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서남해 섬들의 허브, 압해도(押海島) 이야기 게시기간 : 2020-06-27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6-25 10:5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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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해(押海), “바다를 누른다.” 압해도의 압해(押海)란 “바다를 누른다.”는 뜻이다. “바다를 맑게 한다.”는 ‘청해(淸海)’나 역시 “바다를 누른다.”는 ‘진해(鎭海)’나 모두 같은 뜻이다. ‘청해’는 9세기에 동아시아 해상을 제패한 장보고가 그의 근거지였던 완도를 그렇게 불렀고, ‘진해’는 16세기 말에 침략세력인 일본 수군을 격퇴한 이순신이 머물렀던 여수의 좌수영을 ‘진해루(鎭海樓)’라 불렀던 데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진해는 해군기지가 있는 곳의 지명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압해도는 장보고의 ‘청해’, 이순신의 ‘진해’와 비교될 수 있는 한국 해양 역사의 명소라 할만하다. 압해도의 ‘압해’란 이름은 통일신라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압해도는 백제 때에 아차산현(阿次山縣)이었다. 그 후 신라가 통일하면서 아차산군(阿次山郡)으로 승격되었다가 경덕왕 때 압해군으로 개칭되었다. 그리하여 고려 때까지 서남해 도서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역할하였다. 백제시대 아차산현의 현치(縣治)는 오늘날 압해도 대천리 일대로 비정되고, 통일신라 이후 아차산군 즉 압해군의 군치(郡治)는 신룡리 신촌마을 고읍촌 일대로 비정된다.
서남해 방어의 거점, 압해도의 송공산성 송공산성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압해도의 중간 지점에서 다시 서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부분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해발 234m 송공산의 정상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산 정상에 소형의 석루(石壘)와 우물이 있었다. 현재 송공산성은 대부분 붕괴되어 원형을 찾아보긴 어렵지만, 군데군데 석축의 흔적이 분명하여, 성의 규모를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산성의 둘레 길이는 대개 250여m 정도이고, 우물이 남아 있다. 그리고 산성의 내부에서 토기와 도자기, 그리고 기와편들이 수습되고 있다. 송공산성은 그 전승대로 백제시대의 방어시설로 처음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수습되는 유물들이 대개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것들로서 고려시대까지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송공산성은 2000년 1월 31일 신안군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송공산의 정상에 자리한 송공산성에 오르면 북쪽, 서쪽, 남쪽의 삼면으로 바다가 막힘없이 조망되고, 동쪽으로는 고읍촌과 흙성안이 내려다보인다. 따라서 송공산성은 바다의 동정을 살펴 이를 고읍촌의 군 치소와 흙성안의 토성에 알려주는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송공산성-흙성안 토성-고읍촌의 군 치소’로 이어지는 방어시스템은 신라 말에 압해도를 근거로 하여 활동했던 해상세력 능창(能昌)에 의해서 운용되었을 것이고, 고려 말에 압해도를 공격한 몽골군을 격퇴할 때도 기능했을 것이 분명하다. 1,500년 전에 중국으로부터 송씨 성을 가진 장수가 난파당하여 송공리에 들어와 살면서 송공리 앞 바다에 있는 역도란 섬에서 말을 기르며 송공산과 매화도의 산을 말을 타고 날아다녔다는 설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수달장군 능창(能昌)의 고향 완도에 장보고가 있었다면, 압해도에는 능창이 있었다. 압해도는 ‘포스트 장보고’를 꿈꾸던 해상세력 능창의 거점이었다. 능창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사』에 전해 온다. “드디어 광주 서남계(西南界)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첩자를 적의 경계에 놓았더니 압해현(壓海縣)의 적수(賊帥) 능창이 해도(海島) 출신으로 수전(水戰)을 잘하여 수달(水獺)이라고 하였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드디어 갈초도(葛草島)의 소적(小賊)들과 결탁하여 태조가 이르기를 기다려 그를 맞아 해하고자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적도가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힘을 아우르고 세력을 합하여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니 헤엄을 잘 치는 자 십 여인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작은 배로 밤중에 갈초도의 나룻가에 나아가 왕래하며 일을 꾸미는 자를 사로잡아서 그 꾀하는 일을 막아야 될 것이다.’라 하니 여러 장수들이 다 이 말을 따랐다. 과연 조그마한 배 한 채를 잡아보니 바로 능창이었다. 궁예에게 잡아 보내었더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말하기를 ‘해적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목 베었다.”1)
이 기록은 912년에 능창이 압해도를 근거로 왕건과 대립하다가 결국 왕건에게 잡혀 제거되는 과정을 전한다. 능창이 왕건과 대립했다고 해서 그가 견훤의 부하였던 것은 아니다. 능창은 견훤과도 대립했던 압해도의 독자적인 해양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왕건이 능창에 대해서 “승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라 하였고, 궁예가 “해적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라고 과장된 언사로 호언한 것을 보면, 그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능창을 ‘적수(賊首)’ 혹은 ‘해적의 우두머리’라 표현하고 있고, 또한 “수전을 잘하여 수달이라고 하였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드디어 갈초도의 소적들과 결탁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능창은 서남해 도서해양세력들을 결집하여 강력한 집단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남해지역의 해양패권을 장악했던 장보고가 841년에 암살당한 후 반세기가 지났을 때, 장보고를 대신하여 서남해지역의 해양패권을 장악하고자 쟁패가 일어났는데, 이때 능창은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왕건 및 견훤 등과 맞서 싸웠던 유력한 독자적 해상세력이었다.
바다의 길목, 고이도(古耳島)가 있는 곳 압해도의 북쪽에 인접해 있는 고이도는 서남해 연안항로의 요충지였다. 고이도와 맞은편 운남반도 사이에 나 있는 바닷길은 압해도 가룡리 앞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오른편(동남쪽)으로 난 바닷길은 압해도의 동안(東岸)을 따라서 영산강 하구로 들어가는 길이고, 왼편(서남쪽)으로 난 바닷길은 압해도의 서안(西岸)을 따라서 흙성안 토성과 송공산성을 지나 서쪽으로 신안의 여러 섬을 거치고 흑산도를 경유하여 중국 동남부에 이르는 해로로 이어진다. 이곳 고이도에는 이렇듯 중요한 바닷길을 감시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왕산성도 있다. 고이도의 바닷길에는 역사적 사연도 많다. 왕건이 진도(珍島)를 수중에 넣고 고이도(皐夷島)의 항복을 받아낸 연후에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덕진포에서 견훤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다. 고이도를 장악함으로써 왕건은 영산강으로 진입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에 견훤은 직접 진두지휘하여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함으로써 왕건이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세력과 연결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난관에 봉착한 왕건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을 써서 견훤의 전함을 거의 전소시키고 후백제군 500여 명의 목을 베는 완승을 거두었다. 견훤은 작은 배에 갈아타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고려사』에서는 이 해전의 결과에 대해 “삼한 땅의 태반을 궁예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평하였다. 이처럼 고이도는 해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왕건 이전에는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이 845년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는 길에 고이도(高移島)에 정박했었다. 그리고 조선전기에 고이도의 맞은편 해안인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에 다경포진(多慶浦鎭)을 설치했다. 이 또한 모두 고이도가 역대 연해 교통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다.
몽골군을 물리친 압해도인들의 투혼 1231년(고종 18) 이후 막강 군단을 자랑하는 몽골군이 고려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20년 넘게 버텨내고 있었다. 고려가 이처럼 버틸 수 있었던 그 힘의 원천은 바닷길을 사수한 고려의 해양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잘 알다시피 강화도로부터 진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이어지는 바닷길을 따라 항전을 거듭했던 삼별초가 이를 대변한다. 이를 간파한 몽골이 바닷길을 차단하기 위해 서남해 해로의 요충지인 압해도 공략에 나섰다. 1256년 당시 몽골의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는 전함 70척이라는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직접 압해도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다음 기사에 나타나듯이 압해도의 대몽골 항쟁은 매우 치열했다. “낭장 윤춘(尹椿)이 몽골군으로부터 돌아와서 … 말하였다. ‘… 차라대(車羅大)가 일찍이 주사(舟師) 70척을 거느려 성하게 기치를 늘어세우고 압해를 치려하여 저와 관인을 시켜 다른 배를 타고 싸움을 독려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은 대포 두 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두 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저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고 하고, 다시 배를 옮기어 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곳곳에 대포를 비치하였기 때문에 몽골 사람들이 물에서 공격하는 모든 준비를 격파하였습니다.’”2)
이 기사는 몽골에 투항했다가 돌아온 윤춘이 증언한 것이다. 즉 몽골의 장수 차라대가 70척이라는 대규모의 함대를 조직하여 압해도를 치려 했지만 압해도민의 치열한 항쟁에 직면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차라대가 이처럼 대규모의 병력으로 압해도를 공격하려 했던 것은 그만큼 압해도가 서남해 도서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압해도민들은 큰 배에 대포 2대를 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섬 곳곳에도 대포를 비치하여 몽골의 압해도 공격을 결국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새삼 우리 대포의 위력을 확인하게 하는 장면이다. 이는 곧 강화도 최씨정권의 각별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당시 압해도의 군세(郡勢)가 그만큼 막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몽골군이 넘봤던 바로 그곳에 1,580m짜리 압해대교가 들어섰다. 섬 주민들에게는 더없이 큰 선물이었고 육지 사람들에게도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저 기뻐하기보다 다리가 놓인 그곳에 몽골군을 물리친 압해도민의 투혼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더욱 큰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압해’, 천사대교와 함께 서남해 섬들의 허브가 되다. 압해도는 목포와 연결된 압해대교 뿐 아니라 무안국제공항으로 통하는 김대중대교도 있어 이미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거기에 이어 지난 2019년 4월 4일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총 길이 7,224m의 천사대교가 개통되었다. 인천대교, 광안대교, 서해대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긴 다리이다. 천사대교가 개통되면서 신안의 네 개 섬(암태도,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이 한꺼번에 육지와 연결되었다. 압해도는 이제 서남해 섬들의 허브가 되었다.3) 이렇게 압해도는 압해대교, 그리고 천사대교를 통해 섬과 육지를,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서남해 섬들의 중심이 되었다. 비비각시섬의 전설에 따르면 압해도는 옛날 하나의 섬나라였다고 한다. 그 섬나라가 ‘압해’라는 말뜻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여 서남해의 섬과 바다를 관통하는 허브로 재탄생하였다. ‘압해’의 의미가 이렇듯 다리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었으니, 그 이름이 신묘하다. 1) 『高麗史』 世家 卷1 太祖 1
2) 『高麗史節要』 卷17, 高宗4 高宗 43年 6月條 3) 『신안군 천사대교 STORY BOOK』 (글 강봉룡, 신안군·도서문화연구원, 2019)에는 압해도를 포함하여 천사대교의 개통으로 육지와 연결된 암태도,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 등 5개 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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