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정우채 게시기간 : 2020-07-2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7-20 10:1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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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獄中詩 - 이 옥중시의 작자는 정우채(鄭瑀采)이다. 1926년 광주고보 5학년이었던 왕재일과 장재성은 성진회를 결성하면서 광주고보 1년 정우채를 비밀결사의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왕재일이 1904년생이었고, 정우채는 1911년생이었으니 왕재일에게 정우채는 귀여운 막냇동생이었다. 하지만 나이와는 달리 정우채에게는 성숙한 의식이 있었고, 남다른 문학적 감수성이 있었다. 1931년 정우채가 이 옥중시를 읊은 곳은 대구형무소의 감방이었다. 철창 밖에선 교교한 달빛이 젊은 수인(囚人)들의 심사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성진회 회원 최규창(崔圭昌)과 문승수(文昇洙)가 함께 철창 밖 달빛을 바라보면서 정우채에게 한 수의 한시를 읊어 달라 요청하였다. 그렇게 하여 읊은 정우채의 시는 나라 잃은 젊은이가 부른 마지막 한시가 아니었을까? 정우채는 1926년 광주고보에 입학하였고, 용돈을 쪼개 조선일보를 구독하였다. 틈나는 대로 문학서적을 탐독하였다. 쌓이고 쌓인 응축된 의기가 우렁찬 선창(先唱)으로 터져 나왔다. “團結하자”라는 저항시(抵抗詩)를 조선일보 학생문단에 투고하였다. 입선하였다. 團 結 하 자 정우채 나는 보았노라. 약(弱)한 개미의 단결력(團結力)을 단결력(團結力)이 무엇보다 큰 것을 오 자본가(資本家)의 오만한 그 착취에 수탈당(當)하는 약(弱)한 동포 굼주리고 헐벗는 동포여 약(弱)한 개미의 단결력(團結力)을 보라. 한 힘으로 못하면 두 힘으로 세 힘으로 오 자유(自由)에 굼주린 동포여 우리의 힘은 강(强)할 것이다. 모히는 진리(眞理)를 안다면 강(强)할 것이다. 뭉치고 뭉쳐 합(合)하고 합(合)하야 끝끝내 큰바다물이 되지 안튼가 우리도 저근 힘 合하고 合하야 힘거ㅅ 압흐로 나아가면 우리도 큰바다에 해방의 바다에 가지리 (조선일보의 편집자는 불온시되는 구절을 삭제하였다. XX로 표기된 글귀를 상상하여 적어본다.) 그 후 이 일로 학교장 시라이(白井)의 호출을 받았다. 심한 질책을 받고서 퇴학은 면하였고 겨우 근신처분을 받았다. 당시 조선일보 신춘문단은 모윤숙(毛允淑), 신석정(辛夕汀), 이관구(李寬求) 등의 글이 실릴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정우채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의 출품작으로 성진회(醒進會)에 가담할 수 있었다. 성진회 활동 중에 또 한 편의 시를 썼다. 시제는 “우리는”이었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의기와 뜨거운 열망이 응축된 시였다. 많은 학우들의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 미래는 젊은이들의 분발에 달려있으니 머뭇거리지 말고 떨쳐 일어나 자유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호소했다. 우 리 는 우리는 자유(自由)의 벌판으로 벌판으로... 힘차게 달리는 기차(汽車)의 운전수가 되자!!! 정우채는 1911년 11월 6일 나주군 반남면에서 아버지 정순규(鄭淳圭)와 전의(全義) 이씨(李氏) 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조부 심산(沈山) 이교민(李敎珉)은 구한말 나라가 일제의 침탈로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떨쳐 일어서 싸운 의병장이었다. 마을 강당에 ‘반남학술강습소(潘南學術講習所)’가 생겼다. 정우채는 아무도 따르지 못할 만큼 앞서 나갔다. 당시 이 강습소를 맡아 가르치던 이용의(李容義) 선생은 바로 친외숙되는 친족이었는데 조카인 정우채 학동이 너무도 빼어나게 잘하는 것을 오히려 걱정하였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였다. 이용의 선생은 의병장을 지낸 심산 이교민의 아들이었다. 정우채는 이용희 선생으로부터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어려서부터 민족의식과 애국정신을 마음속에 심을 수 있었다. 나주보통학교 5학년을 수료하였고 영재들의 배움터인 광주고등보통학교에 합격하였으니 때는 1926년 4월, 나이는 16살이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광주로 올라갔다. 당시 한문을 가르치던 송홍(宋鴻) 선생은 수업 도중에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신 뒤 “한국의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 정우채는 송홍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송홍 선생은 한말의 거유(巨儒)로서 광주고보에 재직하면서 항상 한복을 입었다. 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시고 틈이 나는 대로 세계정세와 민족의 진로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정우채는 선생의 국사 강의를 목마르게 기다렸고 숨죽여 경청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정우채는 효심이 깊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으로 구속되어 대구형무소로 이송된 후 자나 깨나 자식을 애타는 마음으로 그리워하실 부모님을 생각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길이 자칫 불효가 아닌가 싶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도 매일 조석으로 부모님 계신 곳을 향하여 망배를 올렸다고 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어머님 전상서”를 올렸다. 사랑하야주시난 어마임전상서 어마님 못된자식으로 얼마나 무일풍야에 심화로 지나심니까 자식은 귀웝다드니 저와갓튼 불효자는 귀웝지 안케지요 모든 저와 갓치 자라는 동무들은 부모의게 심화를 미치지 안는데 아~어마님 이자식의 죌까요 만일 저이게 죄가 있다면 어린것시 죄엿겟지요 어렷쓸때 일이니 어마님 동편해가 소슬때나 그날 해가 서산을 질때나 할마님, 어마님, 아바님, 사랑스런동생, 아~하고 긴한숨과 흰구름 솜구름 떠도난 고향 잇난곳을 바라며 그날 그날의 하로을 복축 합니다 아~어마님 안심하새요 ---중략-- 할마님 노령에 엇지부지하시난지 구구히 알고십슴니다 다른고무임들도 자조 오셔셔 할마님 위안케 하시난지요 대구의 요참 추우는 대단하였음니다만는 아무 탈업시 지나갓셔요 어마님 안심하새요 애걸하난 이자식을 생각하야서라도 심화하신다구 일이 조아짐닛까 나는 어마님는 심화 안하실줄 암니다 아무조록 나의 생각에 기우려지지 안케하야주시요 그리고 나의 책 참으로 나외 동생 갓치 날마다 사랑하든책 다른곳으로 허러지기안케 잘 간수하야주시요 아무것도 불편치 안함니다 사회마는 못하겟지요마는 여는 불비상셔 출옥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 쉬었다. 예로부터 문향(文鄕)으로 이름난 고장답게 나주에서 때마침 열리는 유서 깊은 ‘반양시회(潘陽詩會)’에 나아가 어른들과 함께 한시를 읊고 정을 나누었다. 민족의식을 일깨우면서 망국의 한을 달래는 전통문화의 맥을 이었다. 정우채는 어른들의 모임이지만 시회의 취지에 공감하고 시장에 나아가 망극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여 문장과 절의가 짝을 이루어 아름답다는 뜨거운 칭송을 받았다.
1) 소무(蘇武): 한(漢)나라 때 흉노(匈奴)에게 잡혀가 충절을 지킨 충신(忠臣)
2) 오시축(汚詩軸): 나의 시가 시축의 종이를 더럽힌다는 뜻의 겸손한 표현 글쓴이 황광우 작가 (사)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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