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수많은 방울들이 끊임없이, '沙中 萬鈴' - 장성 방울샘 게시기간 : 2020-07-04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0-07-03 14:5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
||||||||
-자연사유산과 마을 공동체문화가 어울어진 복합유산- 물 색깔의 적백(赤白)으로써 세상일을 징험하고 청탁(淸濁)으로 한 해 일을 점쳤다.[以水之赤白 驗世事 淸濁 占年事] 재난이나 전쟁 등 나라가 어려울 때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 ‘동네 샘의 물이 누렇게 변한다.’ 이따금씩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자연현상이 아닐까. 신령스런 영험일까. 누군들 궁금해 한다. 현장은 어쩔까. 기록은 있을까. 언제부터 전해진 이야기일까. 수많은 방울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세상일에 따라 적백으로 변했다는 우물이 있다. '沙中 萬鈴', ‘水之赤白’. 장성의 방울샘이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86호. 장성 오동촌 마을 윗똠의 ‘방울 시암’[鈴泉] 방울샘은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 마을 윗똠에 있다. 호남정맥의 줄기인 봉황산[황새산]과 제봉산을 사이에 두고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이다. 둘레 15m, 높이 2m, 수심 1m의 타원형으로 곁에 나이가 300년이 넘는 노거수가 있다. 이 샘은 물이 방울처럼 솟아 오른다하여 '방울샘' 또는 '방울 시암(鈴泉)'이라 부르고 있다. 이 ‘鈴泉’에서 유래하여 행정지명 ‘영천리’가 되었다. 오동촌은 400여년 전에 입향하였다고 하는데 영천리고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28호]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촌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경명 신도비(전라남도 기념물 제241호)도 부근에 있다. 영천리는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장성부 읍동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성면에 속하게 되었는데 읍동면(邑東面)의 하오리, 산직리, 청운리, 월평리 일부와 남삼면(南三面)의 장기리 일부, 읍서면(邑西面)의 신오리, 외기리, 월봉리의 일부지역을 합해서 ‘영천리(鈴泉里)’라 하였다. 이 샘은 500여년전 용이 승천한 쏘(沼)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동네 공동 우물이었다. 예로부터 신비스런 징후를 나타내며 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는 영천(靈泉)으로서 동학농민혁명전쟁과 6·25한국전쟁, 천재지변 등이 일어날 때에는 황토물이 솟아 나오고, 대풍년 같은 국가적으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쌀뜨물 같은 흰 물이 나왔다고 전한다. 샘 안에 물고기는 모두 오른 눈이 멀었다 방울샘에 대하여 지리지로서 맨 먼저 기록이 확인되는 것은 『대동지지』(1865)인데 소재처만 적고 있다. 이어 관찬 『호남읍지』에 포함된 『장성부읍지』 2종(1872년, 1899년)에는 ‘방울처럼 솟아 오른다’는 샘의 현상을 말하면서 영험과 이적이 있고 기우제를 지낸다는 내용이다. 이 세 기록은 산천 또는 산수조에서 나타난다. 1927년에 간행된 『장성읍지』에는 좀더 자세한 내용이 이적조(異蹟條)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처럼 방울샘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리지나 읍지류 등 공공 기록물에도 등재된 문화명소이다. ① 영천 : (장성부)동쪽 5리에 있다.(鈴泉 在東五里) (『大東地志』 長城 山水條, 1865년) ② 영천 : (장성)부(府)의 동쪽 5리에 있다. 물이 솟아 나오는 것이 방울과 같은데 영험과 이적이 자주 있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鈴泉 在府東五里 湧水如鈴 頻靈異 當旱祈雨祭) (『長城府邑誌』 山川條, 1872년경, 규장각 12175 ; 1899년, 규장각 10782) ③ 영천 : 장성면 영천리에 있다. 샘의 맥이 드러난 곳의 모래 가운데에서 수많은 방울들이 떠올라 끊이지 않으니 이름 부르게 되었다. 물 색깔의 적백(赤白)으로써 세상일을 징험하고 청탁(淸濁)으로 한 해 일을 점쳤다. 샘 안에 물고기는 모두 오른 눈이 멀었다. 비록 다른 물에 있던 것도 한번 이 샘에 들어오면 또한 눈이 먼다. 사람들이 만일 고기를 잡으면 반드시 재해를 받게 되는 까닭에 서로 경계하고 침범하지 않았다.(鈴泉 在長城面鈴泉里 泉脈散出 沙中萬鈴 浮上不絶 故名之 以水之赤白 驗世事 淸濁 占年事 泉中魚族盡盲右目 雖他水所産 一入是泉則亦盲 人若釣取 必受災害 故相戒不侵 (『長城邑誌』 異蹟條, 1927년) 『봉서일기(鳳棲日記)(변상철,1818~1886)』1876년[병자] 5월 21일 기록에 “영천에서 기우제를 행한다고 들었다. 당질 서용(瑞容)이 대축으로 입거했다[聞行祈雨祭於鈴泉 堂姪瑞容 以大祝入去]”는 기록이 있다. 그 다음날 기록에 기우제문이 약술되어 있는데 대령(大鈴)과 소령(小鈴)이 발원하는 영천(靈泉)이 기우를 비는 내용이다. 장성 수령이 지었고 저녁에 비가 내렸다고 적고 있다. 방울샘의 영험을 알 수 있다.[二十二日 得見祈雨祝文, 略曰, 曰惟靈泉, 在邑之東。 大鈴小鈴, 發源于中。 飮或痊痾, 灌之蒙利。 自古有驗, 水哉神異。 今玆酷旱, 原隰俱焦。 民久惜乾, 穀則就枯。 朝陽旣杲, 夕雲未合。奈此三農, 危若一髮。材墟人劉, 誰修古甃。 伏惟泉靈, 繄龍與謀, 俾自今夕, 有雨滂沱。本倅所製也, 夕雨洽鋤。] 방울샘의 형성, 특이한 지질구조와 석회암의 화학적 변화 방울샘이 위치해 있는 주변지질은 석회암과 규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회암은 광의의 편암류속에 흑색천매암, 녹색편암 과 미량의 탄질물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이들 암석들은 북동 남서 방향의 측방연속성을 갖고 발달되어 있다. 방울샘은 이들 암석중 석회암지대에 해당된다. 이곳 석회암은 화학적으로 방해석(CaCo3)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그네슘(Mg)이나 철(Fe)등의 불순 광물 성분들이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방울샘 주변에 석회동굴이나 소규모 탄광의 존재는 주변 구성암석들을 말하여 주고 있다. 방울샘은 지층 구조상 지질 습곡대에 의해 지표 가까이에 노출된 지하 대수층이 지표에 가장 근접한 지역 위에서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곳 석회암들은 층리들이 여러 방향의 복잡한 습곡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 가운데 최고의 향사방향에 방울샘이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위치와 석회암의 화학적 변화가 오늘까지 방울샘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석회암층 내에 집적된 철 성분들이 대수층 내에서 수시로 풍화되면서 가끔씩 적색의 물로 변화시킨게 아닌가 보고 있다. 방울샘은 자연 현상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은 특이한 지질구조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1927년 『장성읍지』에 “沙中 萬鈴”이라는 내용이 보이고 『한국지명총람』(1982)장성군편에도 “모래땅 속 여기저기서 물이 솟아나 방울꽃과 같다함”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바닥면은 모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뭄에도 수량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하며, 14~15도의 수온이 유지되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 방울샘의 수축, 주민들의 생활 문화 공간 방울샘은 193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했다. 샘 옆에 수축내용을 새긴 빗돌이 있다. 당시 참여한 오동촌의 대표는 나정숙과 김규현(1892~1946)이었다.[鈴泉修築實蹟 / 工事主催監督 梧桐村 / 代表者 羅正淑 / 金奎炫 / 工事費後援 長城面 / 面長 邊昇基 / 驛前有志 / □□□□□□ / □□六年五月五日 竣工] 방울샘은 자연현상이면서도 주민 생활이나 공동체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많은 영험과 이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인식되어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샘제를 통하여 마을제의 신체로 형상화 되는 등 생활공간이자 신성공간으로서 문화적으로 접맥되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 공동제의로서 샘제[鈴泉祭]와 당제를 지내 왔다. 샘제는 매년 정월보름에 지냈다. 방울샘과 두 곳의 당산나무 등 세 곳이 제를 모시는 신체(神體)이다. 제를 마치고나면 마당밟기 농악풍물굿을 하면서 온 동네 축제가 된다. 동네 입구에 있었던 방구다리에서 연원하여 방구다리 농악이라고 한다. 방울샘은 지하에서 물이 방울처럼 솟아 오른다하여 방울샘으로 불리웠다. 지질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방울샘은 지층 구조상 지질습곡대에 의해 지표 가까이 노출된 지하 대수층이 지표에 가장 근접한 지역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화학적 변화를 하면서 방울처럼 솟아오르게 된 것이며, 석회암층에 집적된 철 성분들이 대수층 내에서 수시로 풍화되면서 가끔씩 물의 색을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방울샘은 자연 현상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은 특이한 지질구조로서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 오동촌은 400여년전에 형성된 대촌으로 이 샘이 마을의 수호 상징으로 인식될 정도로 문화적 측면에서 주민의 생활과 연계되어 있다. 매년 보름에 행해 졌던 샘제와 당제를 통해 신격이 부여될 정도로 신성시하고 있다. 국가의 안녕이나 마을의 평안과도 연계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고 지리지나 읍지를 통해서도 기록이 확인되는 등 문화명소로서 알려져 왔다. 이처럼 방울샘은 자연유산과 마을 공동체 문화가 어울어진 복합유산이다. * 2001년 6월~7월 문화재 지정을 위한 전문가(경관 정태연, 지질 허민, 문화 김희태) 현지 조사 때 김재식님(당시 78세, 전 전라남도지사), 나승복님(72세), 김재갑님(83세), 나승구님(68세)이 제보해 주었다. “쩌그 찬차니 바바. 방울 올라온 것 보이제”(2014. 5.16) 수축비(1931년 준공) 방울샘 전경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