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면앙정 선생의 가마를 메다,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 게시기간 : 2020-09-10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9-09 13:3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
|||||||||||||||||
<면앙정과 향안> 사회사를 전공한 필자가 처음 면앙정 송순을 알게 된 것은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나오는 면앙정의 향안 입록 기사였다. 요즈음 외방에는 향안(鄕案)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내외가 사족(士族) 출신인 자를 가려서 기록한다. 외족(外族)이나 아내가 다른 고을에서 왔고 현족(顯族)이 아닌 경우에는 비록 고관이라도 또한 이에 기록될 수 없다. 그래서 이에 실리는 것이 홍문록(弘文錄)이나 이조천(吏曹薦)에 드는 것보다도 어렵다고들 한다. 송순은 담양 사람이다. 외가가 남원에서 왔고 현달한 벼슬을 한 이도 없었기 때문에 공도 향안에 들 수 없었다.
가문이 한미한 면앙정이 담양 유향소(留鄕所)의 향원의 명부인 향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이미 높은 관직을 하고 있음에도 고을 원로들에게 한 상 잘 차려 대접하고 원로들의 양해를 받아 향안에 입록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자료만 보면 정말 송순의 집안이 한미한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송순은 그렇게 한미한 집안이 아니다. [일본행록(日本行錄)]을 남겨서 유명한 노송당(老松堂) 송희경(宋希璟)은 송순의 고조이다. 중간에 현저한 관직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양반으로서의 체통은 지킬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허균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당시의 사회 제도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저러한 모순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림1] 면앙정 자필 분재기(담양 가사문학관 소장) 국가에서는 지방 지배를 위해서 각 지역에 유향소를 설립하였다. 유향소는 재지사족 즉 지역사회의 사족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운영되었다. 유향소의 구성원을 향원(鄕員)이라고 하는데 이들 향원 중에서 유향소의 지도부 즉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이 선출된다. 유향소는 향소(鄕所) 또는 향청(鄕廳)이라고도 하는데, 재지사족이 지방 수령을 보좌하여 향촌사회를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기구이다. 향청의 운영을 위하여 참여하기 위해서는 일단 유향소의 구성원인 향원이 되어야 한다. 향원이 되는 것은 벼슬의 고하, 재산의 고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지역에의 토착성이 중요한 관건이었다. 3향(鄕), 2향, 1향, 무향(無鄕)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부향(父鄕), 모향(母鄕), 처향(妻鄕)이 바로 3향이다. 부, 외숙, 처부 모두 향안에 입록되어 있으면 3향이 되고 셋 중에 둘만 입록되어 있으면 2향, 하나만 입록되어 있으면 1향, 아무도 들어있지 않으면 무향이 된다. 향원은 이들 구성원의 토착성에 따라서 3향의 경우는 직서(直書)라고 하여 바로 입록이 되고, 2향이나 1향, 무향의 경우에는 향원들의 권점(圈點) 즉 투표를 통하여 입록 여부를 결정한다. 이러한 향회의 운영 내용을 규정한 것이 향규(鄕規)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송순의 경우, 어머니는 순창 조씨, 처도 순창 설씨이므로 외삼촌이나 처부가 담양 향안에 올라있지 않다. 그래서 송순은 1향에 불과하므로 권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관직이 높았으므로 권점을 면제하고 직서할 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허균이 말한 송순의 집안이 한미하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면앙정은 경제적으로나 관직 진출에 있어서 전혀 한미한 가문이 아니었다. 1572년 80세의 송순이 친필로 써서 8남매에게 남긴 분재기에는 노비가 모두 160구, 전답이 700여 마지기에 달하는 대단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1572년 송순 자필 분재기) <면앙정의 회방연> 면앙정에 올라가보면 조그마한 누정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백호(白湖) 임제(林悌),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기암(畸菴) 정홍명(鄭弘溟), 동악(東嶽) 이안눌(李安訥) 등 명현들의 주옥같은 시문들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문집에는 이들 제영(題詠)을 [면앙정 제영(俛仰亭題詠)], [면앙정 잡록(俛仰亭雜錄)]이라고 하여 50편에 가까운 시문을 망라하여 수록하였다. 기대승의 [면앙정기]에 의하면, 면앙정 터는 갑신년(1524)에 얻었고, 정자를 짓기 시작한 것은 계사년(1533)이었으며 그후 임자년(1552)에 이르러 중건하였다고 하였다. 송순이 77세에 우참찬을 끝으로 공직을 마치고 낙향해 91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유유자적했던 정자다. 송순이 정자를 지을 계획을 한 것은 1533년, 41세 되던 해이다. 김안로(金安老) 일파가 세력을 잡자 공직에서 물러나 이곳 고향에서 3년 동안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며 지내다가 그들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그림2] 면앙정 현판 송순은 천지우주의 한가운데에서 호연한 흥취를 가지고 바람과 달과 산천과 함께 백년 가까이 그곳에서 살았다.
면앙정은 송순이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을 때에 만들었다가 70대 은퇴 후에 말년을 보냈던 곳. 주변에는 식영정(息影亭),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등 더불어 전원 문화를 즐길 친구들의 누정이 즐비하다. 송순은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27세에 대과인 기묘 별시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별시의 시험관은 조광조(趙光祖), 남곤(南袞), 김구(金絿), 김식(金湜) 등 당대의 명류들이었다. 시험관들은 송순의 시권을 김일손 이후 최고라고 칭양을 하고 우두머리에 놓으려고 하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3등에 들었다. 이후 남곤, 심정 등 권세가들의 농간으로 기묘 명현들이 쫓겨나고 권세가와 소인배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아슬아슬한 벼슬살이였다. 정치적 갈등의 한가운데에서 부침을 거듭했던 후배 송강 정철은 이러한 면앙정이 소인배 권력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크게 넘어지지 않고 행복한 일생을 마쳤다고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짧은 제문을 올렸다. 아! 풍진세상 험한 길을 다하기 어려우니 다한 사람은 대단합니다. 넘어지지 않은 사람도 드뭅니다. 벼슬살이 60년에 큰 길을 따라 가면서 끝내 넘어지지 않은 이를 상공에게서 봅니다. 그러니 오늘의 이 아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겠지요. 아, 슬프다.
嗚呼 風埃險塗之難盡 盡之者尙矣 其不躓者亦鮮矣 立朝六十年 遵大路而終不大躓者 於相公見之 然則今日之慟 非爲私也 嗚呼哀哉 1579년(선조12) 송순 나이 87세 되던 해는 면앙정이 대과에 합격한 지 60주갑이 되는 해였다. 나라에서는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되도록 장수한 사람들에게는 신은(新恩) 급제자처럼 회방(回榜宴)이라는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27세에 대과에 합격한 송순도 당연히 면앙정에서 회방연을 하게 되었다. 국왕이 호조에 명하여 꽃과 선온(宣醞)을 내려주고 당시의 관찰사나 부사도 참석하는 큰 잔치였다. 선생의 후배 제자들인 송강 정철(1536~1593), 제봉 고경명(1533~1592), 백호 임제(1549~1587)와 관찰사, 부사 등 모두 100여 명이 참석한 대단한 잔치였다. 밤이 깊어 선생이 조금 취하여 따뜻한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정철이 주창하였다. “선생님의 남여를 우리가 드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남여를 메자.”고 하여 함께 붙잡고 내려왔다.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고관들이 가마를 멘 것은 전에 없던 일이라며 훌륭하게 생각하였다. 이른바 ‘면앙정 선생님의 가마를 메다[荷輿俛仰亭]’가 된 것이다. [하여면앙정]에 관한 첫 기사는 면앙정의 외손자 최기(崔棄)가 정리한 [행록]에 처음 나와서 이후 [담양읍지] 등 여러 기록에서 답습하여 따라 썼다. 그런데 가마를 멘 후배 제자들이 [행록]에서는 송강, 고봉, 제봉, 백호로 나오고 어떤 자료에는 송강, 제봉, 백호, 청련으로 나오기도 한다. 정조가 언급한 곳에서는 송강이 빠지고 제봉, 고봉, 백호가 나온다. 그런데 회방연이 있던 1579년과 이들의 생몰연대를 비교해보면 송강, 제봉, 백호는 맞지만 고봉은 맞지 않는다. 기묘년 회방연을 할 때 고봉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또 관찰사 규암 송인수가 어사화를 만들고 기악(妓樂)과 창우(倡優)를 불러 유희를 바쳤다고 하는 것도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착오에도 불구하고 기묘년 회방연은 있었고, 로맨티스트 송강에 의하여 “우리 선생님 가마를 우리가 메자”는 제안도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다. 백발의 면앙정은 머리에 어사화를 얹고 “오늘 다시 소년 때의 일을 하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림3] [평생도] 중 [회방연도(回榜宴圖)] [그림3-1] [회방연도] 부분(어사화를 쓴 주인공은 백발에 고령이다. 뒤에 2품 이상의 고관이 타는 수레인 초헌을 타고 뒤따르는 사람은 주인공의 자제일 것이다.) <정조가 낸 도과의 시제> 도과(道科)란 각 도 단위로 그 지역 출신만을 대상으로 보는 과거 시험이었다. 1792년(정조16) 도산서원 앞 시사단(試士壇)에서 설행된 [도산별과(陶山別科)]라든가, 1793년(정조17) 강원도에서 실시하고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으로 정리된 강원도 도과가 대표적인 것이다. [도산별과]에는 7천 여 명의 경상도 유생이 참여하고 3천 여 장의 시권이 제출되어 영남 유학의 성세를 자랑하였다. 정조는 즉위 22년째 되는 해인 1798년, 호남 유학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광주에서 도과를 설행하라고 지시하였다. 전라 감사는 이득신(李得臣)이고 광주 목사는 서형수(徐瀅修)였다. 정조는 [어정 대학연의 연의보(御定大學衍義衍義補)]와 [주자대전절약(朱子大全節約)] 등의 책을 호남에 내려 보내 유생들을 시켜 고정(校正)하고 정서(淨書)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詩), 부(賦), 전(箋), 시의(詩義), 책(策) 등 5과목으로 도과가 치러졌다. 정조가 직접 출제한 시제(試題)에서 시의 제목은 ‘하여면앙정’이었다. 그리고 작시(作詩)를 위한 참고 자료로 [담양부지]의 관련 기사를 제시하였다. [그림4] 면앙정에 걸린 도과 현판 유생들이 모두 광주에 와서 응시한 다음, 그 시권(詩券)을 수합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정조가 직접 그 시권들을 검토하고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어정서(御定書) 두 본을 교정하고 정서한 데 대한 노고는 기록할 만하다. 고정(考訂)한 곳에 쪽지를 붙여 의견을 기록한 것에서는 또한 각각 지니고 있는 식견을 볼 수 있었다. 또 도백(道伯)이 추가로 선발한 사람들은 또 모두 고가(故家)의 후손들로서 특히 시·부·전·의·책 다섯 가지를 가지고 날짜를 나누어서 제술을 시험하였는데, 올려보낸 여러 시권들을 보니 걸구(傑句)와 가작(佳作)이 많았다. 지금 이 재능을 살피고 장점을 비교하는 과거 시험은 곧 호남의 재능있는 선비들의 이름을 날릴 기회를 만들려는 것이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