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이계송(李繼宋), 송씨 가문을 계승하다: 1580년 담양부 입안 게시기간 : 2020-07-30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7-2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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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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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의 시양손 이계송> 이계송은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2)의 외증손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시양손자(侍養孫子)이기도 하다. 조선 전기의 독특한 가계 계승 의식과 습속이 이러한 기이한 상황을 만들었다. 여기에 소개하는 자료는 88세인 할아버지 송순이 시양손자 이계송에게 재산을 별급하고 입안을 한 「1580년(선조13, 만력8) 담양부 입안」이다. 입안은 보통 소지(所志), 명문(明文), 재주와 증인의 초사(招辭), 입안(立案)이 점련된 문서인데, 이 문서는 앞 부분인 소지, 명문, 재주의 초사는 탈락되어 없어지고 뒷 부분인 증인의 초사와 입안 부분만 남아있는 문서이다. 송순은 죽기 2년 전인 88세 때에 자신의 맏아들 송해관 부처(夫妻)가 후사(後嗣) 없이 죽고 또 동성(同姓) 중에는 양자를 할 아이도 없자 골육 친속인 송해관의 누님 외손자인 10세의 아이를 송씨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계송(繼宋)’이라고 개명하고 시양자를 삼아서 재산을 별급하고 제사조를 상속해주었다. [그림1] 「1580년 담양부 입안」 소지는 입안(공증)해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이고 명문은 송순이 이계송에게 재산을 별급한다는 명문이고, 재주의 초사는 재주인 송순이 외증손자인 이계송에게 재산을 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문서이다. 이 세 문서는 남아있지 않다. 지금 남아있는 문서는 이계송에게 별급하는 과정에 증인으로 참여한 송순의 조카 송해빈, 진익신, 설운룡이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초사와 이러한 사실을 관에서 공증해주는 입안이다.(그림1) 초사는 재주와 증인이 관에 나아가서 사실을 확인하는 문서이므로 재산을 준 사실을 반복하여 진술한다. 따라서 재산을 준 정황과 내용을 아는 데에는 별급 문서나 소지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증인의 초사나 입안을 통하여 그 내용을 알 수가 있다. 별급할 때에 증인으로 참여한 송해빈, 진익신, 설운룡의 진술 내용을 보자.
1580년 12월 15일 유학 송해빈(55세), 유학 진익신(40세), 설운룡(52세)
진술함. 사재(四宰, 우참찬) 삼촌(송순)의 맏아들 해관이 1546년 병오년(명종 원년)에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에 제수되어 학업에 힘쓰고 여러 해 부지런히 고생하였으나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나이 38살 때에 자식 하나 없이 뜻하지 않게 죽었습니다. 그의 생애가 너무 불쌍할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는 맏아들을 잃어서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해관의 부인 김씨는 멀든 가깝든 양자를 정해서 후대를 계승하여 제사를 모시게 해야 하지만 이를 심상하게 보고 남편이 죽은지 17년이 되도록 그대로 두고 결정을 못하다가 지난 1572년 임신년(선조5)에 역시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의지할 데 없는 두 영혼이 지금까지도 제사밥을 먹을 곳이 없으니 천지간에 망극한 일입니다. 집안의 운세가 중간에 비색(否塞)해져서 후손들이 번성하지 못하여 친자손 중에서는 성을 이을만한 아이가 없으니 사정이 매우 절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골육 친속인 해관의 동복 큰누님의 손자가 나이 이제 겨우 열 살이고 성격도 매우 똑똑하여 그가 성장하기를 기다렸다가 뒷일을 의탁할 수가 있으므로 그의 아버지 순흥군(順興君)과 논의하여 성씨의 이동(異同)이나 세대의 차서(次序)를 고려하지 않고 ‘계송(繼宋)’이라고 개명을 하여 해관 부처의 봉사자(奉祀子)로 할 것을 임시 방편으로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이곳의 토지와 노비들이지만 김씨가 따로 사당을 세우고 가사 40여 칸과 근처의 대전(垈田) 등을 하나하나 뒤에 기록하여 친히 써서 주었으니, 크고 작은 사시(四時) 제향을 친부모와 한가지로 성심껏 봉행하라고 하셨고, 또 늙은 할하비(송순)가 너를 서울로 불러서 이 후기(後記)를 만들어서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제사가 오래갈 계책을 시종 무겁게 생각하여 중간에 폐지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밝히셨고 영세토록 준행하라 하였습니다. 만일 자식이 없어서 제사를 이어서 지낼 수가 없으면 이 토지와 노비 등을 멀리 살면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씨 등을 사손(使孫)으로 하지 말고 인근에 사는 늙은 할아비의 자손 중에서 봉사할 만한 사람으로 수양아들을 삼아서 모든 재산을 주고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하 별급 재산 목록 생략) [그림2] 「1580년 담양부 입안」의 증인 초사 부분
庚辰十二月十五日 幼學宋海賓年五十五 幼學陳翼臣年四十 薛雲龍年五十二
白等 三寸四宰敎是 長子海寬亦 丙午年生員以 健元陵參奉/除授 專意學業 多年勤苦爲行如可 終未遂願 年至三十八 無/一子女 不意身死 其爲生涯 萬萬哀矜叱分不喩 家失長胤/ 至於絶祀 極爲憐憫爲良置 同婦金氏 亦無遠近至 繼後立祀/事乙 視爲尋常 人亡後十七年至 任置不決 去壬申年分 亦爲/病死 無賴雙魂 至今無寄食之地 天地罔極爲乎矣 家運中/否 枝葉不敷 親子孫中 無繼姓之兒 情理逈切爲有等用良/ 骨肉親屬是在 海寬同生長妹女孫以 年甫十歲 性甚穎悟/ 待其成長 可托後事乙仍于 其父順興君果同議 不計姓氏同異 世代次序 繼宋以改名 海寬夫妻奉祀子良中 從權議定爲遣/ 此處田民是沙餘良 金氏別立祀堂 家舍四十餘間及近處/代田等乙 一一後錄 親自書給爲在果 大小祭享事乙 四時良中/ 一若親父母 誠心奉行爲旀 老祖敎是 招尒于京 作爲此後/爲臥乎 哀矜久遠之計乙 終始重念 勿令中廢亦 反復申明/ 永世遵行爲乎矣 萬一無子息 繼祀不行爲去等 同田民等/ 遠居不干李氏等乙 使孫除良 隣近居老祖子孫中 奉祀/可當人以作收養 專數傳與 使不絶祀事 (이하 별급 재산 목록 생략) 1517년에 태어난 송해관은 생원에 합격한 이후, 1546년에 음직으로 건원릉 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문과를 목표로 계속 공부를 하다가 나이가 38세가 되는 1555년에 아무런 자식도 없이 그 뜻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송해관의 부인 김씨는 양자를 들여서 제사를 잇게 해야 하였으나, 그러한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남편이 죽은 지 17년 만인 1572년에 역시 병으로 죽게 되었다. 이에 해관의 아버지인 송순이 두 영혼이 제사도 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후사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송씨 집안의 집안의 운세가 좋지 않아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친자손 중에는 송해관의 성을 이을 만한 아이가 없어서 골육 중에서 해관의 누님의 손자로 나이가 이제 열 살 된 아이를 택하여 후사를 잇게 한 것이다. 그런데 해관의 조카라면 차서가 맞지만 누님의 손자 항렬이니 차서가 한 대 건너뛰게 된 셈이다. 또 해관의 누님은 최세윤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최기와 딸 하나를 낳았고, 최세윤의 딸은 또 순흥군 이몽우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둘을 낳았다. 이에 아들 둘 중 둘째를 이름을 ‘계송’으로 바꾸어 송씨 가계를 계승하고 그 선대를 제사 지내도록 한 것이다. 송순에게는 외증손자인 이계송을 골육이라고 하여 차서를 무시하고 이성인 시양손자로 삼은 것이다. 면앙정의 외손자 최기는 송강 정철과도 막역한 사이로 면앙정의 연보와 문집을 편찬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림2 송순의 가계도(「1572년 송순 자필 분재기」와 족보를 토대로 작성함) <시양과 수양>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신평송씨족보는 이계송이 시양자로 들어와 송해관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명확히 수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족보의 범례에서 이계송은 참봉공(송해관)의 시양자이므로 외손은 당대만 기록하는 원칙을 무시하고 몇 대에 걸쳐서 기록하였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19세기만 하더라도 시양자라는 관행이 무척 특이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범례를 썼을 것이다. 지금은 생소한 용어인 시양과 수양이라는 말이 있다. 시양이나 수양 모두 가계 계승과 망자(亡者)에 대한 제사를 위하여 남아(男兒)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3세 이전이면 수양이 되고 4세 이후면 시양이 된다. 증인으로 참여한 송해빈(55세), 진익신(40세), 설운룡(52세)은 모두 송순의 조카, 생질에 해당하는 친인척이다. 송순은 별급 문서를 작성하면서 이계송을 수양자로 하게 된 경위, 그리고 이계송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을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하였다. 증인들의 입장에서 진술한 위의 내용은 ‘사재(四宰) 삼촌’ 송순의 맏아들인 해관이 생원이 되고 참봉이 되어서도 열심히 문과 합격을 위해 힘썼다고 하였으나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38살 때 자녀도 없이 죽었으며, 해관의 부인인 김씨도 17년을 더 살았으나 그 사이에 가계를 계승하고 제사를 지낼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고 말았다고 하였다. 이에 자식과 며느리를 먼저 보낸 85세의 늙은 송순이 나서서 두 사람의 제사를 모실 시양자로 골육인 이계송을 그의 아버지인 순흥군 이몽우와 합의하여 시양자로 올리게 된 것이다. [그림3] 『신평송씨족보』의 시양자 이계송 부분 이계송이 송해관 부부의 뒤를 계승하고 그의 재산을 받아서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을 관에서 공증한 것이 마지막 문서 「萬曆七年(庚辰)十二月十五日 潭陽府立案」이다. 이 입안은 점련된 소지, 명문 및 재주의 공함(公緘)과 각 참증인의 초사와 관련된 문기를 받아서 상고하였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각 문기의 요지를 서술하고 이계송이 재산을 전득한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관에서 검토한 문기는 (1)가정(嘉靖) 6년(1527) 설석주 처 주씨가 설씨에게 노비 2구를 허급한 문기, (2)가정 10년(1531) 노 1구를 나눠받은 설씨 3남매 화회문기, (3)가정 11년(1532) 김근공이 송순에게 비 1구를 매매한 명문, (4)가정 22년(1543) 송순 어머니 조씨가 장자 송순 등 6남매에게 허여한 문서(비 1구), (5)가정 23년(1544) 이의정의 처 설씨가 조카 6남매에게 허여한 문기 등이다. 이상의 전래 문기를 검토한 후, 별급조로 노비 28구와 전답 141두락, 제사조로 노비 5구와 전답 23두락을 허여한 것이 확실하다는 공증을 한 것이다. 송순은 이계송을 서울로 불러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간에 폐하지 말고 영원히 준행하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그리고 또 만일 자식이 없어서 제사를 이어서 지낼 수가 없으면 이 토지와 노비 등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씨 등을 사손(使孫)으로 하지 말고 인근에 사는 송순의 자손 중에서 봉사할 만한 사람으로 다시 수양아들로 삼아서 모든 재산을 주고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라고까지 당부하였다. 조선 전기 이래 유교적 질서가 받아들여지면서 재산 상속이나 제사, 가계 계승의 관념은 양측적 친속에서 부계친 중심으로 이행하고 있던 시기였다. 입안이 만들어지던 16세기 후반은 아직 양측적 친속의 관념이 강하게 남아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계송의 후손이 끊어지면 그 가계를 다시 송씨 쪽으로 돌리라는 당부의 말에서 내면에는 부계친 중심의 관념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장자인 송해관을 계승하도록 한 입안을 하기 8년 전인 1572년 80세의 송순은 후사가 없는 송해관을 제외한 다른 자손들에게 자필로 써서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 「1572년 송순 자필 분재기」는 360×65cm, 124행 4000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문서이다. 장녀인 성균 진사 최기(崔棄)의 모(母) 몫, 차자 진원 현감(珍原縣監) 해용(海容)의 처 김씨(金氏) 몫과 승중(承重) 몫, 아들 해청(海淸) 몫, 아들 해징(海澄) 몫, 신담수(申聃壽) 처 몫, 첩자(妾子) 해원(海源) 몫, 첩자 지번(支繁) 몫, 첩자 지장(支長) 몫 등 적첩자녀 8명에게 법에 따라 균등하게 나누어주고 역시 이계송에게 별급하던 때에 마찬가지로 조카와 생질 송해빈 등 4명을 증인으로 참여시켰다. 이계송에게 별급한 것까지 합한다면 송순이 자녀들에게 나누어준 재산은 노비가 160구, 전답이 744두락에 이르는 막대한 것이었다. * 여기에 소개된 두 자료 중 「1572년 송순 자필 분재기」는 일찍이 김일근 교수가 자료 소개를 하였으나 원본 자료는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고 「1580년 담양부 입안」은 서울의 화봉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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