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구암사와 선암사의 양대 강맥을 계승한 영호정호(석전 박한영) 스님을 기리며 게시기간 : 2020-06-30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6-29 10:3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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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산 선운사 약속된 그 날이 왔다. 장마비가 올라오는 날이다. 거사 두 분과 함께 이심전심으로 고창으로 달린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도솔산 선운사에 도착했다. 선운사는 지금은 당당한 본사 절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사찰령」에 의해 장성 백암산 백양사의 말사이기도 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 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 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고 한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 연기설화이다. 검단 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1. 고창 선운사 또한 이 지역에는 전쟁 난민이 많았는데, 검단 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 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검단 스님이 사찰의 창건주임과 함께 사찰의 물적 토대를 짐작할 수 있겠다. 2. 구암사와 선암사 양대 강맥을 계승한 영호정호(映湖鼎鎬) 선운사 입구 향우측에 부도밭이 있다. 선운사와 인연이 깊은 큰스님들의 행적비와 부도가 가지런히 모셔져 있다. 완당학사(阮堂學士) 김정희(金正喜)가 짓고 쓴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를 비롯하여 화엄종주(華嚴宗主) 대강백(大講伯)들의 비가 눈길을 잡아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화엄종주영호당대종사(華嚴宗主映湖堂大宗師碑)」가 특히 그러하다.
2. 선운사 부도밭 영호당(映湖堂)은 영호정호(映湖鼎鎬) 큰스님이다.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으로도 널리 알려진 스님이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근대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큰 인물이다. 영호당(映湖堂)은 순창 구암사에서 20대의 나이로 설유처명(雪乳處明)의 법맥을 이음으로써 백파긍선(白坡亘璇)-설두유형(雪竇有炯)-설유처명(雪乳處明)으로 이어지는 선맥(禪脈)과 강맥(講脈)을 이었으며, 20세기 초반에 화엄사의 혜찬진응(慧燦震應), 선암사의 금봉기림(錦峰基林)과 함께 한국 근대 불교계의 삼대강백(三大講伯)으로 불리우는 큰스님이다. 그는 서울 개운사에서 강석을 펼쳐 자칭 “南岳震 北廓鎬”(『石林艸』 46쪽, 「震應上人還曆辰序」) 라 하였다. 나중에 “북한영 남진응”이라는 유명한 말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3. 화엄종주 영호정호 대종사 비와 부도 그는 고등불교강숙 숙사(1914), 중앙학림 강사와 교장(1915-1922), 중앙불전 교장(1930-1938)을 역임하면서 근대불교학의 주춧돌을 놓았으며, 1926년에는 전통강원의 부활을 위해 서울 개운사 대원암 강원의 강주를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였다. 또 1930년대에는 중앙불전과 개운사 강원에서 여러 시인을 배출하였다. 조종현·서정주·신석정·김어수·김달진·조지훈 등이 그들이다. 그의 승려로서의 삶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칠순을 맞이한 아침에 지은 자서전적 회고시 「희조자술구장(稀朝自述九章)」(『석전시초』, 동명사, 1940)에 이력과정과 범맥의 전수를 말하고 있어 주목된다. 경인년 봄 저물어갈 때
운문암으로 환응 스님 찾아뵈었네 한 여름 내내 능엄경 읽으며 쌍계루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네 8월 되어 조계를 건너니 세 노인 어슷비슷 앉아계신데 경운 스님이 강석의 좌주를 맡고 뛰어난 후학들 나라히 앉아 연찬하더니 제봉 대 금봉이요 재민과 찬의 스님 법석의 으뜸으로 여겼으니 문체의 아름다움 일시에 빛났었네 진응 스님 말석을 차지했더니 지금은 화엄사에서 강석을 펼치시네 그는 21세(1890)에 백양사 운문암의 환응탄영에게 사교과를 수학하고, 23세(1892)에는 선암사 경운원기에게 대교과를 졸업하고 大選(대선) 법계를 품수하였다. 같은 해 은사 금산 스님을 따라 금강산에 갔는데, 24세(1893)에 금산이 입적하자 석왕사 신계사 건봉사 명주사 등지에서 경학을 연찬하거나 안거하였다. 26세(1895)에는 선암사에서 중덕의 법계를 품수하고, 가을에 순창 구암사의 설유처명에게 불법을 인가 받고 그곳에서 개강하여 학인들을 가르쳤다. 27세(1896)에는 백양사에서 대덕 법계를 품수하고, 구암사에서 설유에게 건당하고 염불과 율장 및 화업을 수학하고 법통을 이어받아 개강했다. 스님이 구암사에서 건당하고 개당함으로써 설파상언-백파긍선-설두유형-설유처명으로 이어지는 18-19세기의 호남의 대표적인 강백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설파상언은 화엄학에 정통했으며, 백파긍선은 『작법귀감』을 편술하고 『선문수경』을 편술하였다. 19세기 전반의 선 논쟁의 중심에 있던 구암사의 학문적 전통을 훈습하고, 화엄학과 계율학에 대한 큰스님들의 지식을 체득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와같이 순창 구암사 강학의 전통을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선암사의 강맥도 동시에 계승한 인물이었다. 19세기 선암사의 강맥은 백파긍선(1767-1852)의 수제자인 침명한성(枕溟翰醒, 1801-1876)을 이은 함명태선(涵溟太先, 1824-1902)- 경붕익운(景鵬益運, 1836-1915)- 경운원기(擎雲元奇, 1852-1936)- 금봉기림((錦峰基林, 1869-1916)으로 선암사 대승암(남암) 출신의 일문(一門) 사대강사(四代講師)로 계승되고 있었다. 선암사의 함명태선·경붕익운·경운원기 강백이 동시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제봉(쌍계사)·금봉(선암사)··재민·찬의(송광사)·진응(화엄사) 등과 함께 동문수학한 사실에서 선암사의 강맥도 함께 사자상승(師資相承)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3. 영호당의 저술 영호당은 전통적 시문집 성격의 『석림시초(石顚詩鈔)』와 『석림문초(石顚文鈔)』를 비롯한 단행본 형식의 역서와 저술을 포함하여 9책의 단행본류 저서와 각종 신문잡지에 발표한 것으로 100여 건이 넘는 논설과 수필을 남겼다. 『석림시초』는 스님이 평생 지은 한시 중에서 약 600여 수를 가려 뽑아 최남선의 건의와 주선으로 1939년 발간한 한시 선집이다. 이것은 주로 기행시를 묶은 것으로 국토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형상화한 것이다. 『석림문초』는 스님 사후 신석정 등이 그의 한문 산문 중에서 전할만한 것을 모아 1962년에 출간한 것이다. 이것은 「석림수필(石林隨筆)」과 「석림초(石林草)」로 구성되어 있다. 「석림수필」은 주로 불교와 시문(詩文)에 관한 스님의 견해를 자유롭게 펼친 글이다. 스님의 박식함과 실사구시적 성향을 살필 수 있는 의미있는 자료이다, 「석림초」는 근대를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스님들의 비명이나 행략과 진찬, 사찰의 중창건기·상량문·문집의 서발 등을 모은 것이다. 한국 근대 불교사를 재구성 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자료집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영호당 저술의 특성은 매우 박학다식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불교학에 대한 태도나 의식 등은 근대불교학적 속성이 강하다고 파악된다. 4. 영호정호(석전 박한영) 스님을 기리며 영호정호(석전 박한영) 스님은 선운사를 출가본사로 한 대강백이었다, 영구산 구암사와 조계산선암사의 양대 강맥을 계승한 큰스님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교정으로 추대되었으며, 해방 직후 혼란기에는 대한불교조계종의 교정을 지낸 한국 불교계의 거목이었다. 마지막에는 정읍 내장사에서 열반에 드신 큰스님이었다. 긔의 부도는 인연이 깊은 고창 선운사와 순창 구암사에 모셔져 있다. 영호당 석전 큰 스님의 행적을 살피며 그를 기린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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