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수면 위로 우뚝히 채색 무지개가 솟았네, 벌교 홍교(虹橋) 게시기간 : 2020-08-08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0-08-07 09:4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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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 동쪽에 가을 구름 갑자기 걷히니 / 秋雲忽破石橋東 수면 위로 우뚝히 채색 무지개가 솟았네 / 水面亭亭起彩虹 두 언덕 푸른 산 위로 둥근달이 떠오르니 / 兩岸靑山一輪月 인가들이 온통 태호 가운데 있는 것 같네 / 人家如在太湖中 돌다리 石橋, 채색 무지개 彩虹, 어디일까. 시절은 가을이다. 그 다리 동쪽의 가을 구름. 수면 위로 우뚝 채색한 무지개. 길손은 지나다 돌다리를 보았다. 무지개처럼 수면위로 솟은. 구름이 갑자기 걷힌다 한 걸 보면 가을비가 내린 뒤 맑은 하늘에 무지개가 떠 오른 것 같기도 하다.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 그 무지개를 닮은 듯 수면위로 올라 있는 무지개 돌다리 彩虹 石橋. 이윽고 밤이 된다. 홍교다리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른다. 낮에 본 무지개를 생각하면 두 언덕 사이 산 위로. 인가들은 호수 가운데 든 것 같다. 언제 적일까. 그 학인은 누구일까 1896년(고종33) 늦가을, 전라남도 낙안군 고읍(古邑)의 홍교(虹橋). 현재의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 홍교(보물 제 304호)”이다. 그 시인은 마흔 두 살의 매천 황현(1855~1910).『매천집』의 「병신고(丙申稿)」에 실린 ‘벌교 잡절(筏橋雜絶)’ 4수 가운데 네 번째의 칠언절구. 이 시의 전후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먼저 이 보다 24년전, 1872년 낙안군지도. 규장각에 소장된 회화식 채색지도이다. 물길을 따라 세 곳의 다리가 보인다. 맨 아래쪽 큰 다리가 매천이 채색 무지개로 형상화했던 그 곳이다. 다섯 개의 교각이 보인다. 양쪽으로 이어지는 붉은 길은 요즘으로 치자면 국도이다. 다리 왼쪽에서 위로, 건너 오른쪽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가는 붉은 선은 국도와 이어지는 지방도라 할 것이다. 왼쪽으로는 광주로 통하는 길이고, 오른쪽은 지금의 “벌교 고막” 음식 거리를 지나 순천으로 통하는 길이다. 홍교 다리를 가로 지르는 길이 더 중요한 길목이다. 낙안 읍치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리 곁에 “단교(斷橋)”라는 표기가 이채롭다. 다리 그림도 홍교, 무지개 다리로 보기에는 좀 그렇다. 다리 왼쪽의 둥그런 표기는 마을 지명인데, “벌교(伐橋)”이다. 다리 소재지인 셈이다. “벌교(筏橋)”로도 쓴다. 원래 이 곳 다리는 섶나무 등을 엮어 만들었다. 그래서 뗏목 다리[筏橋, 伐橋]로 불렀고, 주요 교통로 인 탓에 “벌교”가 지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여러 물줄기가 모아져 바다로 이어지는 곳이라 여름 장마철이면 범람하였고 뗏목 다리는 떠내려가 형체를 감추곤 했다. 다리도 끊기니 길도 사람도 끊겨 언젠가 부터 “단교(斷橋)”가 고유명사화 된 것. 낙안팔경의 단교귀범(斷橋歸帆)도 이곳을 이른다. 한편으로 섶나무단의 음이 연결될 수도 있을 터. <사진 1> 1872년 낙안군지도(부분, 규장각 소장)의 단교(斷橋)(하단). 다리 왼쪽의 “벌교(伐橋)”는 소재 지명인데 “筏橋”로도 쓴다. 그 옆에 장시(場市)가 보인다. 위 왼쪽 다리는 벌교 전동리의 도마교로 보인다. 도마교비(1705년)와 도마교중수비(1802년)가 있고 가구식(架構式) 구조가 일부 남아 있다. 도마교와 석비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이다. 매천이 다녀간지 21년째 되던 1917년에 나온 책에서는 사진으로 볼 수 있다. 목포신보사에서 간행한 『전남사진지』. 당시 각 군별로 시가 전경과 명소를 몇 군데씩 소개했다. 자세한 설명도 일어로 곁들였다. 이 다리는 벌교 안경교(筏橋眼鏡矯)로 표기하고 있다. 설명은 벌교포의 입지와 부산과의 반출입 상거래액을 적고난 뒤 다리에 대해서 쓰고 있다. 이 사진은 벌교읍내장 부근에 있는 석조 안경교로 제작연월은 분명치 않지만 다리 옆 [비]에 “건륭년간중수(乾隆年間重修)”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파손된 것을 보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들어진 때는 천년 이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대 조선 건축술이 얼마나 진보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진2> 1917년의 벌교 홍교 -『전남사진지』 인용. 이 책에는 “벌교 안경교(筏橋眼鏡橋)”로 표기하고 있다. 3개소의 경간이 뚜렷하고 다리 위의 사람들이 수면에 반사될 정도로 잔잔하다. 원래는 섶나무 뗏목다리였는데 장마철이면 떠내려가 다리도, 사람도, 길도 끊겨 “단교(斷橋)”가 지명이 되었다. 조선 후기 들어 돌다리 홍교로 만들었다. 이 때의 낙안은 백제 이래 독립된 고을로서 지위를 잃고 만다. 1908년 낙안군이 폐지되고 남상, 남하, 고상, 고하의 4개면은 보성으로, 읍내면[낙안면]등 7개면은 순천군으로 나뉘어 속한다. 낙안군 고하면 벌교리에 속했던 홍교는 보성에 속한다. 보성으로 편입된 4개 면은 1914년 벌교면(筏橋面)으로 합해진다. 홍교의 옛 지명 “벌교”가 면이름으로 정착된 것이다. 돌다리 홍교는 언제 만들어 졌을까. 사진 설명에 있는 건륭(乾隆) 연간은 1736년(영조 12)부터 1796년(정조 20)까지 사용한 청나라 연호이다. 벌교 홍교 옆에 있는 비석군 가운데 이 시기에 세운 비석은 2기이다. 1737년(영조 13) 9월에 세운 비와 1777년(정조 1)에 세운 비이다. 특히 1737년(건륭 2년, 정사)에 세운 비는 비제가 호남 부사군 단교 중수기 비명(湖南浮槎郡斷橋重修記碑銘), 제액은 단교중수비이다. 이조(李澡)가 비문을 지었고 김이서(金履瑞)의 글씨이다. 선암사의 초안(楚安)과 습성(習性)스님이 군민 여섯명과 함께 홍교를 건립했다는 내용이다. 음기의 시주질에 숙부인 고씨(淑夫人高氏), 박일중 모친○씨(朴日中爲母○氏) 등 외명부 품계의 사대부가 여자들과, 아들의 이름과 함께 기록된 평신분의 여자들도 기록되어 주목된다.
불가에서는 중생을 널리 구제하라는 가르침을 갖고 있다. 지난 날 대사 초안(楚安)과 승려 성습(成習, 習性)이 낙안의 대천에 다리를 놓아 민생을 구제한 공덕을 쌓았으니 아름답다 칭송할 일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다리가 무너지니 사찰의 선사들과 군내에 거주하는 6인이 초안대사의 뒤를 이어 다시 이 다리를 새롭게 중수하였다.(佛氏有普濟敎 佛者楚安與沙彌成習 橋於浮槎之大川 有普濟功呼其美矣 歲久而橋圮 禪師又與郡居六人 從安師重新之(湖南浮槎郡斷橋重修記碑銘))
그런데 이보다 40여년 앞선 기록이 확인된다.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과 설암 추붕(雪巖 秋鵬, 1651~1706)의 <낙안 남쪽 단교 교량을 세우는 권선문(樂安治南斷橋架橋梁勸善文)>과 <부사현 단교의 권선문(浮槎縣斷橋勸善文)>이다.『백암집』과 『설압잡저』에 실려 있다. 현장에는 1705년(숙종 31)에 세운 <단교비기>가 보인다. 비제 부분만 남아 있지만, 청광자 박사형(1635~1706)의 문집에 비문이 전한다. 백암과 추붕의 권선문에 따라 1705년에 다리를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이웃한 벌교 전동리의 도마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3호]와 순천 환선정 석교도 건립된다. 박사형은 1673년(현종 14)에 보성 마천석교비(문화재窓15)의 권선문을 짓고 1705년에 환선정 석교 비문도 짓는다. 이어 무용 수연(無用秀演, 1651~1719) <단교모연문>도 있다. 박사형의 단교비문에는 낙안에서 보성․흥양[고흥]․순천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나룻터에 대광사 초안대사가 다리를 설치하였고, 다리 주변에는 날마다 상선들이 무수히 정박해 있었으며, 그 일대가 모두 갯벌밭이라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다리 주변에 시장을 개설하여 장사로 생업을 영위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1872년 지도에 장시(場市)가 보여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전부터 다리가 있었지만 큰물이 치면 다리가 끊어지고 말기 때문에 ‘단교’ 라 부르기도 하고, 다리가 끊어지면 사람의 통행도 끊어진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하였다. 이어 1844(헌종10)에 중수하고 1896년에 황매천이 지나며 시를 남겼고 1899(광무3)에 중수한다. 1917년에는 사진으로 남았다. 1959년 1월 23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때는 지금처럼 국보, 보물이 등급져 있지는 않고 국보로 용어를 쓸 때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으로 재지정되면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304호가 된다. 1981~1984년 사이 홍예의 밑 부분과 석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화강암으로 교체하여 원형을 되찾았다. 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 밑의 천장 한 가운데 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종석(宗石)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물과 용의 관계에서 오는 민간신앙의 표현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용의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다리를 위해 주민들이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화려하고 거대한 모습 속에서도 단아한 멋을 풍기며, 웅대함과 함께 뛰어난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현재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사진3> 보성 벌교 홍교 전경(2015.8.) <사진4>단교중수비(1737년, 영조 13, 乾隆2) - 벌교 홍교는 이때 중수를 한다. 1917년 『전남사진지』편찬자들은 이 비를 본 것 같다. 그런데 일부만 남았지만 1705년에 세운 비가 현장에 있고 비문은 청광자 박사형의 문집에 실려 있어 원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이 1705년에는 이웃한 낙안 전동리(현 벌교읍)의 도마교, 순천 환산정 석교가 건립된다.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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