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1590년 성산 계사(溪榭)의 탁열, 식영정과 환벽당 게시기간 : 2020-09-0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9-03 14:5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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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신선인듯 누정의 풍류놀이, 낮일은 다 잊은채 잠이 든다. 시내 다리에서 등촉을 잡고 돌아 온 곳은 소쇄정이다. 어딘지 헤아려 진다. 그 시심으로 한발짝 더 가 보자. 인연 따라 모인 선비들이 물소리 바람소리 거문고소리에 흥취가 돋아 시끌벅적한 한마당. 술병 들고 승경을 보면서 시를 읊으니 문학이 성행했던 사영운(謝靈運)의 강좌도 생각나고. 모두가 지상의 신선마냥. 무등산은 가을빛이 들어가고 푸른 대나무와 우거진 소나무도 이슬이 맺힐 듯 어둑해 지니 등촉을 부여잡고 시내 다리를 건너 소쇄정으로 돌아간다. 취흥 탓에 성산 탁열은 흐릿한데 밤잠은 밀려온다. 광주목사 죽유 오운(竹牖 吳雲, 1540~1617)선생의 시이다. '탁열(濯熱)' '시회(詩會)'를 마치고 소쇄원에서 유숙했던 것. 때는 1590년(선조 23, 경인) 6월 복날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8월, 찌는 더위가 한창일 때다. 당시의 정경을 형상화 한 목판화가 전한다. 무등산 원효계곡, '별뫼'라 부르는 성산(星山)의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 선비들이 물가에, 나무 곁에, 정자 안에 버선을 벗어 던지고 평좌하여 계곡에 발을 곧 담그려는 그 장면. 남도 선비들의 계산풍류 진경(眞景). 식영정과 환벽당, 서하당, 소쇄원을 중심으로 열한분의 선비가 복날 더위를 식히기 위해 시회를 열었던 모습이다. 김성원의 문집인 『서하당유고』와 정암수(1534∼1594)의 문집인 『창랑유집』에 전해오고 있다. 『서하당유고』에 탁열도 도판에 이어 참여자의 자호와 본관, 직명이 기록되어 있다. 김복억(1542~1600, 창평 현령)‚ 김부륜(1531~1598, 동복 현감)‚ 최경회(1532~1593, 담양 부사)‚ 오운(1540~1617, 광주 목사)‚ 양자정(1527~1597?)‚ 김성원(1525~1597, 현감)‚ 정암수(1534~?, 진사)‚ 정대휴‚ 김사로‚ 김영휘‚ 임회(1562~1624, 좌윤) 등. 예순 여섯의 김성원이 좌장격이고 스물아홉의 장년 임회가 끝자리이다. 그야말로 노소동락이다. 목사, 부사, 현감이 모였건만 관직도 벗고 갓끈도 풀었다. '장유유서'가 엄연한 사회였건만,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을 벗하고 우주를 논하는 자리에서는 오히려 너나없이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선비들은 시내가 언덕에서 더위를 씻고 흐르는 물속의 반석을 보며 튀는 백파를 보며 삶의 이치를 깨닫고, 탑바위에 정좌하고 묵상에 잠겼다. 곧 평상바위에서 우레 소리를 내며 장기를 둘 것이고 옥추에서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벗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나주반 위 정갈한 음식에 죽력고를 곁들였을게다. 아니 ‘추성주’였을까. 술이 몇 순배 돌고나면 흥에 겨워 시회(詩會)도 무르익었을 것이다. 저 큰 노송은 조대쌍송이었을 터. 그리고 늘어진 버드나무. 그런데 한 가지, ‘계류(溪柳)’의 표기가 늘 걸린다. 물과 인연 있는 버들, 계류·천류(川柳)·안류(岸柳)·유정(柳汀)·양안(楊岸)이 있기는 하다. 근래 들어 ‘溪流’로 잘못 표기하곤 한다. 그런데 ‘계사(溪榭)’ 기록을 확인했다. 시내(溪)와 어울어진 정자(榭), ‘溪榭’. 당시 경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성산과 창계에 어울어진 식영정, 환벽당, 서하당. 앞에 든 시의 제목은 “又用前韻(또 앞의 운을 쓰다)”이다. 오운의 문집 『죽유선생문집』권1에 있다. 제목을 따라 그 시를 찾아 본다. 제목은 “경인 6월 복날에 김백선 복억(金伯善福億) ... 임공직 회(林公直檜)로 더불어 식영정에서 유상하며 성산계사탁열도(星山溪榭濯熱圖)를 만들어 돈서(惇叙)운을 써서 짓다(庚寅六月伏日 與金伯善(福億),金惇叙(富倫),崔善遇(慶會),梁季明(子停),金剛叔(成遠),丁應龍(巖壽),鄭經明(大休),金期聖(師魯),金國舒(永暉),林公直(檜) 遊息影亭 作星山溪榭濯熱圖 用惇叙韻.)”이다. ‘시냇가 다리에 말 매어두고 힘들게 올라오니(溪橋舍馬費攀緣) 푸른 대나무 소나무 있는 작은 별천지라(翠竹蒼松小洞天)’로 시작하는 시이다. 시의 제목이 길지만 당시의 ‘탁열’ ‘시회’ 경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눈여겨 볼 것이 바로 ‘作星山溪榭濯熱圖’이다. ‘성산계사 탁열도’를 제작했다는 것. 『서하당유고』의 탁열도와 함께 실린 시 가운데 두 번째 시의 제목이다. 『서하당유고』에는 지은이가 기오헌(寄傲軒)이다. 당시 광주목사 죽유 오운의 별호이다. 그런데 『서하당유고』와 『창랑유집』의 목판화에는 ‘성산계류탁열도’이다. ‘성산계류(溪柳)’라 했지만, 작자 오운의 문집에 실린 시의 원 제목을 보면 ‘성산계사(溪榭)’. 작자는 ‘성산 계사’로 표기했다. 언젠가부터 ‘성산계류(溪柳)라 한듯 싶다. 아마도 문집 간행 전후가 아닐까 싶다.『서하당유고』는 1888년경, 『창랑유집』은 1897년 목활자본으로 간행한다. 시의 제목을 통해서 ‘성산계사’ 표기를 보았다. 또 눈여겨 볼 것이 제목의 끝에 ‘용돈서운(用惇叙韻)’이라 한 것. ‘돈서’의 운을 썼다는 의미이다. ‘돈서’는 성산 계사의 탁열에 참여한 설월당 김부륜의 자(字)이다. 당시 동복현감. 그런데 이 시는 김뷰륜의 『설월당집』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이어 광주목사 오운이 지은 시가 한수 더 있다. 지금까지 김부륜과 오운이 서로 운을 맞춰 지은 두 수의 시가 알려졌지만, 오운의 시가 한수 더 있어 세 수가 전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소쇄정에서 오운과 김부륜이 유숙하면서 화운한 글도 있을 것 같다. 1590년 무등산 원효 계곡 성산 계사에서의 ‘탁열’ ‘시회’로 글을 열었다. 어느 한 때로 한정하여 일종의 ‘다시보기’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고려, 조선, 근대에 이르는 시기의 담양권 누정시인을 조사한 결과 480여명에 이르렀다. 광주를 포함하여 무등산권으로 한정하더라도 수백인에 이를 것이다. 그 인문학적 기반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때 ‘누정제영원림’ 또는 ‘시가문화 유산지구’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검토한 바도 있다. 누정과 원림, 경관 등 일정 분야로 한정된 ‘따로 따로’가 아니다. 퇴휴와 수신, 강학과 공동체공간이었고 그 기반이 바로 인문학적 자산이다. 자연을 터전 삼아 문화 역량을 키웠던 사람들과 그 공간을 주목했던 것이다. ‘역사문화경관’이라 할 것이다. 일동 삼승(一洞三勝) 세 곳은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이다. 소쇄원은 197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1983년 사적 제304호로 승격된다. 2008년 재분류에 따라 사적은 해제되고 명승 제40호가 된다. 식영정(일원)은 1971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명승 제57호로 승격되었다. 환벽당(일원)은 1971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1986년 광주로 이관되어 광주 기념물 제1호가 되었다. 2013년 명승 제 107호로 승격되었다.
『서하당유고』와 『창랑유집』에 실려 있다. '계류(溪柳)'라 하였는데, 이 '탁열' '시회'에 참여한 광주목사 오운의 문집에는 '계사(溪榭)' 표기가 보인다.
1590년 당시 성산의 탁열 시회에서 지은 것이다. 앞 시의 제목 넷째 줄에 ‘作星山溪榭濯熱圖’가 보인다. ‘성산계사 탁열도’를 제작(작성)했다는 것. 계류(溪柳)가 아니라 '계사(溪榭)'이다. 시내가(溪)의 조그마한 정자(榭). 당시의 경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두 번째 시 '우용전운(又用前韻)'이 새로 확인되어 1590년 여름날 성산 탁열 현장 시회에서 지은 시로 현전하는 것이 세수가 되었다.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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