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나철, 땅은 빼앗겨도 하늘마저 잃을 수 없다! 게시기간 : 2020-09-08 07:00부터 2030-12-24 10:26까지 등록일 : 2020-09-04 10:0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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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과의 인연 그리고 제주공주(濟州共住) 벌교읍에서 보성 방면 두 마장, 칠동리 금곡마을이 나온다. 단군을 거듭 밝힌 나철의 생가가 있다. 1863년 12월 2일 태어났다. 초명은 나두영(羅斗永), 과거 급제 후에 나인영(羅寅永)으로 고쳤다. 자는 문경(文卿)이며 호는 경전(耕田), 대종교를 중광할 때 지혜와 홍익의 뜻을 담아 철(喆)로 개명하고, 호를 홍암(弘巖)이라 고쳤다. 본관은 나주, 정묘호란으로 형제 맹약을 맺은 후금에 춘신사(春信使)로 갔다가 온갖 곤욕을 치렀던 나덕헌(羅德憲, 1573∼1640)의 후예였다.1) 언제 나주에서 벌교 당시는 낙안으로 옮겼는데 분명하지 않다. 어린 시절 구례 왕씨가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구례는 왕석보(王錫輔, 1816∼1868)와 세 아들 사각(師覺, 1836∼1896)ㆍ사천(師天, 1842∼1906)ㆍ사찬(師瓚, 1846∼1912)을 중심으로 크게 문풍이 일어나며 시향(詩鄕)으로 이름이 높았다. 광양 태생으로 훗날 『매천야록』으로 유명한 황현(黃玹, 1855∼1910)도 구례로 이주하기 훨씬 전, 열 살 무렵부터 왕씨가에서 배웠으니 서로 만났을 수도 있다. 20살 즈음 한양으로 올라가 김윤식(金允植)을 스승 삼았다. 남산에서 화전놀이 시회(詩會)를 열었을 때 찾아갔다는데, 혹여 김윤식이 1880년 순천부사로 내려왔을 때 인연을 맺었을지 모르겠다. 민비의 배척으로 충청도 당진 면천으로 유배 가자 아예 그의 계동 저택에서 살았다. 김윤식(1835∼1922)은 일찍이 유신환(兪莘煥)ㆍ박규수(朴珪壽)에게 배우며 외국과의 통상 교섭의 필요성에 눈을 떴고, 영선사(領選使)를 이끌고 중국을 다녀와서 동양의 도(道)를 지키고 서양의 기(器)를 받아들이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신봉하였던 정치가요 문장가였다. 1891년 10월 식년문과에 급제하자 김윤식은 대견해하였다. “우리 집 나그네로 6, 7년 지내면서 대과에 들고 낙안으로 영친(榮親)하러 간다니 기특하고 즐거운 일이다.” 김윤식의 평생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 나온다. 한동안 승문원 가주서(假注書)ㆍ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으로 봉직하다가 1895년 6월 징세서장으로 되었지만 일본군과 낭인이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 직후 사임하였다. 당시 외부대신으로서 각국 공사관에 ‘폐후조서(廢后詔書)’를 발송하였다는 이유로 송파 방이동 농장에서 대죄하던 김윤식을 오가며 위문하였다. 1897년 3월 부친상을 당하고 벌교로 내려와 시묘하였다. 그런 중에 김윤식의 제주도 종신유배형 소식을 들었다. 곧장 인천으로 위문하러 갔다가 김윤식과 한 배를 탔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해 12월이었다. 김윤식과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나누었다. 부친상 1년 만에 치르는 소상(小祥)마저 걸렀다. 그러다가 탈상에 즈음하여 낙안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김윤식은 고맙고 놀라웠다. “집안일을 팽개치고 환난을 같이하니, 빛나는 빙심(氷心)을 세한(歲寒)에야 알겠구려.” 1901년 늦봄 지난 섣달 19일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런데 바로 나올 수 없었다. “나인영은 착한 부인의 내조로 집안이 빈한하고 자식이 과년(過年)하여도 편안하고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사를 포기하고 5, 6년 나와 같이 있으면서도 착한 내자를 믿었으니 정녕 서글프고 아득하다. 그런데 배편조차 어려우니 답답하고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속음청사』 4월 18일(양력)에 나온다. 당시 제주는 거대한 항쟁에 휩싸였다. 왕실재정기구 내장원(內藏院)에서 파견한 봉세관(捧稅官)이 천주교도를 동원하여 세금 거두면서 민전을 빼앗고 어세를 강탈하고 심지어 나무와 달걀까지 거둬가자 제주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천주교도는 신목(神木)ㆍ신당(神堂)을 쓸어내며 성당 부지를 사들여서 원성을 샀다. 결국 ‘관노 이재수’가 전면에 나서면서 수많은 인명이 죽어 나갔다. 천주교 측에서는 ‘제주교난(濟州敎難)’ ‘신축교난(辛丑敎難)’이라고 하고, 학계서는 ‘제주민중항쟁’으로 평가한다. 나인영은 한동안 제주성에 갇혔다가 5월 14일에야 신임 군수가 타고 왔던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다음은 김윤식의 이때 전별시다.2)
제3, 4구 함련(頷聯)의 ‘소자(巢子)’는 거친 삶에도 겸애를 실천하였던 묵자의 제자이며, ‘맹광(孟光)’은 눈썹 한 번 쳐들지 않고 부군을 받들었다는 후한의 현처 이름이다. 나인영의 평소 인내하는 삶과 부인의 현명함을 칭송하고 바로 성에 갇혀 바로 떠나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보탠 것이다. * 일본에 대한독립을 호소하다가 을사오적을 겨누다 부인상을 늦치른 나인영은 큰아들을 결혼시키고서 신안 지도(智島)를 찾았다. 김윤식이 유배지가 제주에서 지도로 바뀌었던 것이다. 1901년 12월이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서 김윤식의 계동 저택으로 들어갔다. 호남 출신 우국지사 오기호(吳基鎬)ㆍ윤주찬(尹柱瓚)ㆍ이기(李沂) 등과 어울렸다. 강진 출신 오기호(1863∼1916)는 농상공부 주사(主事), 해남 출신 윤주찬(1858∼?)은 탁지부 주사, 양지아문(量地衙門)에서 근무하고 사범학교 교관으로 있던 이기(1848∼1909)는 김제 출신이었다. 특히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의 변법개혁 경세학에 매료되었던 이기는 한동안 구례에 살면서 황현과 절친하게 지냈는데, 동학농민군과 협력하려다가 김개남에게 배척당하자 ‘동비토벌 의려(義旅)’를 세웠던 전력이 있었다. 1905년 8월 미국이 중재하여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종전협상을 시작하였을 때였다. 나인영은 오기호ㆍ윤주찬ㆍ이기와 같이 우리 대표를 미국으로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고문정치’를 받아들인 대한제국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역량은 물론 의욕도 없었다. 결국 나인영 등은 자신들이 직접 미국으로 가려고 하였다. 강진 출신으로 단성현감을 지낸 김형석(金衡錫)이 토지를 전당 잡혀서 여비까지 제공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방해하여 미국을 갈 수 없자 ‘사료조사’ ‘시찰’을 명목으로 일본으로 갔다. 이때 양한묵(梁漢黙, 1862∼1919)이 동행하였다. 해남 출신으로 능주 세무관을 지냈는데, 일본에서 손병희와 같이 활동한 이력이 있어 일본사정에 밝았다. 훗날 「3ㆍ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옥중 순국하였다. 나인영 등은 일본 조야의 요인을 상대하다가 일본천황에게 상서하였다. “폐하께서는 전승성공(戰勝成功)을 경계하고 동아황종(東亞黃種)임을 유념하여 우리 한국을 독립시켜 정족(鼎足)의 형세를 이룬다면 한국의 다행에 그치지 않고 귀국도 다행할 것이며, 또한 귀국의 다행에 그치지 않고 실로 천하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독립 보장을 통한 동양평화론이었다. 황궁 앞에서 3일 동안 단식으로 버텼지만 응답이 있을 수 없었다. 곧 한국통감에 부임할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같은 취지를 전달했는데, 강경하였다. “우리 한국은 불행하게도 귀국의 이웃이 되고, 각하를 만나 더욱 불행하게 되었다. 각하는 겉으로는 한국을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속으로 평생 우리를 자멸시켜 서서히 삼키려는 책략을 부렸다.” 이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반년, 여비가 바닥났다. 1906년 1월 부친상 당한 이기가 먼저 귀국하고, 나인영은 오기호와 함께 한참 뒤 9월에야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일본에 건너갔지만, 몇몇 대륙 낭인이 만나주었을 뿐 별 소득이 없이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06년 늦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체포되었던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온나라가 슬퍼하고 각처에서 의병을 일어날 때였다. 나인영 등은 호남의 우국지사를 중심으로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하고 ‘을사오적’ 처단에 나섰다. ‘2천만 동포의 피맺힌 분노는 오적을 도살하는 데에 있지, 병력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입장이었다. 담양 창평의 이광수(李光洙, 1873∼1953), 임실의 김인식(金寅植, 1879∼1926) 등이 가세하였다. 이광수는 서재필의 이모부 이최선의 손자였고, 김인식은 주사를 지냈다. ‘동맹서’는 나인영, ‘취지문’은 이광수와 윤주찬, ‘매국노를 죽이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참간장(斬奸狀)’은 이기가 작성하였다. 이때 금산의 강상원(康相元), 진산의 황문숙(黃文叔)ㆍ이경진(李京辰), 옥구의 지팔문(池八文), 태인의 김영채(金永采) 등이 호응하였는데, 농민 장사(壯士)이며 의병에 가담하였던 망명자들이었다. 이때 궁내부 특진관 이용태(李容泰, 1854∼1922), 학부 협판 민형식(閔衡植, 1875∼1947), 전 강진ㆍ순천군수 정인국(鄭寅國, 1858∼1910), 궁내부 호위국 최익진(崔翼軫, 1860∼1923), 전 승지 이석종(李奭鍾, 1860∼1921) 등이 자금을 협찬하여 무기를 사들이고, ‘참간장(斬奸狀)’ 수백 장 인쇄하여 전라 충청 경상도에 배포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한양ㆍ경기 출신의 문과 급제자로 특히 이용태는 장흥부사로 있다가 고부항쟁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파견되어 동학교도를 침탈하였던 장본인이었으며, 민형식은 민씨정권의 핵심이던 민영휘(閔泳徽)의 양자였다. 민씨세도가 무너지며 일본과 적대한 것이다. 자신회는 몇 차례 연기 끝에 1907년 3월 25일에 거사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나인영 등은 거사의 정당성을 밝히는 자현장(自現狀)을 제출하고 평리원(平理院)에서 재판을 받았다. 10년에서 5년까지 지도 혹은 진도 유배형을 받았는데, 나인영은 ‘지도 10년’이었다. 김윤식은 만나지 못하였다. 한 달 전 사면되어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후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가 특별히 주선하여 특별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 나라를 잃더라도 하늘마저 빼앗길 수 없다! 1908년 오뉴월 나인영은 세 번째 일본 땅을 밟았다. 재차 ‘만국공법’과 양국조약에 따라 독립 보장을 촉구하였지만, 대륙낭인 몇이 간혹 만나주었지만, 기실은 사찰이며 회유였다. 여비가 떨어지며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서 대학병원 신세까지 졌다. 당시 일진회는 국권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뇨병 치료 때문에 일본에 왔다는 등 갖은 비방을 날렸다. 혼란스러웠다. 오기호가 보내준 돈으로 그간 체불을 청산하고 1908년 섣달그믐께 귀국하였다. 나인영은 한동안 선도(仙道)에 빠져들며 번뜩하였다. “국조 단군은 민족의 뿌리이니 한민족이 단군의 자손임을 알려야한다.” “단군 사상으로 겨레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1909년 1월 15일(음), 자신회의 동지들과 재동 지금의 조계종 안국선원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단군을 거듭 빛나게 하였다. 단군교의 ‘중광(重光)’이었다. 왜 단군이며 제천(祭天)이었을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 혼돈(混沌)의 ‘태일기(太一氣)’가 알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극[極]으로 문득 절로 엉키고 흩어지고 올라가고 내려가며, 하늘이 열리고 땅이 솟고 만물이 생겨나고 사람이 태어났다. 그래서 땅[一]의 사람[|]은 하늘[一]을 따르고자 ‘공(工)’하였지만, 쉽지 않아 항상 몸짓하며 하늘에 빌었으니 바로 ‘무(巫)’였다. 무(巫)는 화살[矢]과 몽둥이[殳] 맞아 아픈 사람을 다스렸는데, 정갈한 술[酒]을 찾아냈다. 그래서 병 고치는 ‘의(毉)’는 ‘의(醫)’가 되었다. 이로부터 천운(天運)을 살펴 인시(人時)를 맞추고 지리(地利)를 얻어가며 강을 끼고 농사짓고 짐승 기르며 물건을 바꾸는 정주(定住)와 교역(交易)의 삶터를 일궜으니 ‘신시(神市)’였다. ‘신시’는 ‘입구[囗]’에 ‘창[戈]’을 세워두었을 뿐, 그래서 ‘역(或)’은 울타리 없는 땅 역(域)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울타리가 없으니 마음에 걱정이 없을 수 없었고―의심할 혹(惑)―실제 창이 부딪치며 싸움이 잦자 비로소 둘레[囗]를 쳤으니 ‘국(國)’을 세웠다. 이때 우리의 하늘에 알리고 제사를 지냈으니 ‘단군의 개천(開天)’이며 해동 별천지 조선의 출발이었다. 단군의 조선은 한참 세월 동안 중화세계 한자문명권과 교섭하다가 여러 부족은 산간과 들판으로 흩어졌고 단군의 개천 또한 달빛을 받으며 신화가 되었다. 그래도 하늘 제사는 잊지 않았으니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이었다. 삼한에서도 천군(天君)이 제천(祭天)을 주관하였다. 이들이 삼국으로 모이고, 신라와 발해를 거쳐 고려에서 합쳐지며 동이, 해동의 긍지를 버리지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단군을 다루지 않았다. 또한 그때까지 존재한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동명왕 사실’까지 황당하다며 생략하였다. 그러나 일연의 『삼국유사』는 달랐다.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하니 요와 같은 때였다.…조선의 유민(遺民)들이 나뉘어 70여 국으로 되었으니 모두 땅은 사방 100리였다.” 원의 침략과 간섭으로 휘청하던 시절, 일연의 파장은 컸다. 자주성과 고유성을 지켜내자는 의식 전환의 지침과 같았다. 14세기 국난 끝에 창업한 신왕조가 국호를 조선으로 삼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세종 치세 민족문화 황금기 또한 중국과는 다른 풍토 언어, 하늘에 대한 자각을 자양 삼았다. 국망의 세월, 단군교는 나라는 망해가지만 사람의 마땅한 길 도마저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국망도존(國亡道存)’을 제창하였다. 또한 ‘한 사람의 마음은 하늘 아래 천하 마음’이라는 ‘천인동심(天人同心)’을 표방하였다. 즉 땅을 잃더라도 하늘까지 빼앗길 수 없다! 우리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사람답게 살자! 우리의 하늘을 처음 열었던 단군을 섬기자! 단군교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묘동(廟洞)으로 나인영을 방문하였는데, 찾아와서 신봉하는 각급 학도가 매우 많았다.” 『속음청사』 1910년 6월 29일에 나온다. 김두봉도 이때 입교하였을 것이다.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고쳤다. 한얼[大倧]’을 밝히는 종교임을 천명한 것이다. 한얼은 삼신일체상제(上帝)이며 삼신(三神)은 우주를 조화하는 ‘한인’, 만물을 교화하는 ‘한웅’, 인간을 치화하는 ‘한검’이었다. 그리고 10월 3일(음력)을 ‘단군 신조가 하강하고 나라를 처음 세운 날 檀君神祖下降及建極日’로 선포하고, 이듬해에는 『신리대전(神理大全)』까지 저술하였다. * 내 목숨 바쳐 겨레와 영원하리라 나철은 한동안 강화도와 평양 등 단군의 성지를 순례하고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거쳐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본당을 세웠다. 어느덧 수십 곳에 학교가 들어서고 입교자는 십여 만에 이르렀다. 본국에서 교세를 확장하리라 생각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15년 봄이었다. 그동안 둘째 아들 정문(正文)의 숙식을 살펴주고 선린상고를 졸업시켜준 김윤식을 찾았다. 오랜만의 해후 광경이 『속음청사』 1915년 3월 12일 및 24일 일기에 나온다. “5년 동안 만나지 못하였다가 북간도에서 돌아오니 악수하며 위로하였다.” 또한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 들어가 고기와 술 담배를 끊고 밤과 새벽에 몸을 깨끗이 닦으며 정성껏 도를 실천하니 세상 티끌이 말끔히 사라지고 남의 병을 치료하여 신비한 효험을 많이 보았다. 원근에서 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십여 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윤식은 대종교를 청정신비(淸淨神秘)의 수양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우리 민족의 삼신시조(三神始祖)를 신봉하며 족성(族性)과 국성(國性)의 수호하였다’고 적었다. 그래서 박은식ㆍ신채호ㆍ이상설ㆍ신규식ㆍ서일(徐一)ㆍ이상룡(李相龍)ㆍ김좌진(金佐鎭) 등과 같은 망명지사가 입교하였다. 이들이 ‘실력을 기르고 무력을 키워 일본과 전쟁을 해서 국권을 회복하리라’는 일념으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며, 무장독립운동단체를 꾸려냈다. 또한 우리말 우리글을 사랑하고 역사와 풍속을 아끼는 학자가 기꺼이 합세하였다. 주시경ㆍ지석영ㆍ김두봉ㆍ김교헌(金敎獻) 등이었다. 대종교는 민족정신의 요람이며 독립운동의 활로였고 민족정신을 배양하는 신앙결사였던 것이다. 일제는 좌시하지 않았다.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발동하여 탄압에 나선 것이다. 1916년 8월 가배(嘉排)를 앞두고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그렇게 사흘 인기척이 없어 수행하던 상교(尙敎)들이 들어가 보니 이미 순교하였다. ‘목숨 바치는 세 가지 이유’ 「순명삼조(殉命三條)」 ‘세상 떠나는 노래’ 「이세가(離世歌)」 ‘거듭 빛 노래’ 「중광가(重光歌)」를 남겼다. 1916년 8월 15일(음), 향년 54세. 「순명삼조」의 성찰과 회개는 자기학대와 같았다. ‘금일의 모욕을 불러들였고’ ‘정성이 미천하여 은혜에 보답할 수 없었으며’ ‘천하 동포형제자매를 고통과 암흑에 떨어뜨린 죄를 저질렀으니’ 한 가닥 목숨을 한배님, 천조에게 바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긋난 세월, 배반의 세상을 보듬은 마음은 따뜻하였다. 「이세가」 셋째 절이 다음과 같다. “만덕문(萬德門) 들어가서 인간선악 여쭐 때, 간사하고 불의한 자 징치하여 다 회개케, 원통하고 미약한 자 보전하여 다 강성케, 저 살벌풍진(殺伐風塵) 다 쓸고 일동 도덕세계 새로 열게. 사랑 토다, 미덥도다! 우리 형제자매들아. 형제자매 모든 죄악 오늘 이 몸이 다 대신 가져가니, 한 마음 통성(通性)하여 늘 천궁에서 즐깁시다.” 「중광가(重光歌)」 쉰넷째 구절에도 풀었다. “상제께 호소하여 천국을 새로 열어, 한 나라 한 신교(神敎)로 큰 지구를 통할케, 대소강약 너 나를 한집에 일절애합(一切愛合), 한 세계 한 도(道) 빛에 천민동락(天民同樂) 만만대(萬萬代).” 나철이 꿈꾸던 세상의 미래는 사해동포가 어울린 만민평화였다. 나철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룡현 청파호에 안장되었고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이후 제2대 도사교 김교헌(金敎獻, 1868∼1923),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徐一, 1881∼1921)도 들었다.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에 승리한 독립군을 이끌고 시베리아로 들어갔다가 무장해제를 당하고 많은 동지를 잃자 서일이 자진하며 남긴 유언이 다음과 같았다.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이들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니 오는 것인가? 나철을 처음 찾았을 때 생가 마을 입구에 ‘홍암나철선생유적비(弘巖羅喆先生遺蹟碑)’ 표석이 있고, 태극기와 대종교기가 휘날리는 제실을 두었는데 격식이라곤 조금도 갖추지 않았다. 개천절에 나철 그리고 대종교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싶었다. 그런데 지금 나철 생가 마을을 무슨 궁궐 같은 성전으로 꾸며 놓아서 찾은 사람이나 지나는 사람마다 의아해하니 오히려 민망하게 되었다.
1) 김윤식, 『雲養集』 제5권, 「기주관 나문경에게 주다 贈羅文卿記注」 세주 “文卿春信使羅公德憲之後”
2) 『雲養集』 권5, 「기주관 나문경이 낙안으로 돌아가자 전송하다 送羅文卿記注歸樂安」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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