쇠 그릇을 펼쳐놓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있는 사람의 기세는 한없이 드높고, 몸은 마치 그림 속에 앉은 듯하였다. 옥으로 만든 소반에는 궁에서 보낸 반찬이 나누어져 있고, 노란 보자기에는 궁에서 보낸 술이 있다.”
시는 문장과 달리 함축적이다. 작자는 짧은 어구 속에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니, 실로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작자는 때로는 은유법 등 수사법을 동원하여 상대방이 뜻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하도록 짓기도 한다. 중국 남송 시대 나대경(羅大經)이 쓴 『학림옥로(鶴林玉露)』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나온다. ‘촌철’이란 성인 남자 손가락 한 개 폭의 쇠로 만든 무기를 말하고, ‘살인’이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을 죽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살인’이란 진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아니라 참선으로 마음속의 잡스러운 생각을 없애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촌철살인을 처음 말했던 사람이 종고 스님이라는 분이니, 그런 만큼 역시 불교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오늘날 촌철살인은 아주 짧고 간결한 말로 핵심을 찔러 상대방이 감동을 받거나 당황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니, 원래 의미와 대비했을 때 상당히 달라졌다. 박상이 지은 「소요당에 쓴 배율 40운」 시를 읽을 때면 촌철살인이라는 한자성어가 떠오른다. 촌철살인이 “상대방이 감동을 받거나 당황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때 「소요당에 쓴 배율 40운」을 창작한 박상은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기보다는 당황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선 중기에 심정(沈貞, 1471~1531)이라는 문신이 있었다. 심정의 호는 소요정(逍遙亭)이니, 박상이 지은 「소요당에 쓴 배율 40운」과 깊은 관련이 있을 듯하다. 즉, 박상의 시 제목에 등장하는 ‘소요당’은 심정이 지은 별장 이름으로, 심정은 자신의 호를 따서 당의 이름을 정했던 것이다. 소요당이 있었던 곳은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어느 날 심정이 이 김포군 양촌면에 소요당이라는 별장을 만들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자신이 지은 별장이 얼마나 훌륭한지 자랑하고 싶은데, 그냥 말로 하면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당시에 시 잘 짓기로 유명한 박상에게 “시 한 편 지어주시오.”라고 부탁하였다. 심정이 박상보다 세 살 위이고, 벼슬도 더 높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박상은 후배 된 입장에서 선배가 부탁을 하니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통 시대에 어떤 사람이 별장이나 누정을 지으면, 다른 사람은 그와 관련한 기문 또는 제영시를 통해 찬양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시나 문장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당연히 찬양받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고, 반면 시나 문장을 지어주는 사람은 지어달라고 부탁한 사람의 뜻을 보통은 크게 거스르지 않는다. 심정도 박상에게 자신이 지은 별장과 관련해 시를 지어달라고 부탁할 때 당연히 찬양하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박상은 심정의 바람을 여지없이 저버렸다. 앞에서 풀이한 「소요당에 쓴 배율 40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보자. 소요당 난간 밖에는 배가 떠다니고, 소요당의 처마 앞에서는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소요당은 강가에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강가에 지은 소요당은 마치 산 중턱에 있는 듯한데, 그곳에 안주상을 차려놓았고, 또한 가을 골짜기에 술잔과 음식을 담는 그릇을 펼쳐놓았다. 이 부분이 「소요당에 쓴 배율 40운」 시의 압권이다. 이 부분의 원문을 다시 적어보면, “반산배안조(半山排案俎) 추학벽준맹(秋壑闢樽孟)”이다. ‘반산’과 ‘추학’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산 중턱’, ‘가을 골짜기’이인데, 박상은 자신의 속내를 직접 드러내지 않은 채 은유적인 기법을 써서 심정을 비꼬았던 것이다. ‘반산’은 북송 시대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 신법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던 왕안석(王安石)의 호이고, ‘추학’은 남송 말기의 권신(權臣)인 가사도(賈似道)의 호이다. 이들은 모두 당시 나라를 망친 신하들로 알려져 있는데, 박상은 심정이 마치 이 두 사람과 비슷하다라고 은근히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를 잘 알지 못했던 심정은 박상이 자신을 은근히 비꼬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박상이 자신을 비꼬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소요당 현판에서 박상이 지은 시를 뜯어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묘록보유』 등 책에 전해오고 있어 당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박상이 심정에게 써준 또 다른 시와 관련해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는 그의 글 「소요당 서문 뒤에 쓰다〔書逍遙堂書後〕」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심정이 눌재 박상에게 시를 써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눌재가 써 준 시의 1연에 “낙엽은 가을 골짜기에 쌓이고, 석양은 산중턱에 걸려 있다.〔落葉藏秋壑 斜陽映半山〕”라는 내용이 있었다. 심정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하다가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야 그것이 은어(隱語)라는 것을 비로소 알고, 크게 화를 내며 뜯어서 불태워버렸다.
이 인용문에 나온 시에도 ‘추학’과 ‘반산’이 나온다. 이 둘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중의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보통명사로 풀이할 때와 고유명사로 풀이할 때의 의미가 너무 다른데, 심정은 처음에 ‘반산’과 ‘추학’이 왕안석과 가사도를 가리키는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만일 처음에 자신을 비꼬는 시라는 것을 알았다면, 소요당 현판에 박상의 시를 내걸었겠는가. 박상이 「소요당에 쓴 배율 40운」을 지은 시점이 1519년(중종14)에 일어난 기묘사화 이전인지 이후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정황상 심정이 박상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이전이라고 생각한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인 심정이 사람으로서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사화 이후에 사림들에게 추앙받았던 박상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상은 그의 나이 54세 여름에 나주 목사에 부임하였는데, 2년 뒤 56세 여름에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고하(考下)를 받고 파직을 당하였다. ‘도목정사’란 1년에 두 번 실행하는 벼슬아치의 성적 평가표인데, 박상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이때 박상에게 낮은 점수를 주었던 전라도 관찰사는 심정과 친했던 조방언(趙邦彦)이었다. 조방언은 평소 심정으로부터 박상에게 시로써 수모를 당했던 일을 누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상이 평가를 받는 위치에 놓이니 조방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하점을 부여하였다. 박상과 심정의 악연은 박상이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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