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보성 마천석교비, 173인의 시주로 13인의 석수가 만들다, 1674년 게시기간 : 2020-07-1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7-17 12:1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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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만들면 무너지고 판자는 썩어버리니 석교(石橋)를- 아! 다니지 않을 수 없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길이 아니리오. 길에 물이 있으면 물을 쉽게 건널 수 있는 것은 다리가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다리를 흙으로 만들면 쉽게 무너지고 판자로 만들면 빨리 썩으니 오직 무너지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오래도록 전해지는 것은 돌만한 것이 있겠는가? [於虖人不可無行 不可不由者非路乎 路于有水 ⺀利涉非梁乎 雖然之 梁也以土則易壞 以板則速杇 唯其不壞不杇 傳於悠久者 曷若石乎] 보성 마천석교비의 한 구절. 1674년에 세운 돌다리. 유례가 드문 17세기 교량 관련 기록 유산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3호. 2017.09.07 지정. 다리[교량]는 교통로로서 기능적인 효용성과 경역을 이상화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구조물이다. 또한 현실세계와 피안정토의 경계이자, 두 영역을 연결시켜주는 통로가 된다. 다리 가운데 석교는 사찰의 승려들이 전문 기능인으로서 참여해 조성하는 경우도 많다. 석교 유적 현장은 적잖게 남아 있다. 그런데 그 건립의 과정이나 참여하고 이용한 사람들에 대한 것도 중요하다. 유적으로서 석교가 중요한 만큼 기록과 사람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개흥사 계수 스님의 발원과 주민의 시주, 마천석교
마천석교비는 1674년(현종 15, 康熙 13) 7월에 완공한 마천석교의 건립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마천석교의 건립 배경과 과정, 건립 주체, 참여자를 기록하고 있다. 윗부분에 건립과정, 아랫부분에는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는 등 당시 지역 사회상 연구의 중요 자료이다. 이 다리는 개흥사 계수(戒修) 스님이 보성 지역 사람들의 안전한 통행을 위하여 건립을 주도하였다. 계수스님은 1663년(현종 4) 마천석교 건립의 원을 세우고 고흥 나로도로 들어간다. 당시 국도(國島)로 표기된 섬. 원래 나라의 분양마를 사육하였던 목장이 있었던데서 ‘나라섬’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나로도(羅老島)로 표기하였다. 계수스님은 국도에서 10년간 농사지으며 석교 건립비용을 마련하였다. 1672년(현종 13) 섣달에 재물과 마음을 싣고 돌아와서 1673년에 공사를 시작한다. 부족한 비용은 지역 주민들의 시주를 모은다. 1674년에 완공하였다. 비는 7월에 세웠다. 비문을 지은 이는 “찬(撰)”이나 “기(記)” 등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문 끝의 “康熙十三年甲 七月 日 善裕” 라는 연기와 승명으로 보아 선유(善裕)와 관계 있을성 싶다. 계수스님이 모은 재물로는 부족하여 주민들도 시주를 한다. 보성의 선비 청광자 박사형(淸狂子 朴士亨, 1635~1706)이「마천석교권선문(勸善文)」을 짓는다. 박사형의 권선문 앞 부분에 건립의 경과가 자세하다. 위치와 입지, 지명까지 나온다. 이 고을은 안령(雁嶺)을 넘어 왜진(倭津)으로 이어지는데, (왜진은) 참으로 남북으로 왕래하는 중요한 나루이다. 나루 입구의 깊이 파진 곳을 마천(磨川)이라고 하는데, 마천가에 높이 솟은 것이 오봉산이다.... 오래된 나루터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탄식만 하던 차에 (오봉)산의 승려 계수(戒修)라는 자가 모습은 강을 건너는 코끼리와 같고 마음은 강물에 비친 달과 같았는데, 대중을 구제할 뜻을 단단히 품고 장인에게 물어보니 비용이 1천 섬[斛]이 든다고 하였다. .... 그날로 국도(國島)로 옮겨 가 10년 동안 다리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농사짓고 재물을 모았는데, 그 애타는 마음속에서 마천의 돌다리를 몇 번이나 짓고 헐었는지 알 수 없다. 임자년(1672) 섣달에 비로소 국도에서 배를 타고 나왔는데, 배에 가득 싣고 온 것은 모두 다리를 만들 마음과 재물이었다. 다음 해인 계축년(1673)에 비로소 일을 시작하여 석공은 돌을 깎고 철공은 쇠를 녹이니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기원(淇園, 衛의 대나무가 많은 곳)의 대나무로는 바가지의 터진 곳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니, 한 사람이 준비한 양식은 한도가 있는데 천백 명의 장인들을 먹일 것은 끝이 없어 공사가 번거롭고 일이 크니 재물이 바닥나려 하였다. ... 생각건대 우리 도내(道內)의 여러 군자와 선남선녀들이여, 복을 심으려는 마음을 내어 인색한 마음을 용감히 잘라내고 작은 물건들이라도 내어 다른 사람들과 선행을 함께 하면 선행이 어찌 큰 것만 되고 작은 것은 안 되겠습니까.((『淸狂集』권2, 녹양 박경래역) <신증 산양지(新增山陽誌)>(1741) 등 읍지에도 “마천석교는 (보성)군 동쪽 24리에 있다. 모두 7량가이다. 개흥사 승려 계수가 강희 갑인년(1674)에 세웠다.”고 하여 위치, 규모, 화주, 연대가 나온다. 173인의 시주인, 13인의 석수 기록, 마천석교비 이처럼 마천석교는 7량가의 석교이다. 마천석교비에는 앞 부분 서문에 이어 참여자 직임과 명록이 나온다. 건비를 주관한 화주(化主)는 계수, 시주를 권하는 인권(引勧)은 박종남(朴従南)이다. 특히 7칸 칸별로 시주자 10인씩을 기록하고 있다. 석수는 칸별로 2인, 5칸만 1인이다. 석수는 13인, 시주인은 모두 173인에 이른다. 칸별 기록 외에 추기로 보이는 인명도 포함해서이다. 참여자 직임과 명록을 정리해 보자. 化主 戒修
引勧 朴従南 願堂大施主 嘉善李得, 河起龍, 金乭金, 嘉善姜承男, 孫萬英, 金辛卯, 大浩, 守寬, 普淨, 尙益(10) 施主 嘉善 朴仁(47) 石手 刘永立, 趙玉竜(1칸) 助役 韓山卜 別座 坦教 供主 哲信(11) 一間 吳召史今花, 粉義, 通政盧尙敏, 秋召史今月, 李莫奉, 河云, 戒雄, 學謙, 双運, 曇寬(10) 石手 刘永立, 趙玉竜 二間 全千彔, 朴山立, 郑金, 金于金, 孫弘立, 李春奉, 宗允, 道还, 文𥾡, 忠洽(10) 石手 趙玉竜 六欠 三間 朴分男, ...(10) 石手 片㣋仁 忠及 四間 通政 金德生, ...(10) 石手 刘千金 法灵 五間 申起龍, ...(10) 石手 趙千石 六間 金召史 㒷今, ...(10) 石手 善衍 雷黙 七間 金元承, ...(10) 石手 金尙玉 石黙 추기 善裕(11) 계수(戒修) 스님은 성이 강씨(姜氏)라는 것만 알려져 있고, 자세한 출신이나 수학 과정 등을 알려져 있지 않다. 1651년에 개흥사에서 간행된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간기와 1680년의 개흥사 향로전 관음보살좌상 조성 발원문에 각기 시주(施主)와 사중(寺衆)으로 등장하고 있다. 향로전 보살상은 색난(色難)의 작품으로 지금은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있다. 1649년에 간행된 <묘법연화경>과 1662년에 간행된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에 시주(施主)로 기록된 계수(戒守) 역시 동일인물로 보인다. 계수 스님은 1640년대 후반부터 개흥사에 주석하면서 개흥사의 여러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662년께 ‘國島(나로도)’로 가서 재물을 모아 개흥사에 돌아와 1670년대에 마천석교, 1680년대에 동원석교를 건립한다. 이처럼 1640년대 후반부터 1680년대 중반까지의 개흥사의 불사에 거의 대부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개흥사는 터만 남아 있는데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예고 되었다. 마천석교비는 세차례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① 득량면 해평리 원 건립 위치, ② 득량천변 논 가운데 해평리 2437번지, ③ 주민들이 이동한 위치 해평리 노계 산99-2(1990년대 탁본 및 불교문화재연구소 확인), ④ 득량면사무소 현 위치이다. 이 비는 1990년대 초반에 탁본조사를 한바 있다. ③의 자리, 마천변에 두 부분으로 나뉘어 널부러져 있을 때이다. 2015년에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개흥사지 2차 발굴조사 때 확인되어 득량면사무소로 옮겼다. 조사를 거치고 복원을 하였다. 송광사 성보박물관장 고경스님이 판독문과 함께 송광사 광원암의 남은 현봉스님(현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의 국역문을 제공해 주었다.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보성군과 전라남도에 문화재 지정을 건의 하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옛 나루터 마천(磨川)에 1674년(현종 15) 7월 완공한 돌다리의 건립을 기념한 비석으로 건립 연대, 건립 주체, 건립 배경과 과정 등을 자세히 기록한 유례가 드문 17세기 교량 관련 기록 유산으로 비석 윗부분에 건립과정, 아랫부분에는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직임과 명단을 기록하는 등 당시 지역 사회상 연구의 중요 자료” 마천석교비 전경(2017.12.8) 보성 마천 석교비 세부(7칸 칸별로 시주인과 석수 표기) 마천석교비 탁본문(부분) 마천석교비 전경(2015년, 득량면 해평리 산99-2,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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