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구산선문(九山禪門)과 호남(湖南) 게시기간 : 2020-08-04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8-03 13:2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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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 하대 사회와 남종선(南宗禪)의 전래 신라 하대(780-935)에는 중앙 진골귀족세력의 쇠퇴와 지방호족의 대두라는 정치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불교계 또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곧 선종의 전래가 그것이다. 신라 중대에는 화엄학과 유식학이 주류를 이룬 교학불교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신라 하대에는 선종(禪宗)이 전래되어 신라사회에 수용되었다. 특히 호남지역은 비교적 일찍이 남종선(南宗禪)이 수용되어 선종산문이 자리 잡게 되었던 곳이다. 남종선은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 계통의 선종을 말한다. 남종선을 받아들여 호남지역에 개창된 선종산문은 실상산문・동리산문・가지산문・사자산문이다.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초기 선종산문의 성립과 그 사회적 기반을 살펴본 다음,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연구과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선종산문의 성립과 호남 남종선 사상이 신라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9세기 전반부터였는데, 그 첫 뿌리를 내린 곳은 호남지방이었다. 신라말 호남지역에서 선종사원으로 이름을 떨친 사찰은 남원 실상사, 장흥 보림사, 강진 무위사, 화순 쌍봉사, 곡성 태안사, 광양 옥룡사, 구례 연곡사로 대표된다. 이 가운데 실상사는 실상산문, 보림사・무위사는 가지산문, 태안사・옥룡사는 동리산문, 쌍봉사는 사자산문의 근본도량이었다. 선종 9산문 가운데 이 지역에 4개 산문의 중심도량이 마련되었던 점은 호남지역이 선종 발흥의 요람지였던 것을 대변해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남종선을 신라에 처음 전한 승려는 도의였다. 도의는 서당지장(735-814)의 심인을 전수받아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했는데, 교종으로부터 심한 비판에 직면한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록 도의의 선사상은 신라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지만, 이는 남종선의 신라 전래에 있어서 중요한 시점이 된다. 도의의 귀국보다 5년 뒤인 826년에 귀국하는 홍척은 흥덕왕과 선강태자의 후원을 얻어 지리산 실상사에 실상산문을 개창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선문을 개창하여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의 문하에는 수철(817-893), 편운 등 수백인이 있었다. 수철은 헌강왕의 청으로 운봉 심원사에 주석하니 그 문하에 음광・수인・관휴・의광 등 수백 인이 있었다.
1.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 승탑 실상사 조계암터의 편운화상(片雲和尙) 부도탑 정면에 “창조홍척제자안봉창조편운화상부도 정개십년경오세건(創祖洪陟弟子安峯創祖片雲和尙浮屠 正開十年庚午歲建)”이라 새겨져 있다. 이 탑이 실상사의 개창자인 홍척대사(洪陟大師)의 제자이며 성주 안봉사(星州 安峯寺)의 개창자인 편운화상의 부도라는 말이다. “정개십년경오세(正開十年庚午歲)”는 신라 효공왕 14년(910)에 해당되는데, 이 해는 다름 아닌 후백제의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10년이 되던 해이므로, “정개(正開)”라는 연호는 후백제왕 견훤이 사용했던 연호로 보인다. 견훤은 무주(현재의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무주・완산주(지금의 전주)를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의 서남지역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그는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10세기의 세기말적인 혼란과 전국적인 농민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 견훤이 <올바른 시대를 열겠다>는 뜻으로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건원(建元)하면서 그의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표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후백제의 연호가 부도탑에 새겨진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편운화상이나 그의 제자들은 후삼국이 자웅을 겨루던 혼란기에 아마도 친후백제적인 선종승려로 활동하였을 것으로 이해하여 좋을 듯싶다. 이것은 후백제・신라의 접경지대인 남원 실상사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양국의 각축과정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게 되었을 것이고 편운화상은 무너지는 신라보다는 신생 후백제에 기대를 걸어보았을 것이다. 신라하대에 호족세력이 각지에 할거하며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현실을 체험한 편운화상(片雲和尙)은 뜬 구름(浮雲)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을 인생으로 보았음직 한데, 그는 자신의 일생을 흩어진 구름 “조각구름” 으로 여기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상사의 약사전에는 듬직한 얼굴, 당당한 가슴, 불쑥한 아랫배를 한 9세기 중엽의 철조여래좌상으로 하품중생인을 한 아미타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속칭 약사불이라 불리는 부처님이다. 홍척이 남원 실상사를 중심으로 선법을 크게 떨쳤을 때 조성되었을 이 부처님은 조성 당시의 국왕인 흥덕왕이나 상대등인 선강태자 충공과는 어떤 밀접한 관련이 없었을까? 왜냐하면 홍척(洪陟)이 당나라 서당지장의 선법을 전해 받아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하자, 흥덕왕과 선강태자가 홍척에게 귀의하였기 때문이다. 당대의 실력자인 그들이 홍척의 선사상에 귀를 기울이면서 단월이 되어 실상사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단월들의 경제적 지원 아래 불사가 이루어지고 산문이 자못 활기를 띠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홍척이 실상산문을 개창하고 이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크게 선풍을 떨쳤던 상황을 최치원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비」에서 “북산의 남악척(北山義 南岳陟)”이라 하여 설악산에서는 도의(道義)가, 지리산에서는 홍척으로 남북을 대조시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실상산문은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되었으며, 홍척과 그의 문하에 수백 명의 제자가 배출되어 남북 쌍봉우리를 이룰 정도로 크게 융성하였다. 동리산문은 개산조 적인선사 혜철(785~861)이 헌덕왕 6년(814) 입당하여 서당지장에게 심인을 얻고 문성왕 원년(839)에 귀국하여 개창되었다. 혜철의 문하에는 □如와 그의 제자인 允多(864~945)가 계속 곡성 태안사에 주석하였다. 혜철의 제자로 동리산문의 방계인 도선(827~898)과 그의 제자인 경보(869~947)는 광양의 옥룡사에 주석하였다. 특히 경보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연결되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견훤은 경보가 중국에서 귀국하자 전주 남복선원에 머무르게 하면서 “우리 스승을 만나기는 비록 늦었으나 제자 되는 것을 어찌 늦추겠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적극적인 연결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동리산문의 선사상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가졌는데, 하나는 유식사상의 포용이요, 다른 하나는 풍수지리사상의 수용이었다. 동리산문은 혜철의 제자들로 정통법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동리산문에 소속된 사원은 곡성을 중심으로 구례・광양・영암 등지에 퍼져 있었으므로, 동리산문이 호남 동부지역에 세력을 부식시키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2. 곡성 태인사 적인선사 승탑 가지산문은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 체징에 의해 개창되어졌다. 체징은 신라에 남종선을 초전한 도의와 그의 제자인 염거의 선풍을 계승하였다. 도의의 선종사상은 초기에 조사선을 성립시키면서 교학불교, 특히 화엄사상을 비판하는 경향을 지녔다. 의상계 화엄사상이 유행한 지역인 설악산의 진전사을 중심으로 한 도의의 선풍은 화엄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의상계 화엄종을 크게 의식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것과의 교섭문제를 생각게 하였던 것이다. 도의의 선사상을 계승한 체징은 헌안왕 3년(859) 왕의 요청으로 8세기 중엽 경덕왕대의 화엄종 승려 원표와 연고된 가지산사에 주석하게 되었으며, 경문왕 원년(861)에 사찰을 더욱 확장하여 가지산문을 융성하게 하였다. 가지산문은 조사선의 수립이나 교종불교를 비판하려는 면에서 모두 한계성을 가졌지만 그 후 우리나라 불교사상이 전개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3.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가지산문의 후원세력은 헌안왕, 무주 장사현 부수 김언경, 망수댁・이남댁의 금입택(金入宅)의 진골귀족세력이었다. 체징의 문하에는 영혜, 청환, 의차 등 8백여인이 있었으며 후에 당에 가서 운거도웅의 조동종을 전해 온 형미(864~917)도 그의 사법제자였다. 형미는 당에서 귀국할 때 서남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한 왕건의 도움에 힘입어 왕건에게 연결되어졌다. 왕건은 무위사에 주석하고 있던 형미를 데리고 태봉의 수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형미는 왕건이 즉위하기 직전 917년 궁예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비문의 결락으로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친왕건적인 형미가 궁예의 무도함을 비난한 것이 원인이 되었지 않았나 싶다. 형미의 피살은 선종산문과 지방호족들에게는 물론 백성들에게까지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개울과 연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인과 속인이 모두 울음을 삼켰고 사람과 하늘이 그 빛을 변하였다”라고 한 것은 그 당시의 정황을 잘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은 결국 궁예로 하여금 민심을 크게 잃게 하였으며 반대로 왕건의 추대를 재촉한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사자산문은 도윤(798~868)이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5)의 선법을 전하여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하여 화순 쌍봉사에서 선풍을 드날림으로써 비롯되어졌다. 쌍봉사에 세워진 철감선사 도윤의 부도탑은 신라 선종미술의 극치를 이룬 예술 조각품으로 오늘날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제자 절중(折中, 826~900)은 강원도 영월 사자산에 옮겨가 흥령선원에 주석하면서 사자산문을 개창하였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호남지역은 일찍이 선종 발흥의 요람지가 되었는데, 그 까닭은 주로 남중국에 들어가서 유학하던 선승들이 무주일대의 서남해안으로 귀국하였기 때문이다. 초기 선승들은 해상 군진세력인 장보고의 선편에 몸을 싣고 신라에 귀국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820년대 후반에서 840년대 중반까지는 청해진대사 장보고가 서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선승들과 장보고와 연결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장보고는 문성왕대 염장에 의해 피살되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발견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남종선은 주로 강서・호남지방에서 성행하여 중앙이 아닌 지방사회의 호응을 받고 있어 지방분권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중국 남종선을 이은 신라의 초기 선종산문도 지방사회, 특히 호남지방에 일찍 뿌리를 내리고 있어 지방사회의 실질적 지배자인 호족의 후원아래 뿌리를 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왕명을 받아 건립된 선승들의 탑비에는 호족들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고, 중앙의 왕실과 연관된 면만 기록되어 있다. 초기 선종산문의 단월세력으로 실상산문은 흥덕왕과 선강태자, 동리산문은 문성왕, 가지산문은 헌안왕과 장사현 부수 김언경 그리고 진골귀족인 망수댁・이남댁의 금입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초기 선종산문은 지방의 호족세력과 중앙의 왕실세력, 즉 쌍방과 결연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건이 903년에 나주를 공략하여 서남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자, 선승들은 왕건의 도움 없이는 귀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선승들은 왕건세력의 보호를 받으며 서남해안으로 귀국하게 됨으로써 자연히 왕건과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다. 왕건은 선승들이 호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 미치는 교화력이 적지 않음을 간파하였던 것 같다. 왕건은 선종세력과 연결된 호족세력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고려로의 통일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한편, 선종산문(禪宗山門)은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동리산문은 872년(경문왕 12)에 세워진 동리산의 혜철대사비문에 의하면, 당시 태안사에는 2,939석 4두 2승 5합의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으며, 전답이 494결 39부였고, 좌지가 3결, 하원대가 4결 72부, 시지가 143결, 염분이 43결이며, 그밖에 노가 10인, 비가 13인, 복전이 40인이었다 한다. 가지산문은 헌안왕대에 그 후원자인 김언경이 사재로 철 2,500근을 내어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였고, 망수댁・이남댁으로부터 금 160푼과 조 2,000곡을 공출하여 그것을 장식하였다. 또 경문왕대에는 보림사 쌍탑을 김언경이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선종산문은 단월세력의 후원아래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면서 장원을 형성하여 사원경제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10세기초에 이르면 선종은 화엄종을 능가해서 크게 확대되어 갔다. 9세기 중반 이후 國師에 책봉된 승려는 모두 禪僧이었다. 이와 같이 선종이 크게 확대된 배경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것은 불교의 내적 문제와 외적인 문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겠다. 불교 외적인 요인에 대해서는 지방호족 뿐만 아니라 왕실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급격히 성장했다는 것이다. 불교 자체의 요인은 중국불교의 영향과 신라 화엄종의 문제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회창연간(會昌年間, 814~846)에 일어난 폐불사건(廢佛事件)에도 선종은 타격이 적었는데 이것은 신라 입당승(入唐僧)들이 선종에 경도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불교내의 자체문제와 관련지어 보면 이론에 치우치고 관념적인 경향에 흐르던 신라하대 화엄종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선종이 유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라 하대의 선종승려들은 대개 교종 특히 화엄종의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한계를 비판했지만 그러면서도 화엄학을 겸수했던 선승 또한 적지 않았다. 이는 선종에 귀의하기 이전에 화엄학을 익혔던 선승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화엄학과 선사상이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선종 수용 초기보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 화엄학을 겸학한 선종 승려가 더 많이 보이는 것은 선종과 함께 교종이 병립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3. 연구과제 신라하대에 선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그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교종 특히 화엄종은 많은 충격을 받고 어느 정도 위축되었던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 존립기반 자체가 뒤흔들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라 하대에는 교종은 위축되고 선종만이 융성했다는 견해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 하대의 불교에 대한 종래의 이해는 너무 선종에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선사상의 전래 및 수용은 기존의 불교계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지만, 이 시기의 두드러진 현상은 화엄사상과 선사상이 공존하면서 갈등이 있었고, 또 상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종래의 연구는 화엄종은 귀족과 연결되고, 선종은 지방의 호족세력과 손잡았다는 도식적인 이해를 하였다. 선종 사찰이 각 지방에 건립되어 그 지방의 호족들의 지원을 받았던 경우가 상당히 보인다. 그러나 왕실과 연결되거나 그 후원을 받았던 경우도 적지 않게 발견되므로, 지나친 도식적인 이해는 당시 불교계의 실상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당시의 불교계의 흐름은 기존 교종의 한계, 즉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을 벗어나 보다 실천적인 혁신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 선종에 의해 이루어졌고, 또한 이에 자극받아 화엄종도 새롭게 변화되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이 시기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세력관계에는 약간의 우열과 갈등도 있었지만, 선종과 화엄종이 상호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唐代)의 선종사원(禪宗寺院)은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의 『선원청규(禪苑淸規)』에 나타나 있듯이 “ 선원(禪院)이 율원(律院)에서 독립하여 불전(佛殿)을 세우지 않고 법당(法堂, 설법당)만을 건립하였다 ” 고 한다. 선원(禪院)에는 불상을 모신 불전(佛殿)을 세우지 않고 주지(住持)가 상당법문(上堂法門)할 수 있는 법당(法堂)만을 세웠다는 것이다. 당나라 때 선원의 주지는 교화주(敎化主)로서 즉 당세(當世)의 살아있는 부처로서 중생들을 교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 선종사찰에서는 중국과 달리 불전(佛殿)을 건립하고 주존불(主尊佛)로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고 있어 주목된다.
4.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이것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신라 선종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선불교(禪佛敎)의 신라적 전개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선불교와 우리나라의 선불교의 동이(同異)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또한 나말려초 시기의 선종사상은 현재 한국 불교의 원류로서 고려후기 보조지눌의 사상 형성과 그 이후 불교사상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한 선종의 유행으로 지방불교, 산중불교, 수행불교, 자급자족의 장원경제로의 승풍의 변화와 선종미술(철조비로자나불, 부도, 탑비), 음다(飮茶)의 풍조 등의 선문화(禪文化)의 융성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할 연구과제이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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