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국왕의 친인척 관리, 정조가 김한로에게 보낸 간찰 게시기간 : 2020-05-28 07:00부터 2030-12-01 00:00까지 등록일 : 2020-05-2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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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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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목록> 역사 자료의 가치는 여러 차원에서 평가될 수 있다. 골동 가치의 측면에서는 별 것이 아니더라도 사료적 가치는 다를 수 있다. 공책이나 두루마리에 베껴진 자료는 그 내용에 따라서는 사료적 가치가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소개되는 자료를 처음 정리한 사람은 이 자료의 이름을 ‘선물 목록’이라고 달았다. 첫 단락의 말미에는 풀솜[雪綿子] 세 근(三斤), 표피(豹皮) 한 령(一令), 초피 사모 이엄(貂皮紗帽耳掩) 한 부(一部)라고 쓰여 있고, 두 번째 단락 말미에는 별지(別紙)라고 하고서 유록색 구름무늬 갑사, 관대로 쓸 것[柳綠雲紋甲紗冠帶次] 한 필(一疋), 남색 구름무늬 비단, 내공으로 쓸 것[藍雲紋紗內供次] 한 필(一疋), 표피(豹皮) 한 령(一令), 후추[胡椒] 두 말(二斗), 풀솜[雪綿子] 세 근(三斤), 인삼(人蔘) 한 량(一兩)이라고 목록을 제시하였는데 물목(物目)의 종류도 많고 또 마지막에는 ‘내탕에서 수송하라[內帑輸送]’는 문구까지 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선물을 보내는 목록으로 착각할 만도 하다. 그런데 국왕의 사사로운 물품 창고인 내탕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보통의 기록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료는 바로 정조가 정순왕후의 숙부인 김한로에게 보낸 편지를 등서한 두루마리 권축(卷軸)이다. 김한로의 후손이 정조로부터 받은 어찰을 귀중하게 생각하여 원본의 내용을 정서하여 놓은 것이다. 1790년(정조14)부터 김한로가 죽기 1년 전인 1798년(정조22)까지 정조가 김한로에게 보낸 간찰 19통과 윤음(綸音) 1건이다. 1790, 91년에 각 한 통, 93, 94, 95년에 각 2통, 96년에는 4통, 97년에는 3통, 98년 마지막 해에는 4통이다. 몇 통을 빼고는 대부분 단오나 동지, 연말에 부채, 책력(冊曆), 세의(歲儀)를 보내면서 쓴 간찰이다. [그림1] 정조가 김한로에게 보낸 간찰 등서축(謄書軸) 1) 此等處裁抑 未必不爲玉成之擧 : 庚(경술, 1790, 정조14)臘念六 煩欠 2) 長連使君 案右 : 卽 煩欠 [辛亥(1791, 정조15) 6월 일] 3) 金參議 案右 : 癸(계축, 1793, 정조17)臘之念 欠 4) 金副摠管 台座 : 卽日 欠 頓 [癸丑十二月二十七日] 5) 泥峴 案右 : 卽 欠 [甲寅(1794, 정조18)十一月二十八日] 6) 泥峴 台案 : 卽 欠 草 [甲寅十二月十六日] 을묘년 2월 화성에 행차하여 혜경궁 회갑연 7) 泥峴 執事 : 卽 欠 拜 [乙卯(1795, 정조19)十一月十一日] 8) 知中樞 台座 : 卽 欠 [乙卯十二月初十日] 9) 泥峴 台座 : 卽 欠 頓 [丙辰(1796, 정조20)五月初一日] 10) 泥峴 調座 : 卽 欠 頓 [丙辰十一月十六日] 11) 泥峴 執事 : 卽 欠 草 [丙辰十一月二十三日] 12) 泥峴 入納 : 卽 欠 拜 [丙辰十二月十二日] 13) 泥峴 金判書 執事 : 卽 頓 [丁巳(1797, 정조21)五月初一日] 14) 金判書 執事 [丁巳十月二十七日] 15) 泥峴 執事 : 欠 頓 [丁巳十二月十二日] 16) 泥峴 執事 : 卽 欠 頓 [戊午(1798, 정조22)正月十七日] 17) 宣諭大臣禮堂綸音 18) 泥峴 執事 : 端陽前三日 欠 [戊午五月初一日] 19) 泥峴 執事 : 卽日 頓 [戊午十一月十一日] 20) 泥峴 執事 : 卽 欠 草 [戊午十二月初十日] <정순왕후와 경주김씨> 66세의 영조에게 15살에 시집가서 왕후가 된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耈, 1723~1769)에게는 한기(漢耆, 1728~1792)와 한로(漢老, 1741~1799) 두 동생이 있다. 김한로는 1790년 6월부터 1791년 8월까지 장연 현감에 재임하였다. 그러므로 1), 2)번 간찰은 장연 현감인 김한로에게 정조가 보낸 간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각 간찰은 수신자를 김 참의(參議), 김 부총관(副摠管), 지중추(知中樞)라고 관함을 붙여서 칭하였지만, 실직에 있지 않을 경우에는 김한로가 살고 있는 동네인 진고개 니현(泥峴)을 칭하여 ‘니현 집사’라고 하였다. 발신일과 발신자는 ‘卽 煩欠’이나 ‘卽 欠 草’, ‘卽 欠 拜’, ‘卽 欠 頓’이라고 하여 그날, 이름은 적지 않고 ‘초한다’, ‘절한다’, ‘조아린다’ 등으로 적어서 날짜나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국왕의 간찰이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발신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날짜는 수신자인 김한로가 첨지를 붙여 적어두었다. 다행히도 5)번 간찰의 원본을 우연하게 볼 수가 있어서 이 간찰 등서가 정조의 간찰을 등서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5)번 간찰의 원본은 아래와 같다. 다른 간찰의 원본은 어떻게 산일(散逸)이 되었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泥峴 案右] 明年之慶 庖晝以後所罕有 而新曆載編 欣祝萬萬 近日/起居淸重/ 宮蹕將戒 燭下姑此 卽 欠 [甲寅至月二十八日] [니현 안우] 내년의 경사는 포획 이후 거의 없었던 일입니다. 새 책력이 편집되었으니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이 충만합니다. 요즘 지내시기는 좋으신지요. 행차를 곧 준비하여야 하니 촛불 아래에서 이만 줄입니다. 즉 흠 [갑인년 11월 28일] [그림2-1] 정조가 김한로에게 보낸 간찰(갑인년 동짓날) [그림2-2] 간찰 등서축(네모 안에 갑인년 동짓달 간찰 등서) 모두 40자에 불과한 짧은 간찰이다. 내년의 경사란 정순왕후가 51세가 되고 혜경궁이 61세가 되는 경사스러운 해라는 뜻이다. 새해의 양기(陽氣)가 시작되는 갑인년 동짓날에 보낸 편지라서 을묘년 새해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 해에 정조는 화성 성역(城役)을 시작하고 그 다음해에는 화성 현륭원에 행차하여 혜경궁의 환갑연을 베풀었다. ‘포획’이란 복희씨가 팔괘를 그린 것을 말하는데, 역사가 시작된 이래 거의 없었던 일이라고 과장하여 표현을 하였다. 또 동짓날은 다음 해의 책력을 반포하는 날이니 새해의 출발이 시작된다는 의미도 있다. 이날 정조는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진시(辰時, 오전 8시경)에 창덕궁을 나서서 종가(鐘街)에서 연(輦)을 멈추어 잠시 머물며 종묘(宗廟), 경모궁(景慕宮), 의소묘(懿昭廟)를 봉심하도록 하였고 선희궁(宣禧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에 나아가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이 편지는 동지 행례 거둥을 하기 직전에 써서 보낸 것이다.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暎嬪) 이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고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淑嬪) 최씨를 모신 사당,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진종(眞宗, 영조의 첫째 아들)의 생모인 정빈(靖嬪) 이씨의 사당이다. 혜경궁의 환갑을 맞이하여 영조의 친어머니, 사도세자의 친어머니, 자신이 뒤를 계승하여 추존한 진종의 친어머니 사당을 전배하였다.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면서 동시에 자전(慈殿)인 정순왕후의 숙부 김한로에게 동지 제사의 재계를 하는 와중에도 문안 편지를 올리는 일을 잊지 않은 것이다. 이 간찰 이외에도 대부분의 간찰에서는 자전, 동조(東朝)로 칭하는 정순왕후의 안부를 전하고 또 상대방의 안부를 물으며, 나아가 윤음을 내려 특별히 친인척을 우대한 조치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또 세시(歲時)에 맞추어 적절한 선물을 보내고 있다. 정조는 즉위 후에 자전(慈殿)인 정순왕후와 자궁(慈宮)인 혜경궁 두 분을 모셔야 했다. 어머니 혜경궁 보다 할머니 정순왕후는 열 살이 적다. 열두 살 많은 할머니와 스물두 살 많은 어머니를 모신 정조는 할머니의 유일한 숙부인 김한로를 위하여 단오나 동지, 연말이 되면 문안 편지와 함께 부채나 책력, 세의를 잊지 않고 보내고 있다. 잘 알듯이 정조는 자신의 외가인 풍산 홍씨 인척들에게도 많은 편지를 보내서 지금까지 그 자료들이 상당한 분량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혜경궁의 지시로 혜경궁의 동생인 홍낙윤(洪樂倫)이 정리한 예찰과 어찰은 모두 58첩 2094통이나 된다고 한다. 물론 정조가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보낸 모든 간찰이라고는 해도 상당히 많은 분량이다. 외할아버지 홍봉한, 작은 외할아버지인 홍인한, 외삼촌인 홍낙인, 홍낙신, 홍낙임, 홍낙윤과 사촌이 되는 홍취영, 홍후영 등에게 보낸 것들이다. 40여 년간 2000여 통의 편지가 남아 있으니 1년에 50여 통 이상의 편지를 외갓집에 보낸 것이다. 심환지, 채제공 등 측근들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정조는 편지를 통하여 여러 정치 세력들을 컨트롤하고 친인척들을 관리하기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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