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유일무이(有一無二)한 연담대사(蓮潭大師) 게시기간 : 2020-07-14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0-07-13 09:4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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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일무이한 스님 해남 두륜산 대흥사 13 대종사(大宗師)의 한 분이요, 18세기 후반 호남의 대강백(大講伯)이요, 화엄종주(華嚴宗主)인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이 출가한지 5년째 되던 해, 속가 나이 23세가 되던 1742년(영조 18)에 지은 「귀고향(歸故鄕)」이란 시가 있다. 6년 동안 구름 산에서 학과 함께 날았는데
가을 바람에 문득 고향에 돌아가고 싶네. 성명은 옛처럼 호적에 올라 있으나 나의 몸에는 지금 납의(衲衣)가 걸쳐 있네. 세상에는 집도 있고 먹을 것도 있으나 이 한 몸은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네. 고향 사람들 나에게 환속하라 말하면서 다투어 눈 앞의 푸른 산을 저어하네. 이 시에서 연담 스님은 출가와 환속 사이에서 갈등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출가자에게 한번쯤은 있을 법한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출가 초반 젊은 나이에 시련을 겪으면서도 영호남의 사찰을 넘나들며 여러 강백 스님들에게 승려 교육과정인 사미과·사집과·사교과·대교과를 수료하면서 불경을 두루 익혔다. 연담(蓮潭有一, 1720〜1799)은 법명은 유일(有一)이요 자는 무이(無二)며, 법호는 연담(蓮潭)이다. 화순에서 출생했고 속성은 천(千)씨이다. 5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배운 글자는 모두 기억했다고 한다. 7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잠시 학업을 중단했다가 9세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스님은 10세에 『통감(通鑑)』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다음해 섣달 그믐날에 『통감』 15권을 모두 다 외우니 스승이 참으로 드문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12세가 되자 『맹자』를 배웠다. 13세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여의게 되자, 숙부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1. 해남 대흥사 대화엄사(大華嚴師) 18세에 그의 영민함을 인정한 법천사(法泉寺) 노승 성철(性哲) 스님의 거둠을 받아 절로 출가하게 되었다. 19세에 안빈(安貧) 노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나주 금성산 보흥사(普興寺)에서 사집(四集)을 배운 뒤 대둔사(大芚寺) 벽하(碧霞)로부터 『능엄경』을, 용암(龍巖) 밑에서 『기신론(起信論)』과 『금강경』을, 취서사(鷲棲寺) 영곡(靈谷)으로부터 『원각경(圓覺經)』을 배웠다. 22세 때 해인사의 호암체정(虎巖體淨) 밑에서 3년 동안 공부하여 선리(禪理)를 터득하였고, 설파상언(雪坡尙彦)에게서 『화엄경』을 배우면서 28세까지 시봉(侍奉)하였다. 29세 때 강원도 장구산(長丘山)에 53불(佛)을 조성하였고, 체정을 증명사(證明師)로 모셨다. 31세 때 보림사(寶林寺)에서 『반야경』과 『원각경』을, 다음 해에 『현담(玄談)』을 강의하기 시작하여 60세까지 30여 년 동안 계속하였다. 크고 작은 절을 가리지 않고 인연에 따라 선과 교를 강설하였다고 한다. 특히 호남지방의 학인들이 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다. 59세에는 여러 사람의 뜻에 의하여 밀양 표충사의 원장에 추대되었다. 정조 23년(1799) 80세에 장흥 보림사 삼성암에서 입적했다. 2. 연담대사의 강맥은 화엄학의 전수가 기준이 되어 대흥사와 백양사로 이어진다. 연담대사는 해남 대흥사의 13 대종사(大宗師)의 으뜸으로서 대련(大蓮)으로 불린다. 소련(小蓮)으로 불린 초의의순(草衣意恂)에게 강맥이 계승되어 범해각안(梵海覺岸) 등 대흥사 승려들에게 사자상승(師資相承) 되어졌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로 이어진 백양사 강학의 계보는 연담유일의 법맥을 전수했다. 연담대사의 진영은 대흥사와 백양사에 모두 모셔졌고, 20세기 초에도 연담에 대한 추숭과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난곡거사(蘭谷居士) 이건방(李建芳)이 지은 백양사의 「화엄종주(華嚴宗主) 연담당(蓮潭堂) 대사(大師) 비명(碑銘) 병서(幷序)」가 건립되었다. 연담의 법맥과 백양사 강맥을 연결시킨 스님은 연담의 제자 양악계선(羊嶽啓旋)으로 그에 의해 백양사 강학의 기초가 닦아졌다.
2. 백양사 화엄종주(華嚴宗主) 연담당(蓮潭堂) 대사(大師) 비명(碑銘) 병서(幷序) 3. 강경(講經)과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을 수행의 요체로 삼고 연담대사의 자서전에는 대사의 일생을 요약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내가 입실한 뒤로부터 매일 새벽과 저녁 두 차례를 경을 외우고 주문을 외우며
부처님께 예배하고 나서야 경(經)을 강(講)하였다. 그래서 항상 가사를 입고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나서 향촉을 밝히지 아니한 채 칠불(七佛)과 팔보살(八菩薩) 전에 예배를 올린 뒤에 대중들과 함께 향촉을 켜고 예배하기를 항례(恒例)로 하였다. 이는 참으로 고행이지만 감초와 같이 달게 여기었기에 30년 동안 경을 강설하면 서도 한 번도 큰 장애나 어려움을 겪지 아니하였고 병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다. 이와 같이 스님의 일생이 수행과 대중 교화로 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중 스님들괴 함께 예불하고, 강경(講經)을 30년간 한결같이 하였던 대강백이었다. 연담대사는 참선인(參禪人)들의 공부는 순일무잡(純一無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선자(禪者)들은 마땅히 지혜의 칼을 높이 들고 만 가지 인연을 모두 끊어버려
백화가 난만한 숲 속을 지나가더라도 일엽(一葉)도 몸에 닿지 않아야 비로소 소분(小分)의 소식이 있을 것이다.” 고 하였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강경(講經)의 바탕 아래 외식제연(外息諸緣) 하라고 설파하였던 것이다. 그가 교선일치와 돈오점수를 주장했던 점은 더욱 주목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 염불(念佛)에 관해서는 참선과 염불의 일치를 주장했다. 참선하는 사람이 화두를 굳게 들어 일호(一毫)의 잡념도 없으면 마음이 장벽과
같아져 어느 순간 홀연히 깨닫는 것과 같이, 염불도 입과 음이 오직 아미타불 뿐이요 한 털 끝의 잡념까지 없어지면 또한 마음이 장벽과 같이 무념하게 되어 홀연히 자성정토(自性淨土)가 현전(現前)한다. 고 하였다. 아미타불 염불을 일념으로 하여 마음이 무념하게 되면 자성정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연담대사는 자성정토설(自性淨土說)로 참선과 염불의 일치를 주장했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의 문하에는 많은 도인스님들이 배출되었다. 이 중에서도 사명(四溟), 소요(逍遙), 정관(靜觀), 편양(鞭羊)의 4대 문중을 이른바 ‘서산문하의 4대 문파’라고 한다. 청허선사의 제자 중에 공훈이나 업적으로는 사명이 으뜸이지만, 수행의 깊이나 문도의 수가 많기는 편양이 가장 뛰어났다. 편양은 서산의 법을 풍담(楓潭)에게 전수하였으며, 풍담은 다시 월담(月潭)에게로, 월담은 환성(喚惺)에게, 환성은 호암(虎岩)에게, 호암은 연담(蓮潭)에게 전하였다. 이중 편양의 문손들 중에 선과 교에 모두 뛰어난 제자가 연담대사이다. 강경과 참선과 염불을 불교 수행의 요체로 삼은 것은 청허선사의 가풍을 잘 준수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통불교적인 큰 특색을 발휘한 것이라 하겠다. 연담대사는 실로 호남의 고승으로서 명성이 더 높아서 대흥사와 백양사 양(兩) 본사(本寺)에 유물이 전하고 있으며, 그의 법맥은 대흥사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 등으로 이어진다. 스님이 남긴 저술로는 『연담집(蓮潭集)』 4권이 있는데, 이는 『임하록(林下錄)』이라는 제명으로 출간되어 오늘날 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또 『화엄경사기(華嚴經私記)』가 있는데, 이는 당대의 학인들은 물론이요 강사들에게도 큰 지침서가 된 책이다. 저서에는 『서장사기(書狀私記)』1권, 『도서사기(都序私記)』1권, 『선요사기(禪要私記)』1권, 『절요사기(節要私記)』1권, 『기신사족(起信蛇足)』1권, 『금강하목(金剛蝦目)』1권, 『원각경사기 (圓覺經私記)』2권, 『현담사기(玄談私記』2권, 『대교유망기(大敎遺忘記』5권, 『제경회요(諸經會要)』1권, 『염송착병(拈頌着柄)』2권, 『임하록(林下錄)』 등이 있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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