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망각의 호걸 선비, 김개(金漑) 게시기간 : 2020-05-26 07:00부터 2030-12-17 00:00까지 등록일 : 2020-05-2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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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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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의 주인공, 박수량은 ‘겉으로는 깨끗하고 부지런하나 내실은 인색하여 누추한 자들이 이마와 등에 식은땀을 흘릴 만한’ 청백이었다. 평소 남의 잘못을 감싸주고 포용하는 국량이 작고, 일처리에 여유가 없이 촉박하다는 기롱에도 꿋꿋하였다. 물론 가문의 후광은 없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훌륭한 학자관료의 감화를 입었다. 첫 벼슬로 경기 광주향교의 훈도가 되었을 때 스승으로 섬겼던 사람이 당시 광주 목사 김세필(金世弼)과 충청도 도사로 나가서 보좌하였던 관찰사 손중돈(孫仲暾)이었다. 두 사람 모두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판하다가 유배 파직된 적이 있었으며, 사심 가득한 부패 관료와 욕심 많은 토호들이 꺼려하였던 청백리였다. 김세필(1473∼1533)은 경전 암송과 문장에만 몰두하는 유생의 학습 과정을 성현도학(聖賢道學) 잠심공부(潛心工夫) 중심으로 개편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사습을 혁신할 뜻으로 성균관 유생을 중심으로 동아리를 결성하였다가 안팎의 음해에 시달렸던 조광조ㆍ김식(金湜) 등을 구원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겨울 중국 사신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어전에서 조광조는 군주의 변심 때문에 죽었음을 성토하다가 이천으로 유배를 당하고 충주에서 살았다. 손중돈(1463∼1529)은 경상도ㆍ함경도ㆍ충청도ㆍ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며 소박하고 간명한 서정으로 백성을 안돈시킨 치적을 올렸으며 대사헌ㆍ이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는 ‘직무가 아니면 남을 찾지 않고 관아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집에 들어갔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아 집안이 항상 고요하였다.’1) 일찍이 열 살에 부친을 잃은 생질 이언적을 아들처럼 아끼며 가르쳤다. 그가 세상 떠났을 때 박수량이 사간원의 동지들과 함께 조문하고 올린 제문의 끝부분이 다음과 같다.2) “무릇 조정의 대소 백관, 모두가 슬퍼하고 아파하네, 저희들은 혹 일찍이 막료를 지내고 혹 남기신 명성을 잇고자 하였건만, 이제 부음을 들으니 동량이 무너진 듯 망연자실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앞서 배운 앞선 스승이 있었으니 같은 고을 이웃 마을 출신으로 홍문관에 봉직하다가 고부군수로 내려왔던 김개(金漑)였다. 김개는 1495년(연산 1) 생원, 6년 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생원에서 10/100위, 문과에서 2/35위였다. 홍문관 박사로 봉직하며 풍파가 있었다. 임금의 경연 교재에 고개는 숙였으되 엎드리지 않고 내던지듯 해서 국문을 당했던 것이다. 두세 달 사간원 정언을 지내면서는 고기잡이 배ㆍ그물ㆍ댓살에 세금이 많아 바닷가 어민이 살 수 없다, 용렬하고 부패한데도 대비의 지친과 대군의 외척이라고 관작을 내릴 수는 없다는 소신을 거듭 피력하였다. 그리고 옥과현감이 되었다. 당시 나라는 엉망이었다. 연산군은 방종과 황음으로 흥청망청, 신하들은 묵언패(黙言牌)를 걸고 언제 목숨을 앗길까 전전긍긍. ‘어떤 임금이기에 파리 목숨 끊듯이 사람을 죽이는가!’라는 익명서까지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도에 유배 살던 김준손(金駿孫)ㆍ이과(李顆)ㆍ유빈(柳濱)이 중심이 되어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자는 반정 거사를 도모하였다. 1506년 8월 이었다. 김준손(1455∼1507)은 항우에게 살해된 의제를 추모하는 내용으로 노산군의 억울한 죽음을 통탄하였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던 김일손의 백형으로서 남원에 있었고, 이과(1475∼1507)는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앙갚음할 요량으로 대왕대비가 살던 후원 쪽으로 화살을 날리던 연산군을 제지하다가 옥과로 쫓겨 왔으며, 가장 나이 많고 과거가 빨랐던 유빈(?∼1509)은 내시까지 후원에서 말을 타는 방종을 발설했대서 형문을 받았었다. 광주목사 이줄(李茁)이 배반하였지만 다른 문제는 없었다. 당시 관찰사나 막료의 묵인 동조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여러 장수의 역할이 정해지며 9월 10일 남원 광한루에서 출정하기로 하였다. 도성에도 알렸다. 반정과 반란의 길목에서 혼선을 막고 도성의 호응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여의치 않으면 진성대군을 남으로 호위할 계획이었다. 내전에 대비한 것이다. 이 일을 옥과현감 김개가 담당하였다. 그런데 김개가 격서를 가지고 출발한 9월 1일 밤, 남도의 거사계획을 미리 통지를 받았던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 등이 궁궐을 장악하였다. 중종반정, ‘인심이 떠나면 국왕도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 일대 사변이었다. 1509년(중종 4) 2월 김개는 홍문관 부교리가 되어 조정으로 올라갔다. 원종공신 2등을 받았음에도 종5품이었다. 경연에서 국왕의 계구공신(戒懼恐愼)을 요청하고, 공신을 지나치게 우대하고 외척을 등용하는 인사의 난맥상을 통박하였다.3) “아무리 현명하고 능력이 있어도 임금이 특지로 등용할 수 없거늘, 윤여림(尹汝霖)과 같이 광패하고 미열한 사람이라니 무슨 말을 하오리까? 폐조도 외척 중에서 소인을 많이 썼다가 마침내 화패를 당하였습니다. 주상께서 어떻게 윤여림을 아셨겠습니까? 이것이 내정에서 청탁하는 폐단입니다.” 윤여림은 대비의 지친, 식견 없는 외척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정(金淨)과 회암사에 갔다가 우울한 심정을 건넸다.4) 김정은 충청도 보은 출신으로 처사학인 신영희(辛永禧)에게 수업하고 반정 이듬해(1507) 증광문과에 장원한 신예였다.
오는 겨울 귀양 휴가를 받았지만 부모 그리움에 초조하다는 성가시다는 것이다. 김정의 차운 수창은 열 수나 되었는데, 첫수가 다음과 같다.
세상 근심을 한 몸에 안고 살아가는 시름을 위안하며, 고향을 다녀오시게 한 듯싶다. 김개는 얼마 후 임금께 ‘어미에게 모이를 주어 먹이는 까마귀의 심정’을 호소하며 귀양을 간청하였다. 조정에 올라가서 몇 달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5) 김개는 부안현감을 거쳐 고부군수로 옮겼다가 양친을 잇달아 여의었다. 그리고 서해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묘 중에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병을 얻었다가 훈욕(薰浴) 나갔던 길이었다. 훈욕은 해수찜이다. 장례에 즈음하여 문과 동방으로 홍문관 동료였던 박상이 만사를 보냈다.6) 얼마나 사연이 촘촘하고 혼백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였으면 칠언율시 다섯 수, 280자나 되었을까? 우리 문장을 쌍벽이라 했는데 그대가 앞섰고, 잇달아 옥당에 올랐어도 훌쩍 뛰어넘기는 그대였지.… 처음 공부할 때 정성껏 진첩(晉帖)을 연마하여 호남의 종잇값이 치솟았더라.… 금오산 정기가 무등산에 잇닿았으니 하늘이 우리 두 사람에게 인색하지 않았네.… 김개는 일찍부터 문장이 뛰어났고 호남의 종잇값을 올릴 만큼 왕희지가 활동한 진나라 시대 명필의 글씨를 탁본한 서첩(書帖)을 연마하였는데, 박상 자신보다 앞서나가서 자신도 이에 따라 분발해 공부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김개는 결연하게 반정에 나섰으며 국정 득실을 살피는 경륜은 넉넉하였고 수령이 되어서는 백성을 안돈시켰다. “옷소매 뿌리치며 결연히 창의 격서 가져갔으니, 충용의 당당함은 청천(靑天)도 업신여길 만하였고, 그대 재주는 나라를 이끌만한데 나는 자잘하고. 그대가 북 울렸을 때 나는 전전긍긍 노심초사,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 맑고 높은 청렴결백을 우러렀던고, 덕정으로 천리 남녘 백성들은 항상 봄날이었지.” 그런데 김개는 너무 서책을 좋아하고 경전을 많이 사들였던 나머지 아들에게 물려줄 재산을 별로 남기지 않았다. 만사는 이렇게 끝난다. “풍류가 송두리째 사라짐을 통곡하며, 그대 후손에게 그대의 유업(遺業)을 알려주고 싶네. 천리마 아들이 본보기 삼으면 가업은 시들지 않을 것이야. 그댄 평생 황금이 귀한 줄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모든 재물을 경서로 바꿨나니.” 기실 김개의 아들에게 집안의 서책으로 열심히 배우고 익혀 가학 가업을 잇기를 당부하였던 것이다. 당시 김개의 아들은 무척 어렸는데 널이 바닷가로부터 고향집으로 옮겨오던 광경이 김인후가 지은 선부군 묘지에 전한다.7) “학사 김개는 젊을 때 이웃으로 부군과 함께 과거 공부를 하였다. 상중에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서해로 목욕 가서도 고치지 못하여 널이 돌아옴에 어린 고아가 홀로 뒤따라 왔다. 부군께서 혼자 중로(中路)로 나가 맞아들이고 통곡하며 널을 집에 들였다.” 김인후의 부친이 호상하였다는 것인데, 김인후는 당시 대여섯 살이었다. 김개는 지금 장성 황룡면 신호리 수산사에 모시는데, 그간 가승ㆍ행장 등이 없어져 생몰년을 알 수 없다. 《문과방목》에 본관과 부ㆍ조ㆍ증조만 있지 처ㆍ외가가 나오지 않는다. 박상의 만사에 ‘삼십에 공명을 이루고 사십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공명을 반정 참여, 공신책록으로 보면 1475년 전후 출생하여 1515년 여름에 세상 떠났음이 틀림없다. 당시 박상은 담양부사로 있었다. 박상은 김개를 위한 만사에서 ‘그대가 북 울렸을 때 나는 전전긍긍 노심초사’라고 적었지만, 전라도의 반정 거사에 은근히 협력하였다. 이른바 ‘우부리장살사건’이었는데, 비릿한 궁정에서 시작한다. 연산군이 각처의 기생을 뽑아드릴 때 애첩들의 세도는 가증이었다. 예종의 적자였음에도 너무 어려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야 하였던 제안대군의 여종이었던 장녹수가 유명한데, 전라도 나주 관기에서 뽑힌 숙화(淑華)도 만만치 않았다. 좋은 논 50결(結)과 30일갈이[三十日耕] 밭, 부안의 어장을 차지하고 이웃 종친의 집터를 뺏으려고 온 가족을 손발 묶고 칼을 씌워 가두었다. 언니를 첩 삼은 양반에게 목사까지 주선하였다. 숙화의 아비 김의(金依)도 대단하였다. 재산 강탈, 부녀자 겁탈 온갖 패악을 저질렀는데, 궁궐에 가서 당상관 품계를 받고 관마 타고 금의환향하며 고을마다 거나하게 뇌물을 챙겼다. 서둘러 술잔을 바치는 수령까지 있었다. 사람들은 김의의 의(依)에서 사람 인(人)을 떼고 윗도리[衣]로 업신여겼다. ‘윗’은 ‘웃’이라 우가 되어 소가 되고, 소는 또 쇠가 되었다. 김의가 우부리, 소부리, 쇠부리, 철부리로 쓰인 까닭이다. 부리는 날짐승의 날카로운 주둥이다. 그리고 숙화는 임금의 하얀 ‘아랫도리’[裳]로 조롱하며, ‘백견(白犬)’이라 불렀다. 어느 누구도 김의, 우부리를 징계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때 전라도 도사가 나주 금성관으로 잡아들여 모질게 형장을 쳐서 그만 목숨까지 앗았다. 바로 박상이었다. 당시 박상의 형장은 두부처럼 네 모서리가 각이 졌다고 ‘편적장(片炙杖)’이라 할 만큼 유명하였다. 그리고 ‘죽을죄’라면 피하지 않겠다며 당당하게 길을 잡았고 금부도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이 왁자하였다. 전라도의 이목을 온통 휘잡았던 것이다. 1506년 8월, 반정거사 모의가 한창일 때였다. 김개에게 보낸 만사 중의 ‘나는 전전긍긍 노심초사’에는 이런 사연이 잠겨 있다. 당시 일화가 전한다. 전라도의 남과 북을 가르는 갈재 넘어 입암산 아래 천원역 갈림길에서 바짓가랑이를 물어 당기는 고양이를 따라 숲속 좁은 길로 들어섰다가 금부도사에게 잡히지 않았는데 반정이 일어나 무사하였다는 것이다. 1) 『중종실록』 65권, 24년 4월 10일.
2) 『아곡실기』, 「祭孫畏齋仲暾文」. 외재(畏齋)는 우재(愚齋)의 오기이다. 이 제문은 金義貞이 작성하였다(『潛庵逸稿』 권4, 「祭孫愚齋仲暾文」). 여기에 “在諫院時 與同僚共奠”란 세주가 있다. 3) 『중종실록』 권7, 4년 2월 3일 및 『중종실록』 권8, 4년 4월 16ㆍ21일 및 5월 12일 4) 『冲庵集』 권1, 「次茂沃然字韻」 및 「附茂沃詩」. 무옥은 김개의 자. 5) 『冲齋集』 권4, 「일기」 중종 4년 6월 13일 “副校理金漑請歸養曰 臣父母年踰七十 疾病纏身 臣以獨子 遠離從仕 不勝烏鳥之情 請歸養. 傳曰 近地守令除授” 6) 朴祥 『訥齋集』 권4, 「茂沃挽詞」 7) 『하서전집』 권12, 「先府君墓誌」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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