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조계산 송광사 풍암영각(楓巖影閣)과 진영계보지도(眞影系譜之圖) 게시기간 : 2020-05-19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5-18 09:2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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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 송광사(松廣寺) 순천 조계산 송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절이다. 송광사 경내 일주문에 2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曹溪山 大乘禪宗 松廣寺, 1752년)」와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 일중 김충현 글씨임)」이 그것이다. 이 2개의 현판에 쓰여진 글이야말로 이보다 송광사를 잘 표현하고, 또 적합한 말은 없을 것이다. 송광사는 고려후기에 16국사도량이었고, 조선후기로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고승대덕 큰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어 명실상부하게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 부를만 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불교계는 승맥(僧脈)으로 볼 때, 해남 대둔사(오늘날의 대흥사)를 중심사찰로 하는 청허휴정파(淸虛休靜派)와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는 부휴선수파(浮休善修派)로 대별된다. 송광사는 임진왜란 직후 17세기 초반부터 조계총림이 개설되는 1969년까지 360여 년간 부휴파(浮休派)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법등(法燈)이 이어졌다. 18세기 중반부터 부휴파 가운데 풍암계(楓巖系)가 20세기 중반까지 승보종찰 송광사를 이끌어왔다. 이와 관련된 전각이 풍암영각(楓巖影閣)이다. 풍암영각은 풍암세찰(楓巖世察, 1688(숙종 14)∼1767(영조 43)과 그의 문도들의 진영(眞影, 초상화)을 모신 전각이다.
1. 송광사 일주문 현판 풍암세찰은 부휴문파(浮休門派)의 7세손이다. 호는 풍암(楓巖). 속성은 밀양박씨. 전라남도 순천 출생이다. 어려서 대구 동화사(桐華寺)에서 철웅(哲雄)을 은사로 하여 득도하였다. 그 뒤 송광사의 무용수연(無用秀演)과 영해약탄(影海若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수연의 입멸 후 약탄의 법을 이었다. 개당(開堂)하여 학인을 지도함에 있어 조금도 가풍을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1759년(영조 35) 순천 모후산(母後山) 대광사(大光寺) 영천암(靈泉庵)에서 묵암최눌(默庵最訥)에게 법을 전한 뒤 은거, 수도하였다. 행장이 없어 입적한 때와 장소는 알 수 없으나, 같은 해 최눌이 그를 위하여 송광사에서 대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묵암집(默庵集)』 말미의 최눌화상 행장에 있는 것으로 보아 입적연도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법계는 부휴선수(浮休善修)-벽암각성(碧巖覺性)-취미수초(翠微守初)-백암성총(栢庵性聰)-무용수연-영해약탄-풍암세찰-묵암최눌로 이어진다. 이와같이 조선후기에 송광사를 이끈 승려들은 부휴파의 풍암계였으며, 풍암계 승려들의 진영이 풍암영각에 모셔져 있다. 2. 풍암영각의 건립 사찰의 가람배치는 일반적으로 상단에 불보살을 모신 전각이 있고 그 아래에 승방과 요사채가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송광사의 가람배치는 일반 사찰과 다른 면이 있다. 상단에 삼일암과 국사전, 풍암영각 등 승보(僧寶)가 모셔져 있고, 그 아래에 대웅보전, 관음전, 명부전 등 불보(佛寶)가 모셔진 특이한 구조로 배치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승보와 관련된 풍암영각(楓巖影閣)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조성되었으며 조성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등 밝혀진 것이 없다. 풍암영각은 풍암세찰을 비롯하여 그 법손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송광사지』에 따르면, 1785년에 보현전(普賢殿) 인근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인 국사전(國師殿) 옆에 옮겨지었다가 1842년 대화재로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1886년에 옛터인 보현전 근처로 옮겼다가 1903년에 현재의 위치로 자리잡게 되었다. 최초 풍암영각이 있었던 보현전의 위치는 『송광사지』 의 기록을 통해 현재 도성당 인근으로 추정된다(송광사성보박물관, 『송광사의 필적기행』, 236쪽, 2019년). 1951년 큰 화재를 모면했고, 이건된 건물이지만 원형에 크게 손상되지 않은 상태이다. 앞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2. 풍암영각 현판 부휴파의 정맥(正脈)을 계승한. 풍암세찰의 문하에서 유악당(維嶽堂)을 제외하고, 4걸(四傑)로 불리우는 묵암최눌, 응암낭윤, 제운해징, 벽담행인 등이 배출되었고, 이들의 법손들이 1970년까지 송광사를 이끌어갔다. 풍암영각에는 부휴파 풍암계로 송광사 주지를 세 차례 역임한 취봉창섭(1898-1983) 스님까지 모셔져 있다. 송광사에서는 매년 한식날 풍암영각에서 춘계다례를, 중양절에 추계다례를 봉행하고 있다. 3. 송광사 부휴파와 청허파의 승보(僧譜) 풍암영각 안에는 「조계산송광사 진영계보지도(曹溪山松廣寺 眞影系譜之圖)」란 족자가 벽에 걸려있다. 이 족자는 불기 2958년, 서기 1931년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조게산송광사 진영계보지도(曹溪山松廣寺 眞影系譜之圖)」는 1931년 당시까지의 상황을 정리한 송광사의 진영 계보도로 이해된다. 이에 따르면 조선후기 송광사의 승려는 두 파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주류인 부휴파와 다른 하나는 비주류인 청허파라는 것이다. 부휴파는 부휴선수(1543-1615)를 파조(派祖)로 하여 벽암각성(1575-1660)이그 뒤를 이었다. 벽암각성은 송광사에서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를 증명사(證明師)로 간행하기도 했다. 송광사의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보물 제1909호,2,347매)은 송나라의 정원(淨源, 1011∼1088)이 기존의 『대방광불화엄경』 주석서를 적절하게 편차하여 120권으로 엮은 것인데, 이 불서를 송광사에서 1634∼1635년에 전질을 간행하였다. 권21 등의 권말에 남아 있는 간행 기록에 의하면, 각성(覺性, 1575∼1660), 계훈(戒薰), 태능(太能, 1562∼1649), 태호(太湖), 희옥(熙玉), 응묵(應默) 등이 주도하여 1634년(숭정 7년) 2월부터 1635년(숭정 8년) 5월까지 1년 4개월에 걸쳐 완성되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송광사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은 대장경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불서 목판 중에서 가장 방대하며 유일한 것이다. 이 불서에는 중요한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한 변상도(變相圖)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이후 1770년 「화엄경변상도」의 기초가 되었다. 벽암각성의 화엄경소 개판불사는 송광사의 화엄도량으로서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음을 알수있다.
3. 조계산 송광사 진영계보지도 송광사의 주류인 부휴선수-벽암각성으로 이어진 부휴파의 적전(適傳)은 진영계보지도에서 보여주듯이 부휴 7세손인 풍암당 즉 풍암세찰로 이어졌다. 비주류인 청허파로는 풍암당과 동시대의 승려로 두월당·청은당·설파당이 기록되어 있다. 풍암당 제자로 유악당·묵암당·응암당·제운당·벽담당이 쓰여있다. 여기서는 풍암당을 비롯한 묵암당·응암당·제운당·벽담당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묵암당 즉 묵암최눌(黙庵最訥)이 스승 풍암세찰(楓巖世察, 1688~1765)을 위해 지은 상찬(像讚)이 있는데, 풍암당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 당대 화엄학으로 이름이 높던 무용수연과 영해약탄스님의 문하에 들어 수학했다고 한다. 무용당이 입적한 후 영해당의 제자가 되어 부휴문중의 정맥을 계승했다. 풍암당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지만 그의 밑에서 4걸(四傑)로 불리는 묵암최눌, 응암낭윤, 제운해징, 벽담행인 등이 배출되었고 이들의 후손들은 20세기 전반까지 송광사를 이끌어 왔다. 풍암당의 영찬을 지은 묵암당은 제자 중 수제(首弟)로 꼽힐 정도로 강백이자 선사로서 이름이 높았다. 묵암당은 풍암당이 평소 준제삼매에 들어 어려움을 극복한 일과 강론으로 자신들을 가르쳤던 일, 그리고 다비 때 부처님의 백호와 같고 안요(眼耀)와 같은 두 개의 명주(明珠)가 나온 일 등을 찬문에 녹여 문중의 어른으로 후세까지 함께 하길 기원했다. 묵암당의 풍암당 찬문은 『대승선종조계산송광사지(大乘禪宗曺溪山松廣寺誌)』에 수록되어 전한다. 행장에 따르면 풍암당이 송광사 보조암에서 입적하자 스님의 진영을 동각(東閣)에 봉안했다고 하나, 현전하는 진영은 당시에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에 새로 그린 것이다. 풍암세찰의 수제자인 묵암당은 송광사의 풍암세찰의 문하에 입문하여 부휴선수-백암각성-취미수초-백암성총-무용수연-영해약탄으로 이어지는 부휴문중의 적전(嫡傳)을 이었다. 묵암당이 활동하던 시기 송광사에서는 1750년과 1759년에 영해당과 풍암당을 회주(會主)로 모시고 대규모 화엄대회를 연이어 개최할 정도 화엄사상이 꽃피었다. 묵암당은 이 두 번의 화엄법회에 참여해 성공적인 마무리를 이끌어내었고, 선대의 영향을 받아 <화엄경>의 요체를 정리한 「화엄과도(華嚴科圖)」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묵암당의 저술서로는 중요경전의 요점을 요약한 「제경회요(諸經會要)」와 시문집인 「내외잡저(內外雜著)」 등이 알려져 있다. 또한 운봉대지(雲峰大智)가1687년에 저술한 「심성론(心性論)」을 주제로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과 논쟁을 펼쳤던 내용을 정리한 「심성론」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출가한지 54년 되던 1790년에 송광사 보조암에서 입적하자 제자들은 묵암당의 진영을 보조암에 걸고 부도전(婢殿)에 승탑을 세웠다. 현재 송광사 풍암영각(楓巖影閣)에 모셔져 있는 묵암당의 진영은 입적 당시의 진영이 아니라 문손(門孫)인 용운처익(龍雲處益, 1813~1888)이 1858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새로 조성된 묵암당 진영에는 자찬이 적혀 있지 않고 묵암당의 유고집인 「묵암대사시초(黙庵大師詩抄)」에도 수록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1965년 송광사에서 <대승선종조계산송광사지(大乘禪宗曺溪山松廣寺誌)>(1965년 간행, 2001년 개정본 참고)를 간행하면서 사중에 전하는 영찬을 행장에 기록하면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응암당은 응암낭윤(應庵郞允, 1718~1794)으로 15세에 칠불암으로 출가해 18세에 송광사 풍암세찰(楓巖世察) 문하에 들었다. 풍암당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묵암최눌, 응암낭윤, 제운해징(霽雲海澄), 벽담행인(碧潭幸仁)을 세상에서는 “풍암하사걸(楓巖下四傑)”이라 불렀다. 응암당은 특히 사형(師兄)인 묵암당과 사이가 돈독했다고 한다. 응암당은 묵암당과 함께 제산(諸山)의 종장(宗匠)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으며, 운수행각을 마친 후 스승인 풍암당에게 돌아가 함께 건당식(建幢式)을 했다. 두 스님은 이후에도 서로 아끼며 일생의 도반으로서 삶을 같이했다. 응암당이 쌍봉사에서 개강을 하자 묵암당이 곁에 머물며 강학에 도움을 주었으며, 1750년에 풍암당이 영해약탄(影海若坦)을 회주로 청해 송광사에서 화엄법회를 개최하자 묵암당을 도와 화엄대회를 마무리했다. 또한 1759년 묵암당과 응암당은 풍암당을 회주로 모시고 송광사에서 화엄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송광사가 화엄도량임을 대외적으로 드높였다. 출가한지 62년 되던 1794년에 응암당이 입적하자 제자들이 정성을 모아 진영을 제작해 송광사와 칠불암에 모셨다. 20세기 초 송광사 부휴문도들 간에는 선대 스님의 진영과 승탑을 세워 추모의 예를 다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1911년 응암당의 7세손인 금명당, 금명보정이 함호(函湖) 장로와 뜻을 모아 스님의 진영을 새로 제작하고 풍암당 진영 아래 묵암당 진영과 좌우를 이루는 곳에 봉안하여 부휴문중에서 응암당이 지닌 위상을 견고히 했다. 응암당의 행장과 진영이 새로 조성된 사연, 그리고 영찬은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의 시문집인 「다송문고(茶松文稿)」와 「다송시고(茶松詩稿)」에 전한다. 부휴선수의 「대방광불화엄경소」의 개판불사(開板佛事)와 무용수연과 영해약탄 및 묵암최눌의 화엄강회로 이어졌다. 조선후기 송광사의 화엄학의 융성은 1770년(영조 46)에 「화엄경변상도」(국보 제314호)를 화엄전에 봉안하게 된다. 불화 하단의 화기에 따르면, 무등산 안심사에서 양곡의건(暘谷義建) 대선사를 증명(證明) 스님으로 모시고 화련(華蓮)스님을 비롯한 12명의 화승들이 동참해 그렸으며, 완성된 후 송광사로 옮겨와 화엄전에 모셨다고 한다. 시주자로는 광양에 사는 재가불자 4인과 함께 팔정(八淨), 제운해징(霽雲海澄), 벽담행인(碧潭幸仁) 등 여덟 분의 송광사 대종사 스님들이 참여했다. 이분들은 1759년 화엄대법회의 회주였던 풍암세찰(楓巖世察) 대사의 법통을 이은 스님들이다. 이 가운데 제운해징(霽雲海澄), 벽담행인(碧潭幸仁)은 풍암당 아래의 4걸(四傑)로 칭송된 스님이다. 1770년 「화엄경변상도」 불화 역시 화엄강백의 법통을 이은 스님들이 주축이 되어 발원한 대원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한편 그림의 제작을 주관했던 화련스님은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를 그리기 전에도 곡성 태안사 봉서암의 감로도(1759), 해남 대흥사 영산회괘불도(1764), 삼십삼조사도(1767)를 제작한 이력이 있는 조선 18세기 최고의 수화사(首畵師) 중 한 명이다. 화련스님을 필두로 총 열두 분의 스님들이 각기 어떤 역할을 맡아 이 불화를 그렸는지는 명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림의 어느 한 곳도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량이 우수한 분들로만 구성해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는 부처가 화엄경을 설파할 때 7곳에서 9번의 모임을 했다는 ‘칠처구회 (七處九會)’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해 표현한 그림이다. 세로 281cm, 가로 255cm의 비단 바탕에, 화엄경의 심오하고도 방대한 내용을 짜임새 있게 구현해 냈다. 각 설법회의 주존과 설주보살(說主菩薩), 그 외의 제 보살과 성중, 배경 등을 모두 묘사했으며 명문까지 더하고 있어 말 그대로 ‘그림으로 구현한 화엄경’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풍암영각에 모셔진 풍암당을 비롯한 풍암문도들의 진영과 「조계산송광사 진영계보지도(曹溪山松廣寺 眞影系譜之圖)」를 통해 조선후기 송광사의 승보(僧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휴파의 적전인 부휴선수-무용수연-영해약탄-풍암세철-묵암최눌·음앙낭윤·제운해징·벽담행인 등은 화엄강회를 열어 화엄학을 융성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화엄학의 분위기가 그림으로 그린 화엄경인 「화엄경변상도」를 조성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살필 수 있었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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