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호남한시 산책(1) “남 앞에서 억지웃음 짓기 싫어서” 게시기간 : 2020-08-0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8-05 11: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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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고려 후기 빛고을 광주의 경렴정이라는 누정을 배경으로 해서 지었다. 광주에 누정이 흔치 않았던 시절에 누정을 배경 삼아 지은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즉, 고려 시대에 광주에 과연 누정이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 답을 해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또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즈음에 광주의 한 지식인은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갔는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작지 않다. 「경렴정」 작품을 지은 탁광무(卓光茂, 1330?~1410)는 고려 말 공민왕 때 주로 활약한 문인으로 자는 겸부(謙夫)요, 호는 경렴정(景濂亭) 또는 졸은(拙隱)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 빛고을 광주를 본관으로 한 경우가 간혹 있는데, 탁광무 집안이 바로 그러하다. 탁광무의 부친은 탁문위(卓文位)로 당시 집현전 대제학이라는 벼슬까지 지냈다. 따라서 벌써 탄탄한 가문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탁광무가 교유한 사람은 정몽주, 이제현, 이숭인, 이곡, 이색, 문익점, 우탁, 길재, 정도전 등과 같은 보통 사람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분들이다. 그러니 이러한 교유 관계를 통해 탁광무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덧붙여 탁광무는 1351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아가 내서사인, 좌사간대부, 우의사대부, 예의판서 등의 벼슬을 거쳤다. 우의사대부 시절에 신돈(辛旽)을 등에 업고 권세를 자행하던 홍영통(洪永通)을 탄핵했던 일도 있었으니, 여기에서 탁광무의 불의에 맞서는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벼슬을 그만 두고 물러나 고향 광주에 ‘경렴정’이라는 누정을 짓고 여생을 즐기다 생을 마감하였다. 탁광무가 남긴 시 작품은 현재 총 26제 28수정도 남아있다. 물론 더 많은 작품을 지었을 것이나 거의 사라지고, 남은 것이 고작 28수인 것이다. 전통 시대, 그것도 고려 후기에 살았던 분의 작품이니 현재 많은 편수가 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희망사항일 수밖에 없다. 작품 「경렴정」은 그 28수 중 한 편으로, 어쩌면 탁광무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성종 때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에 탁광무의 시 작품이 총 4편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 한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동문선』에는 시제를 「경렴정」이라 했으나 탁광무의 문집 『경렴정집』에는 「퇴로시(退老詩)」로 되어 있어 책에 따라 제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렴정집』은 후손들이 만든 문집으로 『동문선』에 실린 시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일부러 「퇴로시」라는 제목으로 바꾼 것이다. ‘퇴로’란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후손들은 이를 더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각설하고, 「경렴정」 시 작품을 보자. 작자는 수련에서 말하기를 “남들 앞에서 억지웃음을 짓기 싫어서 수정에서 온종일 청산을 바라본다.”라고 하였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습지도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웃음을 내보여야 할 때가 있다. 작자는 이러한 세상살이가 싫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억지웃음을 짓는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위선이기 때문이다. 작자의 생각을 함축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2구에서 말한 ‘수정’은 바로 경렴정을 말한다. 아마도 작자는 경렴정을 달리 ‘수정’이라 부른 듯하다. 왜, 수정이라 불렀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바로 정도전이 지은 「경렴정명후설(景濂亭銘後說)」에 나온다. 정도전이 지은 「경렴정명후설」은 경렴정의 기문 성격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겸부 탁 선생이 광주 별장에 연못을 파서 연을 심고, 못 가운데에 흙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오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익재 이문충공이 그 정자를 ‘경렴’이라고 이름 하였는데, 이는 대개 염계의 연꽃을 사랑하는 뜻을 취하여 그를 우러러 존경하고 사모하고자 한 것이리라.(정도전, 『삼봉집』 권4, 「경렴정명후설」 일부분) 정도전이 말한 내용을 통해 탁광무가 세운 경렴정 공간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경렴정은 별장의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어 세운 누정으로 주변에는 연이 수려하게 심어져 있었다. 따라서 탁광무는 경렴정을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누정과 같이 생각하여 ‘수정’이라 불렀을 것으로 생각한다. 누정을 세운 처음에 그에 합당한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현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이제현은 탁광무가 지은 누정의 이름을 ‘경렴정’이라 명명해주었던 것이다. ‘경렴’이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를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돈이는 누구인가? 북송 때의 대표적인 학자로 특히, 그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은 잘 알려져 있다. 주돈이는 「애련설」를 통해 연꽃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를 적었는데, 바로 군자적 풍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후 수많은 문인 학자들은 주돈이를 존경한다는 표시로써 별장을 짓고 거기에 연을 심기도 하였다. 탁광무가 누정을 세우고, 주변에 연을 심었던 이유도 바로 주돈이의 풍모를 닮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평소 탁광무를 지켜봤던 이제현인지라 곧바로 주돈이와 연결시켜 누정 이름을 서슴없이 ‘경렴’이라 하였다. 그리고 정도전은 이러한 내용을 「경렴정명후설」에 그대로 담았다. 정도전은 일찍이 친원(親元) 정책에 반대하다 전남 나주로 유배를 오게 되었는데, 이때 광주에 있던 탁광무를 찾아와 경렴정의 기문을 지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본다. 작자는 함련에서 자기 집안의 기호는 시속과 달라서 경렴정 공간은 인간속세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경렴정 공간이 ‘청유(淸幽)’하다라고 하였다. ‘청유’는 맑고 그윽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에서 연꽃을 사랑한 이유로서 든 “진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않아서”라는 말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어 경련에서는 경렴정 주변 풍광과 그 속에서 작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말하였다. 경렴정 주변에는 여러 풍광들이 있었을 것인데, 작자는 우선 ‘풍월(風月)’을 들었다. 작자가 바라다 본 바람과 달은 사람처럼 사사로운 감정을 담고 있지 않다. 때문에 특별히 어떤 사람에게만 바람이 불어 시원함을 안겨주고, 또한 특정한 사람에게만 훤한 달빛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작자는 바로 경련 1구에서 사사로운 감정이 없는 바람과 달의 모습을 말하였다. 또한 2구에서는 천지는 도량이 커서 나를 한가롭게 그냥 놓아둔다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작자의 여유로운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탁광무는 고향 광주와 멀리 떨어진 개성에 가서 여러 해 동안 벼슬살이를 하다가 말년에서야 여유를 찾았는데, 이러한 상황을 2구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 미련에서는 더욱더 여유로워진 작자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1구에서 말한 ‘망기(忘機)’란 기심(機心)을 잊는다는 뜻이다. 기심이란 『장자』 「천지」편에서 유래했는데, 바로 자기 한 몸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교묘하게 꾀하는 마음을 말한다. 즉, “기심을 잊는다”라고 했으니, 세상 욕심을 버린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작자는 이제 세상 욕심을 버리고 경렴정 주변을 거닐면서 편히 즐기고 있다. 이러한 여유를 느끼니 내 자신이 아닌 세상의 다른 물상이 눈에 들어왔다. 경렴정에 누워 허공을 바라다보니, 날다가 지친 새가 돌아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광주에 탁광무가 세운 경렴정은 없다. 다만, 현대인의 입장에서 경렴정이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혹자는 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광주보훈병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는데, 앞으로 더 추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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