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기억하기 게시기간 : 2020-07-11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7-09 10:2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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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문화재 등록 2018년 8월 6일, 문화재청고시 제2018-99호를 보면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문화재 등록이란 제목 하에 유달동 8 외 601필지 114.038㎡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등록된 등록문화재 15곳은 다음과 같다. 즉 △번화로 일본식 가옥(3곳) △번화로 일본식 상가주택(3곳) △영산로 일본식 가옥 △구 목포부립병원 관사 △구 일본기독교회 △해안로 일본식 상가주택 △해안로 교차로 상가주택 △해안로 붉은벽돌창고 △구 목포 화신연쇄점 △부두 근대상가주택 △구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 등이다. 이는 전국 최초로 면(공간) 단위 문화재 등록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이는 목포에 보존해야 할 건물도 많았고 그 건물들이 놓인 가구(街區) 즉 도로 형태까지도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문화재 등록과 함께, 2018년 9월 19일, 목포시는 문화재청이 전국 지자체에 공모한 “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사업”에도 선정되었다.
목포 원도심은 근대 역사를 대표하는 ‘기억의 장소’ 1897년 10월, 대한제국 탄생과 더불어 목포는 자주적 개항으로 세계를 향해 항구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근대도시 목포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으로 식민지가 되면서 목포는 전형적인 식민도시가 되었다. 목포는 유달산을 경계로 남과 북이 전혀 다른 공간이 되었다. 남쪽에는 개항장인 일본인 마을이, 북쪽에는 원래부터 조선인들이 살고 있어 이를 중심으로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 이 두 공간이 목포의 원도심을 크게 양분한다. 이번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으로 등록된 곳은 일본인 마을 일대에 해당한다. 이 거리는 일제강점기 때는 목포의 중심거리로 번화가를 이루었지만, 해방 후에는 거꾸로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옛 일본 거리의 모습이 잘 남아 있게 되었다. 목포 일본영사관(현 목포근대역사관 1관),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현 목포근대역사관 2관), 목포공립심상소학교(현 유달초등학교) 강당, 호남은행 목포지점(현 목포문화원), 동본원사 목포별원(현 오거리문화센터) 등 주요 근대건축물들이 있고, 일본식 가옥들도 여러 채가 그대로 있다. 이미 일본영사관은 국가지정 유형문화재 사적 제289호로, 목포진지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되었고, 이번에 새로 지정된 15개 개별 건물도 모두 이곳에 있다.
한편, 조선인 마을 즉 북교동·남교동 일대에 가면 민족운동의 흔적을 안고 있는 건물들이 있다. 목포 구 청년회관, 정명여학교 교사, 양동교회 등이 바로 그런 건물들로, 목포 민족운동의 산실들이었다. 개항장 중심의 일본인 마을뿐만 민족의 거리라 불릴 만한 조선인 마을의 건축물 및 거리도 함께 복원, 보존되어야 균형 잡힌 재생, 목포의 온 모습을 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목포의 역사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원도심은 근대 역사를 대표하는 ‘기억의 장소’로 마땅히 보존되어야 한다. 등록문화재와 문화재청 사업은? 등록문화재 제도는 2001년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도입하였다. 근대문화유산의 존폐를 둘러싸고 전국적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1995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당시 국립박물관)의 철거를 시작으로, 2000년 대전에서는 옛 한국은행 대전지점이 철거되었다. 2005년 서울의 옛 대한증권거래소, 스카라극장이 헐렸고, 2006년에는 영천비행장 격납고 1기가 문화재등록 예고 이틀만에 완전 파괴되었다. 이처럼 등록문화재의 가치가 있는 주요 건물들이 줄줄이 철거 또는 파괴되었다. 일단 문화재로 등록되면 여러 가지로 현상변경에 제약이 따른다. 이 때문에 소유자들이 등록을 꺼렸다. 그러다 보니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등록문화재 제도였다. 이는 소유자의 활용 의사를 반영해 국가와 소유자가 함께 보존해 가는 소유자 중심형 문화재보호제도이다. 재산권 행사도 가능하고 국가의 보상과 지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소유자의 인식 부족과 법적 구속력 부재로 인하여 철거 사태를 막을 수가 없었다. 문화재청에서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등록문화재 등록을 유도하기 위하여 다양한 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사업도 그 연장선상의 것이다. 따라서 사업의 최우선 목표는 근대역사문화재의 보존에 있음은 물론이다. 등록문화재와 문화재청 사업은? 등록문화재 제도는 2001년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도입하였다. 근대문화유산의 존폐를 둘러싸고 전국적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1995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당시 국립박물관)의 철거를 시작으로, 2000년 대전에서는 옛 한국은행 대전지점이 철거되었다. 2005년 서울의 옛 대한증권거래소, 스카라극장이 헐렸고, 2006년에는 영천비행장 격납고 1기가 문화재등록 예고 이틀만에 완전 파괴되었다. 이처럼 등록문화재의 가치가 있는 주요 건물들이 줄줄이 철거 또는 파괴되었다. 일단 문화재로 등록되면 여러 가지로 현상변경에 제약이 따른다. 이 때문에 소유자들이 등록을 꺼렸다. 그러다 보니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등록문화재 제도였다. 이는 소유자의 활용 의사를 반영해 국가와 소유자가 함께 보존해 가는 소유자 중심형 문화재보호제도이다. 재산권 행사도 가능하고 국가의 보상과 지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소유자의 인식 부족과 법적 구속력 부재로 인하여 철거 사태를 막을 수가 없었다. 문화재청에서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등록문화재 등록을 유도하기 위하여 다양한 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사업도 그 연장선상의 것이다. 따라서 사업의 최우선 목표는 근대역사문화재의 보존에 있음은 물론이다. 반성에서 출발해야 목포에서도 근대역사문화재의 존폐를 둘러싸고 갈등이 심했다. 목포에는 일제강점기 식민지배가 남겨 놓은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1999년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에 대한 철거 문제가 제기되면서 이의 보존을 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그 운동은 지역민들의 호응을 얻어 철거 논의는 중단되었고 보존, 활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지금 목포근대역사관 2관이 바로 이 건물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 또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아까운 건물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유애나관」, 「구 죽동교회」,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관사」, 그밖에 일본식 장옥 등 유명 무명의 여러 건물들이 사라졌다. 이중 「구 죽동교회」는 목포 최초의 민족교회라 할 수 있는 목포중앙교회가 처음으로 세웠던 건물이었다. 이 건물의 역사성 및 건축사적 의미를 기려 시민단체와 문화재청에서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2003년 9월 어느 날 갑자기 불이 나 버렸고 결국은 철거의 비운을 맞았다.
그 후 2006년 12월,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이 철거 위기를 맞았다. 목포시에서는 원도심 활성화를 구실로 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주차장을 만들겠다고 하였다. 이 건물은 1930년대 석조로 신축한 장방형의 단층건물로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물이었다. 1957년부터 목포중앙교회가 이전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절간이 교회가 된 이색적인 약력을 지닌 이 건물은 구 일본영사관,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과 더불어 목포의 3대 근대건축물 중 하나였다. 이를 보존하기 위하여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주차장과 건물의 보존을 동시에 얻는 길을 찾아냈고 마침내 2007년 7월, 국가등록문화재 제340호로 등록되면서 철거 위기를 벗어났다. 근대문화유산의 존폐를 둘러싸고 이렇듯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 덕분에 이제 그 남은 건물들이 거리와 함께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으로 문화재 등록이 되었다. 그 가치를 깨닫기까지 반복된 갈등의 경험이 있어 이번 문화재청의 결정이 더욱 반갑다. 따라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사업」은 무엇보다 반성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사업」에 거는 기대 문화재청의 「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사업」은 목포에서 실로 오래전부터 하고자 했던 숙원사업이었다. 목포시에서는 일찍부터 원도심의 쇠락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역사문화의 길 조성사업(2002)”을 추진하였다. 그 후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목포의 정체성을 지키고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되었다. 문화자원의 보존을 통한 지역발전이야말로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문화재청 사업은 당연히 환영하고 그 성과에 대한 기대도 크다. 이를 통해 문화유산 보존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이루고, 아울러 지역발전도 함께 이루어냄으로써 성숙한 문화도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도시공간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 거기서 생긴 문화를 이해하고 그 위에서 그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가꾸어 나갈 때 목포에게 의미 있는 미래가 열릴 것이다. 세계의 선진적인 역사도시에 가면 옛 유적지들이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자원으로 활용되어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옛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른바 원도심들은 그 가치를 잘 보존하여 활용하고 있으며, 반면에 도시개발은 신도심 지역들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따라서 원도심과 신도심의 역할분담이 분명하다. 그렇게 해서 양쪽 다 잘살고 있다. 목포의 원도심과 신도심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원도심의 발전은 역시 희귀성을 보존하고 있는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하여 관광과 연계될 때 비로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문화유산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존재이다. 개발이 알이라면 보존은 거위라고 할 수 있다. 당장의 알보다 알을 낳는 거위가 중요하다는 건 다 알 것이다. 도시가 상품에만 머물 수는 없다.1) 세계의 모든 도시들이 그렇듯이 자본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도시는 상품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양과 측정할 수 있는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만 추구하였다. 땅이나 가구, 도로에 서린 역사나 전통은 간 곳 없이, 오직 사고파는 추상적 단위, 돈버는 수단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땅도, 도로도, 건물도 사회적 수요와는 상관없이 끝 모를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그 값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돈 또 돈! 투기, 약탈, 이 때문에 부자와 빈자의 간격은 더 벌어지고 도시 곳곳에 차별의 흔적을 남긴다. 왜 당초 도시가 필요했고 왜 사람들이 도시로 모였는가? 그 도시의 본성과 목적은 돈 앞에서 완벽하게 잊혀졌다. 맘몬(Mammon)2)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도시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인류가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 도시! 그 가치를 지켜나가야 한다. 지속가능한 경쟁력 있는 도시 도시는 만남의 장소로 출발하였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도시에 모였고 더 잘살기 위해 도시에 머문다.”는 말처럼 그저 모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찾아서 의식적으로 모였다. 따라서 도시는 단순히 용기(容器)에 그치지 않고 자석과 같이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상호교류가 원초적 자력인 셈인데, 보통 아고라=시장이 그 역할을 한다. 시장은 예부터 상거래 기능 못지않게 소식과 의견을 교환하는 장소의 기능도 컸다. 따라서 도시는 기회가 있는 곳, 만남, 그리고 나눔이 있는 곳, 그래서 공동체적 일체감과 모성을 느끼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공동체적 연대와 결속을 키움으로써 인간 상호간의 신뢰에 기반한 건강한 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목포도 마찬가지였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항구의 활성화에 따라 ‘새로운 일터’가 늘어나자 부산·경남 지역의 숙련된 부두노동자들과 목포 인근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해방 후에는 인근 다도해 섬 지역과 이웃하는 농촌 지역 주민들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도시 목포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목포 문화의 상징 공간인 오거리가 이들을 융합시키는 용광로의 역할을 하였다. 오거리에 자리 잡았던 옛날 다방들은 문화를 이야기하고 예술을 나누는 장소였다. 오거리는 그야말로 소통과 교류의 장이었고 예향 목포의 자석과 같은 공간이었다. 이와 같은 도시의 원초적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역사문화적 유산이 집중되어있는 도시에서 끊임없는 사회적 교류와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열어 줌으로써 창조적인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거기서 궁극적인 도시의 경쟁력도 생긴다. 인간의 가치에 관심을 가지며 환경과 복지를 우선하는 도시, 바로 현대도시의 지향점도 여기에 있다. 1) 고석규, 「도시: 시간과 공간의 이중주」(『일요일樂』 2018년 제5호) 참조.
2) '부'(富), '돈', '재물', '이익'이라는 뜻에서 나와 “부와 물욕의 신”=“탐욕을 상징하는 악마”를 가리킨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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