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고막포(古幕浦)에 서린 한(恨) 게시기간 : 2020-05-1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5-14 14:2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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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포가 어디? 고막포는 나주와 무안을 잇는 육상 교통의 요지이자 영산강의 본류에 바로 이어지는 고막천에 자리한 수상 물류 유통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에 고막포는 동편은 나주군에 속하고 서편은 무안군에 속하여 양쪽에 모두 포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현재는 동편은 나주군 문평면 산호리, 서편은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당시에는 무안군 금동면 고막리)에 해당한다.1)고막포는 객주들도 활동하고 있던 상업의 요지였다. 또 인근에 고막원이 있어 이곳이 나주와 무안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음도 말해준다.
고막포에 가면 옛 돌다리인 고막교가 있어 특이한 경관을 보여준다. 평화롭기만 하던 이곳에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 농민들의 피맺힌 한이 서린 고막포 전투가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고막포 전투 관군측의 기록들만이 남아 있고, 또 그나마도 서로 차이가 있어 정확한 재구성은 어렵지만, 『갑오군정실기』와 『난파유고』를 중심으로 전투의 경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 갑오년인 1894년 11월 중순경 무안(務安)의 접주 배상옥(裵相玉)이 만여 명의 무리를 불러 모아 그곳 현에 불을 지르고 무기를 빼앗고는 나주성과 서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는 고막포로 집결하였다. 그들은 소리 높여 말하기를 “나주로 들어가 성호(城濠)를 공격하여 뺏을 것이다.”라고 하니 형세가 예측하기 어려웠다. 11월 16일 관군측에서 정탐한 바에 따르면, “적의 세력이 마치 숲과 같아서 우리는 적고 저들 무리는 많았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이때 고막포에 집결한 농민군의 무리는 5만에서 6만명이라고 추산하였다. 여러 기록들에서 “적의 숫자가 숲처럼 많아서 단번에 격퇴하기가 어려웠다.”라거나 “적의 수효가 많아 상대하지 못하고”, “비도(匪徒)가 숲처럼 많고 그 기세가 불처럼 대단하며”라고 하였는데, 그만큼 농민군의 기세가 등등하였다.
이에 나주 관군측에서도 “적은 많고 아군은 적으며 서로의 거리가 고개 하나 사이여서 지키는 데는 여유가 있으나 진격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여 도통장 정석진과 부통장 김재환 및 중군장 김성진이 포군 300명을 인솔하여 강춘삼·전공서 등과 함께 고막포와 10리쯤 떨어진 초동시(草洞市, 다시면 영동리)에 가서 주둔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들판은 넓고 군사는 적어서 형세를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침 전왕(田旺)·지량(知良)·상곡(上谷) 3개 면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통령 박훈양(朴薰陽)·임노규(林魯圭)·나사집(羅士集)이 민병 수천명을 인솔하고 와서 관군에 합류하였다. 관군측에서는 약한 척 유인작전을 쓰고 기습공격을 펼칠 계책을 세워 대비하였다. 다음날 17일 아침에 농민군은 관군측의 계책을 파악하지 못한 채 쉽게 여겨 양쪽으로 나누어 불을 지르고 포를 쏘며 바람을 몰듯이 공격해 갔다. 이에 관군은 수다장등(水多長嶝)에서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다가 대완포(大碗砲)를 쏘고, 앞뒤로 매복한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포를 쏘면서 기습 공격하였다. 천보대조총군들이 산으로 오르자 이에 밀려 농민군들은 해산하였다.
【그림3】 『조선후기 지방지도』(1872년경) 중 「무안현지도」 일부.
사방에 불을 지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했고 포성이 땅을 울렸다. 후응장 최성순·박근욱·구유술이 계속 와서 관군과 민병이 합쳐서 3,000여 명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아직 농민군의 대대(大隊)가 가득하고 장등 아래위에 깃발이 늘어선 것이 숲처럼 많았으며 그 기세는 물꼬가 터진 것처럼 급박하였다. 이에 관군측에서 대포군에게 먼저 쏘게 하고 천보조총을 뒤따르게 하였고, 중군(中軍)이 농민군의 왼쪽을 기습공격해 왔다. 이에 포환이 떨어지는 곳마다 농민군들이 희생되어 시체가 들판에 널리고 뒤엉켜 쌓였다. 총을 맞고 죽은 자는 65명이나 되었다. 기세가 오른 관군이 10여 리를 추격하였다. 쫓기는 농민군들이 고막교에 이르렀는데, 사람은 많고 다리는 좁아 물에 떨어지거나 뛰어들어 죽은 자가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마침 밀물 때를 만나 피해를 더욱 키웠다. 관군측은 군사를 물려 호장산(虎壯山, 다시면 송촌리) 위에 진을 쳤다. 밤에도 백여 명의 포군을 보내 마구 포를 쏘며 습격하여 21명의 농민군이 죽었다. 관군측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때 마침 나주성 북쪽의 변고가 시급하여 즉시 회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에 진에 머물러 밤을 지낸 후 군사들을 단속하여 서서히 군대를 철수하였다. 이처럼 17일 고막포 전투에서 농민군은 크게 패했고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농민군은 서창(西倉)의 세곡을 징발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물론 관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8일 나주목사 민종열은 중군 김성진에게 포군 50명을 인솔하여 이를 제어하게 하였다. 20일 밤에 관군은 서부(西部)의 장등에 나가서 주둔하였고, 민병통령 조맹균(曺孟均)이 합세하였다. 21일에 정석진과 도위장(都衛將) 손상문이 포군 300명을 인솔하고 급히 행군해 와서 장등의 선군(先軍)과 합세하였다. 농민군은 이를 보고 고막산(古幕山)으로 달아나자 추격전이 벌어졌다. 농민군도 관군이 형세의 위급함을 느낄 만큼 포를 쏘면서 대응하였고, 어두워질 때까지 접전은 계속되었다. 관군은 호장산에 옮겨 주둔하다가 밤에 군사를 돌렸다. 이렇게 고막포 전투는 끝났다. 고막포 전투는 2차 봉기시 2개월 동안 나주성을 둘러싼 4차례의 공방전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를 이해하려면 나주성 공방전의 전모와 그 배경, 또 여기서 고막포 전투의 각별한 의미 등을 파악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공방전의 사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주성 공방전3) 전남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대체로 광주·나주·화순권, 무안·함평·영광·진도권, 장흥·강진·보성·해남·고흥권, 담양·곡성·구례권, 순천·광양·여수권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4) 전남은 어디 하나 빠진 곳 없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어났다. 당시 농민군들은 호남 대부분을 장악하고 집강소 시기를 맞았다. 그러나 나주만은 예외였다. 전체 호남에서 “그 칼날을 당하지 않은 곳은 이 금성 한 개 읍뿐”이라 하듯 “나주는 한 조각 고립된 성” 같이 남아 있었다. 기우만(奇宇萬)이 쓴 「토평비명 병서(討平碑銘竝序)」에서 “당시의 일에 대해 바른 사람은 한편으로는 나주를 마치 길을 잃은 배가 북두칠성을 보듯이 믿었고, 그른 사람은 한편으로는 나주를 마치 등을 찌르고 눈을 찌르듯이 꺼려하였다.”라 하여 나주를 바름[正]에, 농민군을 그름[邪]에 대비하였다. 이처럼 나주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공교롭게도 예외적인 공간이었다. 이른바 수성군이 공고히 지켜며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 입장에서는 “나주가 자신들의 뒤를 밟을까 두려워하여 힘을 합쳐 유린할 계책을” 세워야 하였다. 이런 정세로 인하여 나주성 공방전이 일어났다. 2차 봉기에서 농민군의 주력은 서울 진입을 목표로 하여 그 길목인 논산과 공주로 향하였다. 이때 무안의 배상옥과 광주의 손화중 부대는 후방 방어를 위해 그대로 현지에 남았다. 따라서 나주가 관군측의 근거지로 남아 있게 되자 이들이 주력이 되어 나주성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나주성 공방전은 잘 알려져 있는 공주 우금치 전투, 장흥 석대들 전투 등과 비교할 만큼 큰 전투였다. 그중에서도 고막포 전투가 차지하는 위치는 각별하였다.5) 갑오년 기간 동안 나주성을 둘러싼 전투에 대하여는 “8개월 동안 굳게 지키며 7번 싸워 7번을 이겼고, 얼마 후에 민공(閔公)이 초토사(招討使)로 승진하여 마침내 요사스런 기운을 숙청하고 적의 우두머리를 차례로 죽였다.”6)라고 하였듯이 모두 7차례의 싸움이 있었다. 그중 1차 봉기와 집강소기에 각각 한 번씩 있었고,7) 2차 봉기 내의 전투는 모두 네 번이었다. 고막포 전투 외에 광주를 근거로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등이 이끄는 농민군들이 침산(砧山) 전투, 용진산(聳珍山) 전투, 남산(南山) 전투 등에서 혈전을 벌였다. 2차 봉기 때만 보면, 2개월 동안 네 차례나 큰 전투가 있었다. 비록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농민군의 기세는 거세었다. 다만 공방전에서 연이은 패배로 농민군의 세력은 크게 꺾였다. 고막포 전투에 대하여 관변측에서 적은 글들을 보면, “고막에서 모두 쓸어 없애버렸네[古幕掃殪]”, “고막에서 승리하였는데, 패배하여 죽은 시체가 들판을 메웠다.”8), “고막에서 깨끗이 소탕하였네.”9)라고 하였듯이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가장 많이 죽었다. 이 때문에 농민군의 입장에서 볼 때, 고막포는 가장 큰 한이 서린 곳이었다. 무안·함평의 농민군은 전투의 선봉에 서기보다는 후방을 지키는 교두보 역할을 주로 맡았기에 전봉준 등과는 활동영역이 달랐고, 이 때문에 그 규모의 크기나 위상에 비해 주요 기록에 부수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10) 한편, 지역에 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고막포 전투는 물론 그 후 일본군이 자행한 토벌에서는 더욱 많은 농민군들이 희생되었다. 이들은 왜 봉기했는가?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반봉건·반침략 투쟁의 선구로서 우리의 근대사에 당당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가치 있는 역사의 큰 뿌리였다.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제2조(정의)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라 하였다. 1차 봉기는 반봉건운동으로, 그리고 2차 봉기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한 반침략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고막포 전투는 2차 봉기 기간 내에 일어났기 때문에 2차 봉기의 배경이 곧 고막포 전투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해 준다. 1차 봉기에서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를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해 왔다. 이에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우려한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하며 청·일 양국에 철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오히려 6월 21일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틀 뒤인 6월 23일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나섰다. 청일전쟁에서 예상과 달리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농민군의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더구나 일본은 농민군 진압에 나서기로 개화파 정권과 결탁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격분하여 항일 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9월 12일 2차 봉기에 결연히 나섰던 것이다.
진정한 명예회복은 국가유공자 예우로 오랜 논란 끝에 2019년 2월,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이 동학농민혁명의 ‘법정기념일’로 선정되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동학난’이라 불리며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던 불과 한 세대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서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명예회복이 마무리되려면 마땅히 ‘독립유공자’ 예우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제라도 2차 봉기의 참여자들을 독립유공자에 포함시켜 국가보훈처에서 합당하게 예우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게 보답하는 “진정한 명예회복”의 길인 것이다. 1) 이종일, 「光武年間 羅州 古幕浦 船旅閭 文書」(『古文書硏究』6, 한국고문서학회, 1994)
2) 『甲午軍政實記』 는 1894년 9월 22일부터 12월 28일까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최고 군사 지휘부인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의 공식 기록이다. 『蘭坡遺稿』는 당시 나주성 守城都統將을 지낸 鄭錫珍(1851∼1895)의 문집으로 1913년에 간행되었다. 고막포 전투에 대한 사정은 배항섭, 「1894년 무안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古幕浦 전투」(『한국민족운동사연구』8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5) 참조. 3) 여러 차례의 전투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엇갈리는 부분들이 많고, 또 관변측의 입장에서 작성한 것들이어서 그들의 무공을 과장하듯이 그려놓았다. 따라서 사건들의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4) 배항섭, 「1894년 무안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古幕浦 전투」(『한국민족운동사연구』8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5), 5쪽. 전남의 동학농민혁명 전반에 대하여는 이상식·박맹수·홍영기 공저, 『전남동학농민혁명사』(전라남도, 1996) 참조. 5) 배항섭, 같은 글, 17쪽. 6) 『蘭坡遺稿』 卷3 附錄, 「鄭將軍討平日記序」 7) 1차 봉기 때인 4월에 무안의 농민군 5백 명이 나주의 서쪽을 공략하였고, 이여춘(李汝春) 등이 붙잡혀 효수되었다. 또 집강소기인 7월 5일에는 서문(西門) 전투가 있었다. 8) 『松沙集』 「羅州平賊碑」 9) 『錦城正義錄』 乙編, 「討平碑銘 幷序」 10) 무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무안동학농민혁명사』(2008) 참조.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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