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조선 초기 충절인물 서재 송간의 신도비 게시기간 : 2020-06-20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6-19 10:5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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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단종(端宗, 재위 1452~1455) 임금 때 순무사(巡撫使) 송간(宋侃, 1405~1480)이 왕명을 받들고 지방에 내려갔는데, 돌아올 때는 단종이 이미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다. 송공은 단종이 유배된 영월(寧越)로 가서 복명하고 통곡하며 물러났다. 단종이 승하하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흥양현(興陽縣)으로 은둥하였다. 흥양은 호남의 큰 바닷가에 있는 땅끝이다. 식구들이 공을 찾아내어 집을 짓고 눌러앉자 공은 산봉우리와 물가를 떠돌며 온종일 통곡하다 돌아오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공을 미친 노인이라 칭하였고 스스로는 서재(西齋)라고 불렀는데, 공이 살던 곳이 지금도 서재동(西齋洞)으로 불린다. 공은 임종 시에 “나를 낙안(樂安)의 미원(薇原)에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 임금(정조(正祖)) 때에 와서 공의 충절을 표창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바로 관직과 시호를 추증한 것이다. 내가 왕명을 받들어 서재동의 옛 집터에 있는 사당에 가서 시호 ‘충강(忠剛)’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고을 선비들이 연시례(延諡禮)와 제사를 준비하면서 나에게 축문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昔在端宗朝 巡撫使宋侃 奉命出使 及還 端宗已遜位 宋公復命於寧越 仍痛哭而出 及端廟升遐 服衰三年 逃之興陽地興湖南大海邊地盡處也 其家人尋得之 仍家焉 放浪於山巓水厓 或慟哭終日而歸 人目爲狂老 自號西齋 至今號其遺址爲西齋洞 其將死 遺命曰 葬我於樂安薇原 至當宁朝 表忠奬節 靡有餘憾 乃贈職贈謚 余奉命宣忠剛謚于西齋洞遺基之祠 其翌 鄕儒將行禮成祭 請祝文於余)1)
1797년(정조 21, 정사) 2월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 1741~1826)가 지은 축문과 그 제목이다. 어명을 받들고 흥양, 지금의 고흥에 있던 송간의 옛 유허에서 연시(延諡)를 할 때 선시관(宣諡官)으로 가서 고을 선비들의 청에 따라 지은 것. 당시 윤기는 이조의 낭관이었다. 연시(延諡)란 정삼품 통정대부나 절충장군 이상의 관직에 있던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살았을 때의 인품이나 학식, 충절 등을 고려하여 시호를 내린다. 이 때 시호를 받들고 나온 선시관이 그 사람의 본가에 나가게 되면, 시호를 받는 사람의 신주를 모시고 나와 의식을 행하고 맞아들이게 됨. 또한 그 본가에서 선시관에게는 예폐(禮幣)를, 그 따라온 사람들에게는 행하(行下)를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 어쩌다 가세가 빈한하여 연시를 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왕명으로 전곡을 내리거나 관직에 임명하는 등의 특전을 베풀어 행할 수 있게 하였다. 연시를 하지 못한 경우는 신주에 그 시호를 추가로 기록할 수 없었다. “서재동(西齋洞)”은 “마륜촌(馬輪村)”으로 보인다. 윤기의 시에 “到興陽馬輪村 宣忠剛公宋侃諡 有吟[흥양의 마륜촌에 이르러 충강공 송간의 시호를 선시하고]”이라 하여 “마륜촌” 땅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당시 전라도 흥양현 대강면(大江面) 마륜.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이다. 동강면은 1914년에 대강면과 동면이 합해진 지명이다. 낙안(樂安)의 미원(薇原)은 어디일까. 우선 낙안은 순천과 보성, 흥양 사이에 위치했던 고을이다. 백제시대 이래 독립된 고을로 읍격이 유지되었으나 1908년 낙안군은 폐지되고 절반은 순천에, 나머지는 보성에 나뉘어 속하게 된다. 남면과 고읍면은 보성에 편입되는데 지금의 보성군 벌교읍이다. 남면 원동(院洞)이 미원(薇原)으로 보인다. 그곳에 서재 송간의 묘소가 있어서이다. 유언으로 묻어 달라 한 곳. 1914년에 원동은 금평(金坪), 척령(尺嶺), 신기(新基) 등과 함께 척령리로 합해진다. 원동은 백이산(伯夷山) 줄기와 연결된다. 이 백이산은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한다. 송간은 새 왕조의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를 캐 먹다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처럼 죽어서도 단종에 대한 절개를 변치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여 미원에 묻히고자 한 것. 윤기의 시에서도 읽힌다.
보성군 벌교읍 척령리 원동마을. 백이산과 제석산으로부터 뻗은 산줄기가 동쪽의 벌교천까지 닿으면서 생긴 부용산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동쪽에는 벌교천, 남쪽에는 천치저수지에 수원을 둔 칠동천이 여자만으로 흐른다. 마을 높직한 곳에 충강공 송간(宋侃, 1405~1480)의 묘소, 바로 곁에 재실인 영보재(永報齋)가 있다. 5칸 팔작 지붕집인데 결구수법이 우수하고 상량문과 중건기 등 기록자료도 잘 남아 있다. 영보재 입로에 있는 송간의 신도비는 항일지사로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연재 송병선(1836~1905)이 비문을 지었다. 화서학파의 유학자이자 태인의병 주도자 면암 최익현(1833~1906)이 비문 글씨를 썼고 제액 전서는 윤헌(尹瀗, 1841~?)이 썼다. 1919년에 다시 세웠다. 그 명(銘)에 의롭고 아름다운 행적을 읊었다. 거룩하도다 충강이시여. 단종 유신으로 순무하다가 복명하고 해빈에 둔적하였으며 상왕이 승하하시자 복상했도다. 굳세도다 인륜을 붙잡았으니 생사의 길은 다르나 의는 육충과 같았도다. 백세에 우러러 보는 바는 고절 청풍이로다. 임금께서 납시어 느낌을 일으켜 포숭이 이에 지극했으니 그의 위적은 해와 별 같았기에 나의 명은 부끄럽지 않도다.(允矣忠剛 莊陵遺臣 巡撫復命 遜跡海濱 泣弓服喪 凜乎扶倫 生死途殊 義同六忠 百世攸仰 高節淸風 聖作有感 襃崇乃極 炳如日星 我銘不怍)3)
묘소에는 또 다른 묘도문자가 보인다. 1919년 3월에 묘소 동쪽에 세운 묘비이다.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이 비문을 지었다. 홍주출신의 항일의병장이다. 비문 글씨는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 1853∼1939), 제액 전서는 송용재(宋龍在)가 썼다. 앞면이 봉분 쪽을 향해 있고 비몸은 정방형이며 가첨석 지붕은 이중 옥개석 형태라는 점이 특이하다. 충강공의 묘소는 1685년(숙종 11)에 8세손 송문상(文祥)이 위치를 확인한 뒤 제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광자 박사형(淸狂子 朴士亨, 1635~1706)의 『청광자집』「연보」(을축)에 기록된 "송충강공 간의 묘도제문을 지었다. 공은 단종조 생육신의 한 사람인데 그 묘가 낙안군 미원(薇院)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후손들이 흩어져 영락(零落)하는 바람에 문헌을 고증할 수가 없어 묘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공의 8세손인 송봉은(鳳隱), 송문상이 처음으로 그 실묘(實墓, 眞蹟)를 찾아내서 산소를 새롭게 단장하고 제문을 부탁하였다." 는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묘비문을 보면, 송간의 충절과 백이산 밑에 묘소가 있게 된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즉서재 충강공이 임종시 자식들에게 유언하여, 낙안군 백이산 아래 미원(薇院) 언덕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그런데 1818년(순조 18)에 단종이 복위되자 그 해 10월에 홀연히 공의 묘앞에 두 그루의 고사리가 돋아나 있었으니, 해마다 그러기를 6년간 계속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며 공의 충성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바라 하였다.(考終于西齋遺命 葬于樂安郡伯夷山下 薇院寔面午原也 純廟戊寅 莊陵復位 是歲十月忽 有雙薇生于公墓前 逐歲必然者 凡六年矣 而聞者驚異以爲忠誠所感) 송간의 신도비와 묘비, 그리고 영보재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80호이다. 3․1운동이후 1920년대 초 충절인물 추숭사업의 전개과정과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의미있는 유산이다. 특히 항일지사인 김복한, 송병선, 최익현 등의 비문과 글씨를 통해 그들의 항일의지가 반영된 신도비와 묘비는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그림 1] 송간 신도비 [그림 2] 송간 묘비 [그림 3] 묘비 탁영(앞면) [그림 4] 송간 시호 교지 1) 『無名子集』 文稿 册四(한국고전번역DB[http://db.itkc.or.kr])
2) 『無名子集』 詩稿 册三 3) 송병선, 西齋宋公[侃]神道碑銘[並序],『淵齋先生文集』 卷之三十一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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