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중원의 신풍 그리고 금호의 비명(非命)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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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사림은 외척 권신의 음모와 공작 정치가 분하고 괴로웠다. 박상이 담양부사 시절 문인이었던 송순(宋純)은 무등산에서 스승의 계씨(季氏) 박우(朴祐)를 만나 억울함을 토로하였다.1) “들은 넓고 하늘은 아득한데, 성긴 숲에 날씨가 추워라. 푸름 간직한 회백(檜柏)이 가엽고, 마구 꺾인 지란(芝蘭)은 아까워라. 스스로 술잔 가득 채워도, 시름 쌓여 누그러뜨릴 수 없군요.” 송순은 기묘사화 한 달 전의 별시문과에서 조광조로부터 ‘이런 문장은 김일손 이후 처음’이라는 격찬을 받았지만 남곤의 훼방으로 갑과 장원을 놓쳤었다. 정예문신으로 선발되어 사가독서의 은전을 누리던 독서당에서도 송순은 매양 심란하였다.2)
이런 시절 박상은 충주목사로 나갔다. 삼한의 중원이요, 한강 이남에서 인구가 가장 많던 대도회였다. 담양부사에 이어 두 번째 청백리가 되었다. 토호에게는 강경하나 백성에게는 관대한 서정을 펼쳤던 것이다. 교육 및 학술사업에도 각별하였다. 방대한 『동국통감』을 간추린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 보급하고, 찬탈과 배반의 세월을 은둔과 절개로 맞섰던 도연명의 『도정절문집(陶靖節文集)』과 비정한 세월을 방외에 노닐면서 승속을 넘나들었던 김시습의 『매월당집』을 간행한 것이다. 『매월당집』은 사화로 파직되어 이웃 음성으로 물러난 이자(李耔)가 함께 하였다. 한편 이자와 같은 파직된 옛 동료와 교유하며 이들의 강학과 생활을 후원하였다. 여주의 김안국(金安國)ㆍ신광한(申光漢) 그리고 충주의 김세필ㆍ이연경(李延慶) 등이었다. 일화가 전한다. “공이 충주목사로 있을 때 김세필ㆍ이자ㆍ이연경이 많이 의지하였는데, 여주에 살았던 김안국ㆍ신광한은 봄에 여주목사에게 관곡을 빌려서 구제하고 가을에 녹봉으로 갚았다. 녹봉을 바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혹시 모를 혐의를 피하고자 함이었다.”3) 특히 김세필과 다정하였다. 김세필의 ‘공당(工堂)’ 신축을 물심양면 지원하고 편액까지 하였다. 침실ㆍ강당ㆍ서실 세 칸이 ‘공자형(工字形)’이니 밋밋한 듯싶지만, ‘공(工)’이 하늘[—]ㆍ사람[]ㆍ땅[—]이 만나는 글자이니만큼 뜻은 깊숙하였다. 두 사람은 공자당에서 술잔을 기울며 한 구절씩 주고받았다.4) 얼굴 마주하니 마음 걱정 없고, 술잔 넘기니 절로 뜻이 통하는군. 강산은 좋은 경치 아니라도, 세상 빛깔은 춘풍이로세. 곤곤하게 다시 밤이 되니, 아득하게 달 떠오르네. 어느 해 글과 술로 만나도, 어찌 다시 지금과 같을까? 또한 김세필이 중국에서 구해온 왕수인의 『전습록』을 강론하였다. 김세필은 왕수인의 심학이 천년 도학의 맥과 어긋났음을 걱정하였다.5) “양명 노인 심학을 닦더니만 만년에 유불선에 출입했다고 들었네. 공맹의 천년 도학 맥락에서 털끝이나마 어그러지지 않나 걱정이라네.” 그러면서 박상의 견해를 구하였다.
자양은 리학의 주희, 상산은 심학의 육구연으로 서로 교유 소통하면서도 공부 방법과 인식주체를 두고 논쟁하였다. 왕수인이 육구연을 따라 흠이 많으니 박상의 비평을 바란다는 것이다. 박상의 화답은 ‘사람들이 놀라 다르다고 말할까 오히려 두려워라 却恐人驚異所云’ 한 구절만 전한다. 주희와 육구연, 리학과 심학의 차별보다는 절충의 입장이었던 듯싶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명학논변’이었다. 이렇듯 충주는 박상에게 황금기였고, 기묘사화 이후 학술과 소통의 중심과 같았다. 박상은 사도시(司䆃寺) 부정(副正)으로 올라가 문과 중시에 장원하며 출사 25년 만에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사도시는 궁중의 곡물과 장류를 관장하였다. 이즈음 심정(沈貞)이 마포구 공덕동 한강변에 으리으리한 정자를 짓고 주련을 부탁하자 360자 장편 중에 태연히 적었다.6) “산중턱에 상과 도마를 펼쳐놓고, 가을 골짜기에 술독과 바리를 벌려놓았네.” 산중턱 ‘반산(半山)’과 가을 골짜기 ‘추학(秋壑)’은 당시 식자들이 송나라를 망쳤다고 깎아내렸던 신법당의 왕안석과 가사도(賈似道)였다. 박상은 곤욕을 치렀다. 충주목의 군정(軍丁)을 빠뜨린 행정 착오로 파직되고, 얼마 후 나주목사가 되어서는 근무평정에서 하등을 받고 또 파직당한 것이다. 심정이 전라감사에 일렀었다. “거짓으로 죄줄 수 없으니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고하(考下)로 처리하시라. 이러한 박상의 시련, 수모를 지켜보는 송순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스승을 사모하며 ‘잠시라도 멀리서 뵈올 수 있다면, 누구에게 앞산을 빌려서 오르고 오르련만’ 하다가 불끈하였다.7)
박상은 광주 봉황산 자락으로 돌아갔다. 이즈음 김인후가 찾았는데 한 잔 술을 나누고 떠나보내며 건넸다.8)
스무 살 안팎 김인후의 세속을 벗어난 풍모, 비를 맞고도 옷매무새에 신경 쓰지 않는 모습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실제 박상은 누군가에게 ‘기동(奇童)은 생을 잘 마치기 어려운데, 이 사람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김인후 또한 박상을 찾았던 감격의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였다. “격려하신 말씀과 정숙한 거동에 감동하였는데, 굳이 자세한 말씀 없었어도 양심이 활짝 열렸다.”9) 박상은 1530년 4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세. 김인후는 기일이 되면 묘소를 찾아 술잔을 올렸다. “살아가며 알아주는 사람 드문데, 눌재는 나의 종자기(鍾子期)였네. 부음 듣기를 경인년, 묘에 잔을 올린 지가 벌써 사 년이군. 선생을 생각하면 울컥하니, 십 년 가도 눈물이 쏟아질 게야.” 종자기는 춘추시대 거문고 명인 백아(伯牙)의 지음(知音)으로,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었다. 성균관에서 처음 만난 임형수(林亨秀)에게 건넨 시에 나온다.10) 임형수(1514∼1547)는 김인후가 진사 되던 1531년에 생원, 4년 후 22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국왕이 효령대군이 조성한 망원정(望遠亭)에서 베푼 시회에서 당대 문호 소세양(蘇世讓)의 다음 자리를 차지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1539년 봄 중국 황태자의 책봉을 알리는 사신이 왔을 때, 의주까지 마중 나간 원접사 소세양의 종사관이 되어 사신이 거침없이 쏟아내는 수십 편에 막힘없고 너끈하게 응대하였다. 다른 두 사람 종사관 최연(崔演)ㆍ엄흔(嚴昕) 또한 약관에 문과에 급제한 당대 일류 문사였다. 특히 숭례문 대평관(大平館) 연회에서 발표한 360자 장편서사는 유수와 같았으니 처음과 끝이 다음과 같다.11) “가없는 황제의 어짊은 하늘을 덮고, 사해가 일가라 도로가 통하였네.” 그리고 “태평을 보좌하여 수역(壽域)을 열었나니, 먼 땅 또한 응당 화락(和樂)을 즐기리라.” 당시 중국사신은 임형수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부사는 ‘동국의 고운사람 東國佳人’, 정사는 ‘재주 많은 젊은이 少年多才’로 칭송하며, 고향까지 물었다. 전라도 금호(錦湖) 즉 영산강 포구가 가까운 나주 송현동이었다. 그래서 부사는 전별시에서 ‘별장 있는 남쪽 너른 강은 비단 물결 찬란하고, 복숭아꽃 버드나무 꽃 마주 피는 동네라니, 내 언젠가 강물에 배를 띄우고 가리’ 하였고, 정사는 ‘전라도 이른 봄바람 차가우면, 영산포구 여울도 놀라 소용돌이치리라. 금호의 풍월이 사람을 붙잡겠지만, 우린 왕사(王事)가 분주하여 고단할 게야’ 하였다.12) 이때 정사가 권유하였다. “천하에 뜻을 세운 장부라면 응당 포부가 있어야 하니, 좋은 산수 찾고 외딴 별장에 깃들지 말게나. 그대가 때맞춰 상국에 관광 오면, 나의 문하에 들도록 허여할 것이야.” 벼슬이 힘들다고 물러날 생각 말고 사신이 되어 중국을 방문하면 자신이 거두겠다는 것이다. 관광은 나라의 빛을 본다는 관국지광(觀國之光)의 준말이다. 정사는 당시 황제의 학문을 보좌하는 한림원 시독관(侍讀官)으로 머잖아 과거를 주관하고 황가 교육을 책임지는 태사(太師)로 명성을 날렸던 화찰(華察)이었다.13) 임형수는 실로 문장이 뛰어나고 기상이 남달랐고 처사는 관대하였다. 활솜씨까지 대단하여 장차 문무를 겸비한 국기(國器)로 기대를 모았다. 더구나 풍채가 좋은 호남아, 그러나 거침없는 해학으로 남을 얕잡아본다는 오해를 샀다. 이조좌랑 시절 선배 정랑이 무척 매몰차자 책상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14)
정랑은 돌아와 대노하고 벌칙을 가중하면서도 말하였다. “시는 좋다.” 성균관 시절에는 설산의 멧돼지 사냥 이야기로 열셋 연상 이황을 놀린 일화도 있다. “사나이의 기이하고 장대한 취미를 아시는가? 다만 필묵 다루는 작은 재주뿐일세.” 그러나 내심은 무척 존중하였다. 당대 뭇 사랑을 받았던 신잠(申潛)의 ‘묵죽도(墨竹圖)’를 보고 적었다.15) “영천(靈川)의 붓끝에서 나온 푸른 대나무, 소상강구의 고아한 모습이 설월(雪月) 중에 차가워라. 시인 중에서 추려보면 어느 누가 비슷할까? 맑고 수척한 모습은 의당 퇴계(退溪)와 견주어야겠지.” 영천은 신잠의 호, 이황에게서 혼탁한 세월을 이겨내는 차가운 인내와 절개를 읽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세태의 속임과 부정 또한 좌시하지 않았다. 임형수는 ‘군국사무에 밝은 신예’로서 회령판관을 맡았다. ‘홍문관에 있을 문사를 함부로 외직에 보낼 수 없다’는 사헌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조와 의정부는 ‘훗날 중임을 맡으려면 거쳐야 할 경력’임을 내세웠다. 중국사신을 영접하였던 그해 가을이었다. 변방에서 열성으로 관무를 수행하며 많은 폐단을 제거하고 우리 땅에 사는 호인(胡人)을 무마하는 등 실적이 범상치 않았다. 그렇게 2년 반, 사헌부 지평으로 복귀하자마자 어전에서 고발하였다. “저들 변방의 수령들은 부임한 날부터 삼공육경의 이름을 벽에 적어두고 날마다 뇌물을 실어 나르고 있다.” 뇌물의 종착지는 다름 아닌 문정왕후의 내정(內廷) 즉 중궁전이었다.16)또한 1543년 봄 동궁전에 화재가 나며 인심이 뒤숭숭할 때, ‘만일 한두 놈만 곤장을 치면 진정될 것’이라며 분노하였는데, 그만 아우가 듣고 친한 사람에게 건네는 바람에 빠르게 퍼졌다. ‘한두 놈’은 문정왕후의 동기 윤원로ㆍ윤원형 형제였다.17) 무과로 발신한 부친이 대윤(大尹) 윤임(尹任)과 한 동네 살며 가까웠다지만, 임형수 또한 문정왕후의 소윤(小尹)과 대척하였던 것이다. 1544년 한겨울 중종이 승하하고, 이듬해 초겨울 쫓기다시피 나갔던 제주에서 인종의 국장에 즈음하여 만장을 올렸다.18)
윤임ㆍ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 인종의 대신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죄 없는 선비를 정적으로 한창 내쫓던 때였다. 중종 승하 때의 수건을 인종 국장에 꺼내 눈물을 닦았다는 구절이 핍진(逼眞)하다. 제주목사로 가는 송별연에서 윤원형이 여러 잔을 권할 때도 임형수는 호기로웠다. “공이 과연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마땅히 양대로 마시겠소.” 윤원형의 얼굴빛이 확 변하다가 그쳤는데, ‘선왕의 시책문(諡冊文)까지 지었는데 아직은 아니다’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2년,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죽음을 받았다. ‘문정왕후 즉 여주(女主)가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농단하여 나라가 망할 지경이다’는 벽서는 조작이었다. 임형수는 죽음마저 호탕하였다.19) 양친에게 공손하게 절을 올리고, 열 살 아들에게 유언하였다.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글을 배우지 말라”하다가, “배우더라도 무과는 괜찮다.” 그리고 약을 가져온 의금부 서리에게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웃고선, 방안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자 뿌리쳤다. “마땅히 천지의 위아래 귀신이 둘러서서 환히 보는 데서 죽을 것이다. 어찌 음침한 곳에서 죽겠는가!” 1547년 9월 향년 서른넷이었다. 나주 송월동 나주시청 옆 문중 묘역에 묻혔고, 제사는 어등산 자락 광산구 등림동 지혜학교 건너편 내등마을에 있는 평택 임씨 문중 사우 등림사(登臨祠)에서 모신다.20) 1) 『俛仰集』 권1, 「庚辰仲秋 登無等山 口號錄呈石軒先生」
2) 『俛仰集』 권1, 「暮思」 3) 허균 『성소부부고』 제23권 ‘박상이 김안국과 신광한의 가난을 구제하다 朴訥齋救金慕齋申企齋之窮居’; 박상, 『눌재집』 부록 권2, 「서술」; 김세필 『십청집』 권4, 부록. 4) 『십청집』 권1, 「工堂酒席聯句」; 『눌재별집』 권1, 「工字堂酒席聯句」 “對面心無阻 含杯意自通(昌世) 江山非勝地 物色是春風(公碩) 衮衮更移夜 迢迢月上空(昌世) 他年文酒會 能復此時同(公碩)” 창세(昌世)는 박상, 공석(公碩)은 김세필이다. 5) 『십청집』 권2, 「又和訥齋」 “陽明老子治心學 出入三家晩有聞 道脈千年傳孔孟 一毫差爽亦嫌云” 6) 『눌재속집』 권2, 「題逍遙堂排律四十韻」 7) 『면앙집』 권1 「奉和訥齋先生韻」 四首 8) 『눌재속집』 권1, 「贈河西」 9) 『하서전집』 부록 권2, 「서술」 및 권11, 「與友人書」 10) 『하서전집』 권2 「贈林士遂亨秀」 “生平少知遇 訥齋吾子期 不知馬牝牡 安問黃而驪 聞訃庚寅年 酹墓已四期 君名聽亦久 今日是新知 感愴爲先生 十載淚欲垂” 11) 임형수, 『錦湖遺稿』 「大平館六十韻」 12) 『錦湖遺稿』 부록, 薛廷寵, 「贈林禮曹亨秀」 “東國佳人歌采蘭 南湖別業錦瓓珊 桃花柳花相出洞…” 및 華察, 「贈林佐郞竝序」 “全羅道上春風寒 營山浦口多驚湍…錦湖風月留人久 各因王事疲奔走…丈夫四方應自許 莫向湖山尋別墅 觀光上國貴及時 欲進門墻吾所與” 13) 화찰(1497∼1574)은 만년에 향리의 호화주택으로 물의를 빚으며 그간 ‘하늘ㆍ군주ㆍ부모ㆍ친구ㆍ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오불기(五不欺)의 명성에 흠결을 남겼다. 14) 『금호유고』 「無題」; 李睟光, 『芝峯類說』 권16(言語部), 「諧謔」 15) 尹根壽, 『月汀集』 별집 권4, 「漫錄」; 『연려실기술』 제10권 「을사당적」 “靈川筆下碧琅玕 湘口高標雪月寒 揀得詩人誰得似 淸癯宜幷退溪看” 16) 『중종실록』 98권, 37년(1542) 5월 21일ㆍ22일. 17) 『명종실록』 2권, 즉위년(1545) 10월 13일 18) 『금호유고』 「仁宗大王挽章」 19) 『명종실록』 6권, 2년(1547) 9월 21일 20) 등림사는 임형수를 주벽으로 강계부사를 끝으로 은퇴한 임식(林植, 1539∼1589)과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다가 이괄의 패잔병을 추격하다가 전사한 임회(林檜, 1562∼1624)를 모신다. 두 사람은 임형수의 아우 임정수(林貞秀)의 아들이었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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