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18세기 서울의 샐러리맨, 녹패(祿牌) 게시기간 : 2020-07-16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7-1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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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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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중록(忠信重祿)’ 양반관료제 사회인 조선 왕조는 국왕만이 아니라 양반사족들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왕조를 지탱하는 관료들은 물론 양반사족들로 충원되지만, 양반사족이 아닌 서얼이나 중인, 이서(吏胥)들이 관료기구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관료들은 왕조 국가에 복무하는 대신 국왕, 국가로부터 경제적인 반대 급부를 지급받았다. 봉건적 성격을 유지하였던 조선 초기에는 양반 관료 기구에 들어와 있는 인원들에 대해서 봉토(封土) 성격의 토지를 지급하기도 하고 또 정기적으로 녹봉을 지급하였다. 고려말 신흥사대부에 의하여 사전 개혁을 하고 관료들에게는 수조권(收租權)을 지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였다. 과전법은 국왕에게 복무하는 신료들에게 복종의 대가로 지급하는 것이었다. 과전법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자 직전법(職田法)으로 옮겨갔다가, 1556년(명종11)에는 이제 더 이상 관료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토지수조권 이외에도 관료들에게는 녹봉이 지급되었는데, 각 품계에 따라서 제1과 록에서부터 제18과 록까지 등차(等差)를 두어 쌀, 콩, 면포 등 현물로 1년에 네 번 4맹삭(孟朔, 계절별 첫 달 즉 1, 4, 7, 10월 초하루)으로 나누어 반급하였다. 이러한 재원은 하삼도(전라, 경상, 충청도)에서 조달되어 서울의 광흥창(廣興倉)으로 운반되었다. 녹봉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 재정이 그만큼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4맹삭에 지급되는 녹봉제(祿俸制)를 그만두고 매 달 일정한 급료를 지급하자는 산료제(散料制)가 제안되었다. 또 17세기 후반 이후의 연이은 흉년과 대기근으로18세기 초부터는 매 달 지급하는 산료제로 바뀌게 되었다. 녹봉제라는 이름은 유지되었지만 실제로는 산료(散料) 혹은 삭료(朔料)라고 하여 매달 초하루에 현물로 지급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산료제로 바뀌는 논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담당 관료들이 산료제를 주장해도 국왕은 ‘충신중록(忠信重祿)’(‘충실하고 믿을 만한 신하는 후한 녹봉을 주어 하급 관리를 권장한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는 의미의 『중용(中庸)』 구절)이라고 하여 끝까지 4맹삭 녹봉제를 주장한 것이다. 산료제는 매달 지급하기는 하지만, 녹봉제에 비교하면 훨씬 지급 총액은 줄어들어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을 때 취할 수 있는 제도이다. 산료제를 실시함으로써 국가의 곡물 재고에 적절히 대응할 수가 있게 되었다.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최저의 녹봉을 받는 종9품의 1년 수령액은 쌀 8석, 콩 4석이고, 최대의 녹봉을 받는 정1품의 1년 녹봉액은 쌀 30석 6두, 콩 16석이다. 최대와 최저 수령액의 차이는 4분의 1 정도 된다. 녹패(祿牌) 여기에 제시하는 녹패는 녹봉제가 실시되던 시기의 녹패와 산료제가 실시되던 시기의 녹패 각 한 점씩이다. 녹봉제가 실시되던 시기의 녹패는 1652년 예조참의 윤선도(尹善道)가 받은 녹패이고, 산료제가 실시되던 시기의 녹패는 1864년(고종1) 사도시 첨정 박제신(朴齊臣)에게 준 녹패이다. 관원에 제수되면 이조와 병조에서 고신(告身, 교지 또는 교첩)을 받고 이와 함께 녹패를 발급받았다.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발급하였다. 녹패는 정해진 양식은 없으나 정3품 당상관과 당하관을 기준으로 녹패와 반록(頒祿) 첨지(籤紙)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녹패를 발급받은 문무관원은 녹봉을 수령할 때 증빙 문서로써 녹패를 제시하게 되는데, 조선시대 녹봉을 지급한 곳은 광흥창이며 녹봉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녹패 외에도 임명 문서인 교지나 교첩이 필요하였다. 광흥창에서는 녹봉을 지급하였다는 증서로 반록 일자와 품목을 기재하고 감찰(監察)과 광흥창 관원의 확인을 거쳐 반록 첨지를 발급하였는데,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도장을 만들어 찍는 방식으로 간소화된다. 먼저 예조 참의 윤선도에게 준 녹패를 보자. [그림1] 1652년에 윤선도가 받은 녹패
吏曺奉
敎賜通政大夫禮曺叅議尹善道 今壬辰第 科祿者 順治九年 月 日 正郞 臣 李 [수결] 判書 叅判 叅議 臣 金 [수결] 佐郞 1652년 윤선도는 종3품 예조 참의로 『경국대전』에 의하면 제6과 녹봉을 지급받았다. 녹패에 녹과가 표시되지 않는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다. 1652년은 일 년에 네 차례 1·4·7·10월에 반록하는 사맹삭 반록제가 시행되던 시기로 당시 법전에 규정된 제6과 농봉은 봄[春等]에 중미(中米) 3석, 조미(造米) 7석, 전미(田米) 1석, 두(豆) 7석, 주(紬) 1필(疋), 정포(正布) 4필, 저화(楮貨) 6장(丈)을 지급받고, 여름[夏等]에 중미 2석, 조미 7석, 맥(麥) 3석, 주 1필, 정포 3필, 가을[秋等]에 중미 3석, 조미 6석, 전미 1석, 맥 4석, 주 1필, 정포 3필, 겨울[冬等]에 중미 2석, 조미 7석, 두 7석, 정포 3필을 지급받았다. 이 녹패에는 반록 첨지가 붙어있지 않는데, 아마도 전해지는 과정에서 망실된 것으로 보인다. 반록 첨지가 없어서 윤선도가 위에 정해진 녹봉 지급액대로 녹봉을 지급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왕조의 국가 재정은 매우 궁핍하였기 때문에 윤선도의 녹봉도 역시 삭감되어 지급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2] 1864년에 박제신이 받은 녹패
吏曹奉
敎賜通訓大夫行司導寺僉正朴齊臣 由無 李(수결) 今甲子年第 科祿者 越無 李(수결) 同治三年 正月 正郎 判書 參判 臣 李(수결) 參議 佐郞 위의 녹패는 산료제가 실시되던 시기인 1864년에 사도시 첨정 박제신이 받은 녹패이다. 문서 가득 매월 녹봉을 받으면서 찍은 도장이 있다. 사도시는 조선시대에 쌀, 간장 등을 따위를 궁중에 조달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아로서, 첨정은 종4품직이다. 녹과가 몇 등급인지 표기하는 부분에 '第 科祿'라고 비워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속대전』에 4품의 녹과는 제7과로서 매달 미(米) 1석 2두와 황두(黃豆) 13두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녹도목(祿都目)이라고 하여 관료의 봉급을 그때의 재정 상황에 맞게 책정하여 지급하고 있었다. 따라서 녹도목이 시행되기 전에 발급되는 녹패에 녹과를 명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서 하단에는 ‘由無’ ‘越無’라고는 글자를 날인하고 담당자가 싸인한 것을 볼 수 있다. ‘유무’란 해유(解由)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전임 관직을 역임한 것에 대한 해유가 마무리되지 않으면 녹봉을 받을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월무’는 월봉(越俸) 즉 녹봉을 깎는 벌을 받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녹패를 지급받은 관원이 호조에서 확인받은 것이다. 다음으로 문서의 여백에 ‘甲子正月’과 같이 1월부터 12월이라고 표기된 흑인(黑印)이 찍혀 있다. 이는 이 녹패를 가지고 광흥창에서 녹봉을 받아가면서 받은 확인 도장이다. 18세기 서울의 샐러리 맨 양반사족들이 녹봉만 가지고 생활을 꾸려갔던 것은 아니다. 양반관료들 중에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토나 노비가 없어서 생활이 곤란했던 양반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양반사족들은 녹봉보다는 대대로 내려오는 세업(世業)에 의존하는 것이 컸다. 실제로 조선시대 관료제에 있어서 크게 녹봉에 의존하던 계층은 양반사족이 아니라 서울에서 하급 관료로 생활을 하던 서얼이나 중인, 이서들이었다. 산료제가 실시된 18세기 이후 서울의 하급 관료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서울의 샐러리맨이라고 할 것이다. 샐러리(Salery)라는 말은 원래 고대 로마시대의 군사들에게 월봉으로 지급하던 소금(Sal)에서 유래하였다. 홍길동같은 서얼들은 일단 부모로부터 재산을 상속 받는데 있어서 차별을 받았다. 법적인 규정상으로도 서자녀들은 적자녀의 1/7, 얼자녀들은 적자녀의 1/10 밖에 받지 못하여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많은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였으므로 관료제 국가기구의 하부에 편입되어 녹봉을 받는 것이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상당한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조의 서얼 우대책에 의하여 만들어진 규장각 검서관 제도이다. 이덕무나 박제가, 유득공은 서얼이어서 과거 시험에 있어서도 제한이 있었고 설령 소과나 대과에 합격한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차별 장치에 의하여 국가의 추요(樞要)한 관직에는 임명될 수가 없었다. 기껏 임명된다고 해도 기능적인 수월성(秀越性)이 요구되는 직종인 의원, 역관, 천문지리관 등 중인 기술직이나 이서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바로 18세기 이후 서울의 샐러리맨들이고 이들 샐러리맨들이 나름의 치열한 경쟁 끝에 관료기구의 하부 말단에 들어가서 국가의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한미한 출신이지만 훌륭한 문학적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등용되지 못한 홍세태(洪世泰, 1653~1725)는 한학관(漢學官), 이문학관(吏文學官),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종6품) 등 하급 관료로 복무하였다.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청 사신이 와서 문사(文士)를 청하였을 때에 응대로 나아가서 문재(文才)를 뽑낼 수 있었다. 서부 주부(西部主簿, 종6품)를 하면서 『동문선(東文選)』 찬수관을 하기도 하고 중인들의 시집인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편찬하였다. 1714년(숙종40)에 그는 관직에서 파직된 후 절친인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특히 뒷 부분에서 그는 녹봉을 받는 관료가 관직에서 파직되었을 때 가족들의 생활을 걱정하는 안타까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담헌 이하곤이 준 시에 차운함(謹次澹軒見贈韻) 가난한 아녀자 베틀에서 짠 오색실 寒女機頭五色絲 구름같은 비단을 그 누가 마름질하나 織成雲錦孰裁之 세상 인정 남 잘됨을 원하지 않아 世情不欲成人美 자연스레 나의 시 폐하게 되네 天意還應廢我詩 옳은 말 들은 아침 오히려 즐거우니 聞道一朝猶可樂 파직된 석 달이 어찌 슬프겠는가 罷官三月亦何悲 다만 눈앞의 처자식 곤궁한 게 불쌍하여 只憐眼底妻孥困 젊어서 농사일 못 배운 게 한스럽다네 恨未當年學稼爲 [그림3] 홍세태의 시고 중인이나 서얼 출신으로서 문명을 떨친 경우는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생활이 곤궁하여 하급 관직이나마 복무하여 녹봉을 받아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창녕성씨 명문 출신인 성몽량(成夢良, 1673~1735)은 할아버지 성후룡(成後龍)이 서자였고 할머니도 선원 김상용(金尙容)의 서녀였다. 성후룡은 성완(成琓)과 성경(成璟) 두 아들을 두었는데 성완은 숙종대 임술(壬戌)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가서 문명을 크게 드날렸다. 성경의 맏아들 성몽량도 기해(己亥) 통신사의 서기로 일본에 가서 일본의 명사들과 교유를 하고 시명(詩名)을 드날렸다. 성몽량에게서 공부한 조카 성효기(成孝基)의 아들 성대중(成大中)이 또 역시 일본 계미통신사의 서기로 일본에 가서 기무라 겐카도(木村蒹葭堂) 등 일본의 지식인들과 교유를 하고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를 가져와서 그동안 야만으로만 보았던 일본의 수준이 그렇게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고 하는 인식을 서울 중심부 백탑파 인사들에게 전해주었다. 이렇게 삼대에 걸쳐서 문명(文名)을 드날린 가문이었지만 이들의 생활은 신산(辛酸)한 나날이었다. 인연이 있는 친인척들의 추천으로 하급 관직에 나아가지만 일시적인 것이고 충분하지 못하였다. 성몽량은 소과에 합격하고 통신사 서기로 일본에 다녀온 후, 김창집(金昌集)의 추천으로 천문학 교수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김창집 자신의 자제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성대중은 서얼 출신으로서는 크게 성공을 하여 부사(府使) 직에까지 올랐고 성대중의 아들 성해응(成海應)은 검서관이 되어 규장각에서 문헌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완, 성몽량, 성효기, 성대중, 성해응 등 몇 대에 걸친 문한가였지만 이들은 신분적 제한으로 크게 현달할 수가 없었고 검서관이나 중앙 관청의 하급 관직을 전전하고 기껏 성공해도 하급 지방관 정도였다. 이들 18세기 서울 샐러리맨의 꿈은 차별이 상존하는 서울에서 벗어나 지방에 은거하는 것이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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