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소영(素影) 박화성(朴花城)의 「하수도공사」와 목포 게시기간 : 2020-08-15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8-13 14:3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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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소설의 대모’라 불리는 소영 박화성(1903〜1988)은 1920년대 목포 문학의 1세대이자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였다.1) 「추석전야(秋夕前夜)」(1925)로 데뷔한 이래 장편 17편, 단편 62편, 중편 3편, 연작소설 2회분, 희곡 1편, 콩트 6편, 동화 1편, 두 권의 수필집과 평론 등을 제외하고도 모두 92편의 방대한 작품들을 남겼다.2) 여기서는 우리 근대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표적인 여성작가 박화성의 중편 소설 「하수도공사」(1932)를 통해 일제강점기 목포 시대상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른 의미에서 처녀작” 「하수도공사」 1931년 3월 29일 목포의 하수도공사장에서 큰 소동이 있어 났다. 그날 오후 1시경 하수도공사장에서 일하던 50~60명의 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혹은 부청으로 혹은 경찰서로 몰려가 청부업자 쓰보이 엔다이(坪井鹽大)에게서 3개월이나 밀린 삯을 찾아 달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 공사에는 2백 70여 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왔는데 그때까지 일반노동자들에게 한 푼의 현금도 주지 않고 실속 없는 전표만을 주어 그날 벌어 그날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3개월 동안이나 속여 왔던 것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흩어졌지만, 그나마 밀린 삯을 받아 보려고 남아 있던 노동자들이 마침내 참다못해 이런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3) 이듬해인 1932년 목포 출신의 동반자 작가 박화성은 바로 이 소동을 소재로 잡지 『동광(東光)』에 「하수도공사」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목포항구에 연래의 큰 숙제였던 하수도의 공사를 실업자 구제라는 미명 아래 시작한 것이 완전히 목적이 뒤바뀌어져서 청부업자들이나 자본주의 이익만 되고 있는 것에 분개하여 그것을 소재로 하여서 한 청년의 성장 과정을 곁들여 창작한 것인데, 직접 나 자신도 현장에도 출두하여 여러 가지를 취재도 하였거니와 이를테면 나로서는 매우 힘을 들인 백장이 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4)
라 하여 스스로 귀하게 여겼다. 1925년 단편 「추석전야」로 문단에 데뷔한 뒤 공백기를 거쳐 1932년에 동아일보에 장편 역사소설 『백화』를 연재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하수도공사」가 나왔다. 그런데도 작가 스스로 “다른 의미에서 처녀작”5)이라 하기도 하고, “「추석전야」 이후 첫 번 창작으로 「하수도공사」를 써서 발표하였는데, 내 생각으로는 모든 점에 있어서 이것이 비로소 처녀작이 아닌가 싶었다.”6) 라고 하듯이 「하수도공사」에 작가의 의도가 잘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달산 기슭에서 뒷개에 이르는 하수도 공사장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박화성은 목포의 생생한 현실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을 고스란히 그려냈다. 소설의 한 대목을 보자. “이 굉장한 하수도를 보는 자 돈과 문명의 힘을 탄복하는 외에 누가 삼백 명 노동자의 숨은 피땀의 값을 생각할 것이며, 죽교동의 높은 이 다리를 건너는 자 부청의 선정을 감사하는 외에 누구라 이면의 숨은 흑막의 내용을 짐작이나 하랴.”
목포 발전의 뒤안길에는 이런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제대로 대가도 받지 못하며 노동력을 갈취당했던 조선인들이 사는 거리에는 “이면의 숨은 흑막”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이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하수도공사」는 그래서 동반자 작가로서의 탁월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데뷔작 「추석전야」로부터 경향문학적 성격을 띠었던 박화성의 작품은 30대에 발표한 전 작품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경향성이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었다. 「추석전야」에도 목포에 최초로 건립된 방직공장 여직공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보여주면서 여성의 삶을 계급문제와 연결시켜 문제를 제기하였다. 처녀작을 쓸 무렵의 목포 이처럼 처녀작들을 쓸 무렵, “그 무렵의 사회 풍조는 전국에 형평운동이 일어날 만큼 약자를 옹호하는 대중운동이 맹렬하였다. 그리고 무산대중의 이익과 권리를 옹호하는 사회운동은 항일투사들의 지하조직의 일부를 계승하는 형태로도 이루어져 뜻있고 머리 좋고 애국심이 강한 청년일수록 이 운동의 주동자가 되어 있었다.”7) 그런 이유로 그녀의 창작 태도는 스스로 말하듯이 “「추석전야」로부터 「하수도공사」니 「비탈」이니 「신혼여행」이니 등등 모든 단편과 처녀 장편 『백화』까지가 모두 약자의 편에서 강자를 상대로 하여 생활을 이겨나가는 심리적이나 현실적인 사항을 다루어 펴나갔기 때문에 혹자들이 경향적인 작품을 쓴다는 말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나, 나는 다만 묵묵히 소신대로의 인생관에서 나의 의도하는 바의 창작 활동을 계속하여 왔던 것뿐이었다.”8)
「추석전야」의 일부를 보자. “목포의 낯[畵]은 보기에 참 애처로웁다. 남편으로는 즐비한 일인의 기와집이오 중앙으로는 초가와 옛 기와집이 섞여 있고 동북으로는 수림 중에 서양인의 집과 남녀학교와 예배당에 솟아 있는 외에 몇 기와집을 내놓고는 땅에 붙은 초가뿐이다. 다시 건너편 유달산 밑을 보자. 집은 돌 틈에 구멍만 빤히 뚫어진 도야지막 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한 빈민굴이다.”9)
“남편으로 즐비한 일인의 기와집”이 있는 거리는 바로 구 거류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마을을 말하고 “완전한 빈민굴”이라고 이름 붙인 유달산 밑은 다름 아닌 조선인 마을이었다. 차별이 심한 도회의 모습은 목포에서 낳고 자란 한 작가의 눈을 통해 이렇듯 뚜렷하게 드러났다. 특히 일본인 마을에 대한 조선인 마을의 차별은 “선일인(鮮日人) 차별의 거리”라고 이름 붙일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이런 차별이 야기하는 민족적 분노는 동반자적 경향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박화성은 궁핍한 조선 현실에 대응하여 계급의식을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형상화해 나갔다. 1930년대를 지나며 - 「헐어진 청년회관」 박화성이 동반자 작가로서 활동하게 된 데는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던 오빠 박제민과 1928년에 결혼한 남편 김국진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계급의식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김국진과 이혼하고 1938년 목포의 사업가 천독근과 재혼한다. 이후 한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했다가 해방 이후 다시 재개하였다. 이때는 동반자 작가의 전력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 대중소설을 썼다.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1930년을 경계로 목포는 경제적으로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른바 “시황이 상당히 번성하여 대중의 경제와 심리적 여유와 욕구가 생기고, 고상하고 가정적인 분위기가 넘칠 때”가 되면서 자본주의의 물신성이 전면에 드러났다. 이는 도덕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사람들은 겉으로 쾌락을 부정했지만 어느덧 편하게 느끼게 되면서 많은 윤리적 문제를 일으켰다. 근대문명에 대한 경탄, 그 안에서 돌출하는 쾌락, 이것이 쉬우면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시대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정치지형도 크게 달라졌다. 1936년 2월 16일에 목포협회(木浦協會)가 창립되었다. 당시 창립을 알리는 보도에 의하면 목포 조선인사회를 통제할 만한 사회적 의의를 가진 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겨, 유지 김성호, 김철진, 차남진 씨 등 다수의 회원이 참석하여 목포청년회관에서 목포협회 창립 축회를 개최한 것으로 되어 있다.10) 목포협회의 창립은 그때까지 도시 1세대들이 벌였던 진보적 청년운동이 기성의 유지활동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11) 1930년대의 ‘시민운동’으로 전환한 이들의 운동 방향은 박찬일의 「건전한 집합의 결성을 논함」이란 글에 잘 드러나 있다.12) 건전한 집합이란 곧 ‘청교구락부(淸交俱樂部)’를 말하며, 그 모임의 목표는 「사회를 위하야 공헌하자. 각자의 향상을 도모하자.」라는 강령에 담겨 있었다. 이는 「아니 먹고 무엇하리」주의의 세기말적 퇴폐적 생활에 대한 대안으로 제기한 것이었지만 이는 체제 내에 안착하는 운동이었다. 한편 박화성은 이러한 정치 지형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때는 목포에 노동총동맹이니 노동조합이니 청년회의 청년동맹이니 신간지회니 근우지회니 등등의 건실한 단체가 있어서 이들의 정기 혹은 임시의 집회가 있었음은 물론이요 이들 각단체의 주최로 문화적 의의를 띤 각종의 모임이 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은 목포주민으로서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발기하고 지지하던 인사들의 대다수가 영어(囹圄)의 인이 되며 혹은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기타는 주색잡도(酒色雜道)에 전전타락(轉轉墮落)하게 됨에 칠팔년전에는 문화도시의 열에 당당히 일석(一席)을 가지게 되던 목포는 근년에 와서 완연히 초토로 화하고 말었다.”13)
7~8년전 즉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중반이 이렇게 달라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곧 사회주의의 쇠퇴에 있다는 지적이었다. 목포 문화의 전환은 이렇듯 정치지형의 변화로부터 왔다. 진보세력은 감옥에 갇히거나 죽거나 아니면 타락했다. 반면에 보수의 세는 커졌다. 1930년 중반 이후 목포의 청년운동은 이처럼 노동·농민운동의 열기가 가시고, 이제 ‘시민운동’이란 틀 속에서 체제 내화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녀의 작품활동도 시들해졌다. 일제의 검열로 인하여 이미 「하수도공사」 같은 것은 거의 3분의 2가 삭제되기도 하였었다. 이런 억압적 분위기에 더해 1937년부터는 일제가 우리 말 말살정책을 폈다. 그러자 이에 항거하여 각필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1943년에 「헐어진 청년회관」이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쓰면서 목포 정치지형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헐어진 청년회관」을 『조선청년(朝鮮靑年)』 창간호에 게재하려 했지만 전문이 삭제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박화성의 첫 단편집 『고향 없는 사람들』(중앙보급소, 1947)의 자서(自序)를 보면, 이를 당초에 1937년경 출판하려 하였지만, 여전히 일제의 검열에 걸려 삭제되는 부분이 많자, 원고를 회수하였다가 해방이 되고 나서 비로소 출판하였다. 그만큼 일제에 저항하는 그녀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해방 후의 박화성 그녀 스스로 말하듯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 설정이 해방 전과 후가 많이 달랐다. “해방 전에는 누구나가 다 느낄 수 있으리 만큼 나의 주인공들은 나약자들이었다. 이를테면 소작인, 노동자, 직공 따위의 가난하고 권세도 없는 무력자들이었다. 이 나약한 주인공들은 그들의 상대자(지주나 자본주 혹은 공장주)의 모든 횡포와 억압을 강요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좀더 큰 설움, 즉 나라 없는 국민으로서의 이중의 모멸과 압박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에 자유를 잃은 그들의 저항의식은 철저한 민족적인 저항의식이 그 뒷받침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식민정치에서 벗어난 해방 이후에는 강력한 민족적 저항의식에서 풀려나는 반면으로 나의 주인공들은 휴머니즘에 좀더 감겨들기 시작하여 가족 관계의 모순이라던가, 윤리의 맹점 같은, 또한 인간성의 선악을 기조로 한 이른바 세정(世情)에 더 날카로운 관찰을 하게 됨으로써 인간의 심리와 감정의 오묘한 경지에까지 침투해 있는 것이다.”14) 일제강점기 동반자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던 박화성은 일제 강점으로부터 조국과 민족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사상을 기저로 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민족애의 다른 이름이었으나 해방과 6·25전쟁 등 분단과 엄혹한 냉전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거쳐이런 시대 사정이 해방 전의 기조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15) 그래서 휴머니즘과 세정을 찾는 데로 갔다. 하지만 바탕에 흐르는 뜻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밀톤의 말을 빌어 “참된 문학은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다. … 나는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려는 사람이며 또 꼭 사랑한다는 문학도이다.”16)라고 스스로 다짐하듯 썼다.
1) 김선태, 「제1장 목포문학」(『목포시사』②, 목포시사편찬위원회, 2017), 57〜58쪽.
2) 이 작품들은 2004년 서정자 교수의 놀라운 열정 덕분에 20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집대성되어 『박화성 문학전집』(푸른사상)으로 발간되었다. 박화성의 경이로운 작품세계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게 해 준 서정자 교수님의 수고에 감사와 함께 경의를 표한다. 3) 『동아일보』 1931. 4. 3. 4) 수상집 『추억의 파문』(한국문화사, 1968) 중 「처녀작을 쓸 무렵」(『박화성 문학전집』 19, 2004), 315쪽. 5) 박화성, 「약자의 편에 서서」(『현대문학』 116호 중 「나의 처녀작, 내가 고른 대표작」, 1964. 8.) 6) 주 4)와 같음. 7) 수상집 『추억의 파문』(한국문화사, 1968) 중 「처녀작을 쓸 무렵」(『박화성 문학전집』 19, 2004), 311쪽. 8) 위와 같음. 9) 「추석전야」(『朝鮮文壇』 , 1925. 1.), 95쪽. 10) 『매일신보』1936. 2. 27. 「木浦協會創立」 11) 『동아일보』1940. 2. 4. 「木浦靑年會館 基地를 商專昇格基金으로 木浦協會 總會서 決議」 12) 朴燦一, 「健全한 集合의 結成을 論함」(『湖南評論』 8월호, 1935), 34쪽. 13) 박화성, 「湖南少年少女雄辯大會를 보고」(『湖南評論』 10월호, 1935), 24쪽. 14) 「내 작품의 주인공들」(1968. 12), 『박화성 문학전집』 20(푸른사상, 2004), 260쪽. 15) 서정자, 「책머리에 : 박화성 문학전집 발간의 의의」(『박화성 문학전집』1, 푸른사상), 18쪽. 16) 박화성, 『고향 없는 사람들』(중앙보급소, 1947)의 「자서」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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