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송강이 겪은 임진왜란, [백세보중] 게시기간 : 2020-08-1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8-12 11:4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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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에는 한국가사문학관이 있다. 면앙정, 송강 등 우리 가사 문학을 빛낸 인물들의 자료를 수집하여 보관하고 전시를 해놓은 곳이다. 근처에 있는 소쇄원, 면앙정, 식영정 등과 함께 담양, 창평 지역의 문화유산이다. 가사문학관에서는 면앙정이나 송강 등과 관련된 자료들이 수집되어 인터넷 상으로도 공개를 하고 있다. 많은 자료 중에서 필자는 가사 문학 자료는 아니지만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련 기록물인 [백세보중(百世葆重)]과 [송강선조유필(松江先祖遺筆)]이라는 자료에 주목하였다. [송강선조유필]은 송강 정철이 인척 어른과 아들, 손자에게 보낸 친필 간찰을 첩장한 자료이고 [백세보중]은 송강 정철의 말년 기록, 특히 임진왜란 시기에 양호 도체찰사(兩湖都體察使), 사은사(謝恩使)를 역임했던 송강 정철이 직접 주고받은 문서나 문서의 초고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송강 관련 기록들은 송강이 죽은 후 아직 전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 탄핵을 받고 몰리는 시기였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산일되고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내아들인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이 아버지의 문집을 편찬하기 위하여 자료들을 정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홍명이 모아두었던 자료들도 문집 편찬 이후에 다 흩어져 버렸다가 후손의 노력으로 이 자료들이 보존되었고, 그로부터 거의 200여 년이 지난 후인 순조 대에 실학자인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5)에 의하여 자료들이 재정리되었다. [그림1] [송강선조유필], [백세보중] 표지 특히 [백세보중]이라고 하는 자료는 송강이 임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전라도 관찰사를 하면서 올린 상소의 초고 등에서부터 임진왜란 시기에 양호체찰사, 사은사로서 나라의 위기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문서의 잔편(殘片)들이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서는 이 자료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짚어보고 그중에서도 일차 자료에 해당하는 문서인 전지(傳旨) 두 점을 소개하면서 송강 정철이 겪은 임진왜란을 추체험해보고자 한다.(그동안 학계에서는 ‘승정원을 통하여 담당 승지가 국왕의 명령을 신하에게 전달하는 문서’를 [유지(有旨)]라는 명칭으로 불러왔는데, [유지]라는 명칭보다는 하백원이 [백세보중]의 발문에서 말한 [전지]라는 명칭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임란 중에 유성룡에게 내려진 [유지]는 [정원 전교(政院傳敎)] 즉 [승정원 전교]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적이 있다.) [백세보중]은 5책으로 장첩되어 있다. 1책은 1581년 12월 전라도 관찰사를 하던 시기에 올린 상소 초고에서부터 1591년에 유배되었을 때의 공사(供辭)까지 모두 임란 직전 시기의 자료들이다. 2책은 두 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쟁이 일어나 선조가 파천을 하고 송강은 사면이 되어 평양에서 선조를 다시 만나던 시기에서부터 양호 체찰사가 되어 전란 수습을 위하여 주고받은 문서들이 수록되어 있다.(2-1책) 2-2책에는 양호 체찰사, 사은사 시기에 승정원에서 송강에게 보낸 국왕의 말씀인 [유지] 원문서 5건이 첩장되어 있다. 3책 1592년 10월부터 1593년 6월까지 주고받은 문서들이나 문서의 초고들이고 4책은 1593년 5월과 6월에 올린 헌의나 상소의 초고들이다. 이 자료들은 임진왜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모두 다 중요한 일차 자료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2-1책에 있는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친필 문서, 2-2책의 5건 [유지], 3책과 4책에 있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보낸 문서, 송강이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에게 보낸 문서의 초고 등이 주목된다. 제봉 고경명이 양호체찰사인 송강에게 보낸 조목은 전쟁이 일어난 초기에 제봉이 송강에게 의병과 관군의 운용에 대해서 건의한 문서이다. 다섯 건의 전지의 날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都體察使 寅城府院君: 1592년 11월 5일, 모병하러 내려간 변이중이 그대로 머물러 전라관찰사 권율을 도와 군량을 조달하게 하라는 전지.
2) 都體察使 寅城府院君: 1592년 11월 18일. 최원과 김천일 부대가 강화에 물러나 서울 회복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 권율이 평택에 머물러 충청도만 지키고 있게 하는 전략을 꾸짖는 전지. 3) 寅城府院君: 1593년 1월 11일. 도체찰사 종사관 송영구를 시강원 사서로 임명하니 보내라는 전지. 4) 寅城府院君: 1593년 1월 12일. 명군이 평양성을 회복하여 정철을 사은 정사로 임명하니 행재소에 오고 그 뒤의 일은 체찰부사 김찬에게 맡기라는 전지. 5) 謝恩使 領敦寧府事: 1593년 6월 3일. 明將의 의견이 왜적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으니 사은사가 가는 것은 부적절하므로 일단 의주에 머물러 있으라는 전지. 위 다섯 건의 전지 내용만으로 보더라도 임진왜란 시기 정철의 주요한 활동 내용을 알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자 5월에 사면이 되어 6월에 평양 행재소에서 선조를 눈물로 맞이한 정철은 사면해준 데 대하여 감격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헌의(獻議)를 하였다. 그중에서도 [백세보중] 권2-1에 보이는 헌의 가운데에는 국왕이 평양을 떠나 다시 강계와 같은 곳 또는 압록강을 건너 파천할 것이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가 아직 왜의 침입을 받지 않았고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곳이니 전주와 같은 전라도 쪽으로 갈 것을 요청한 헌의가 눈에 띈다. 곧이어 6월에 정철을 양호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그쪽을 지휘하라고 한 것도 이러한 헌의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6월에 뱃길로 충청도에 들어간 정철은 양호 지역을 다니며 관군과 의병들을 지휘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운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휘하의 지휘에 있어서 현장 지휘관인 감사, 병사들과 국왕이 있는 행재소, 왕세자와의 소통과 전략에 있어서 많으 이견이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은 11월 18일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전라 병사인 최원, 의병장 김천일, 전라 감사 권율을 지휘하는 문제를 두고 행재소로부터 내려온 명령 전지이다. 都體察使寅城府院君 開拆
同副承旨 沈 (手決) 崔遠·金千鎰之軍 頓之江華孤島/中 已爲無勇之兵 今所恃以爲進/取京城之計者 專在權慄領兵上/來而聞 卿今權慄屯守平澤境/ 以致千里勤王之師 老於中途/ 失策之甚者也 設使湖西一路得/以保存 而京畿黃海掃淸之責 卿深思輕重緩急之/宜 勅令權慄 刻期赴難 俾無後時/之患事 有/ 萬曆二十年十一月十八日 [承政院印] 도체찰사 인성부원군 개탁 동부승지 심 (수결) 최원과 김천일의 군대가 외로운 강화 섬으로 물러나 있다고 하니 이는 용맹하지 않은 군병이다. 지금 믿을 것은 서울로 진격하는 계획을 하는 것이다. 오로지 권율이 군사를 이끌고 올라온다고 한다. 경은 지금 권율을 평택 지경에 주둔하게 하여 천 리까지 근왕하려는 군사를 중간에서 노쇠하게 만드니 실책이 매우 심하다. 설사 호서 일대를 보존한다고 해도 경기와 황해를 쓸어낼 책임은 장차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경은 경중과 완급의 마땅함을 깊이 생각하여 권율에게 신칙, 명령하여 빨리 어려운 곳으로 가게 하여 뒤처지는 잘못을 없게 하라. 1592년 11월 18일 [승정원인] [그림2] 1592년 11월 18일 도체찰사에게 보낸 전지 11월이 되어서 도체찰사인 정철이 전라 병사 최원, 의병장 김천일 군을 이끌고 강화에 들어가 서울을 수복하려는 적극적인 전략을 세우지 않는 것, 또 충청도를 보존하려고 전라 관찰사 권율 군에게 평택을 지키게 함으로써 경기나 황해의 왜적을 소탕하는 데에는 소홀하다는 질책을 받았다. 위 전지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이때의 동부승지는 심희수이다. 전지의 형식은 국왕의 말씀을 담당 승지가 받아 승지가 직접 써서 수결을 하고 [승정원인]을 찍어 발송한다. 다음 전지는 다음 해인 1593년 정월 12일의 전지이다. 명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승승장구하여 서울을 회복할 기세이니 그러한 원군을 보내준 황제에게 사은을 해야 하고 정철을 사은 정사로 임명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역마를 타고 행재소로 올라올 것이고 도체찰사가 해야 할 전라도, 충청도의 감사, 병사의 경기 근처에서의 지휘와 두 도의 일은 체찰 부사인 김찬에게 맡기고 올라오라는 것이다. 寅城府院君 開拆
同副承旨 沈 (手決) 天兵已於本月初八日 克復平/壤城 長驅掃蕩 朝夕收復/京都 即當恭謝/皇恩 今以卿充謝/恩正使 卿其乘馹 斯速來詣/行在 卿旣上來 則兩湖監司/兵使 皆在畿甸近處 兩道之事/ 極爲虛疎 副使金瓚率從事/官數人 仍留檢察事 有/旨 萬曆二十一年正月十二日 [承政院印] 인성부원군 개탁 동부승지 심 (수결) 명나라 군사이 이미 이번 달 초8일에 평양성을 회복하고 장구하여 소탕하여 아침저녁 사이에 서울을 수복할 것이다. 지금 황제의 은택에 사은을 하여야 한다. 지금 경을 사은정사로 임명하니 경은 역마를 타고 빨리 행재소에 오라. 경이 올라온 후에는 양호의 감사와 병사들이 모두 경기 근처에 있으니 두 도의 일은 매우 허소해질 것이다. 체찰 부사 김찬에게 종사관 몇 사람을 이끌고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검찰을 하게 하라는 국왕의 말씀이다. 1593년 정월 12일 [승정원인] [그림3] 1593년 1월 12일 인성부원군에게 보낸 전지 결국 위아래의 소통과 지휘에 있어서 원만하게 처리를 하지 못하였던 정철은 사은 정사에 임명한다는 구실로 해임되고 바로 행재소로 와서 사은 행차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위로는 행재소와 동궁의 지휘, 아래로는 전라, 충청도의 감사, 병사의 지휘에 있어서의 전략의 차이와 갈등을 해소하는 일은 전쟁 중에 가장 필요한 지휘 체계의 확립을 위하여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명군이 평양성 전투 한번 이겼다고 바로 사은사를 보내는 것도 특이한 일이었지만, 사은 행차에 대한 명나라 장군들과 조정에서의 입장 차이로 정철의 사은 행차는 사실상 거의 반 년 가까이 머뭇거리고 도강(渡江)을 하지 못하였다. 또 사은 행차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황제에게 주대(奏對)를 잘못한 일로 탄핵을 받아 송강은 더 이상 국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가 없게 되었고 강화에 물러나 있다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서양의 역사학자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역사 자료를 세 개의 층위 ‘진짜 역사(true history)’, ‘역사(history)’, ‘의사 역사(pseudo history)’로 구분하였다. 그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했을 때의 역사는 ‘진짜 역사’를 말한다. 역사에 ‘진짜 역사’와 ‘가짜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史料論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수장고나 서고에 현대인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죽어 있는 사료를 그는 ‘죽은 역사’, ‘가짜 역사’, ‘의사 역사’라고 한 것이다. 서고나 수장고에 죽어 있는 사료를 일깨워내서 ‘역사’, ‘진짜 역사’, ‘살아있는 역사’로 만드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했다. [백세보중]의 자료들은 송강 당대와 그의 아들 정홍명의 단계에서는 그냥 그 자체로 살아있던 역사였는데, 그 이후 동인과 북인이 집권을 하고 정치적으로 몰락한 동안 이 자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죽어있는 역사’로 내려가 있었다. 거의 멸실될 뻔 했던 역사가 그의 후손과 규남 하백원에 의하여 수습되어 새로운 ‘역사’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영원히 보존되어야 하겠다는 의미에서 [백세보중]이라는 이름으로 첩장되었다. 이 사료가 아직은 ‘살아있는 역사’ ‘진짜 역사’로 올라서지는 못하였다. 그냥 ‘역사’로 남아있는 것인데, 이러한 역사 자료 컨텐츠가 잘 활용되어 현대의 살아있는 역사로 되살아날 것을 기대한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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