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담대한 도전, 박상과 조광조 게시기간 : 2020-06-02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6-0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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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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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朴祥, 1474∼1530)은 광주 서창 절골마을에서 생장하였다. 장성 백암산에서 발원하는 황룡강과 담양 가마골에서 시작하는 극락강이 만나는 들판이 넉넉한 땅이다. 두 살 터울 아우 박우(朴祐)와 함께 형님 아래에서 공부하고 1496년 생원이 되고 1501년 문과에 들었다. 아우가 진사에 장원하자 노비 농토 서책을 내려주며 일렀다.1) “즐거움 중에 슬픔이 뒤따르는 법, 나와 그대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님에게 문장을 배웠다. 지난번 내가 진사 되고 문과에 발탁되니 어머니는 좋아하고 형님은 슬퍼하고 나와 그대는 울었다. 왜? 부친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진사 수석이라니 영광이라면 영광이고 경사라면 경사네만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지난번엔 아버지 때문에 슬펐고 이번에는 형님 때문에 슬프구나. 장차 그대 대과에 발탁되면 또 슬퍼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대 문과에 급제하면 어머님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까, 한 것이다. 형제는 같이 울었다. 그런데 하필 자신의 생일잔치 때였다. 이렇듯 즐거운 날조차 써늘하였던 박상, 세상 보는 눈을 부릅떴다. 「깔깔 웃다」가 다음과 같다.2)
실로 부정과 탐욕, 기만과 불법에 분노하고 좌시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백성을 아꼈음이었다. 네모서리 각진 형장을 남발한 까닭이다. 중종반정 직후의 조정, 임금은 자신을 보위에 올린 공신의 위세에 슬금슬금, 그러면서 왕실 외척을 챙겼다. 군주와 공신의 야합, 묵계였다. 참을 수 없었던 박상, 거듭 아뢰었다. ‘능력도 없는 공신 외척에게 관직을 내리면 폐조(廢朝)와 다를 바 없다.’ ‘공신에게 상으로 벼슬을 내린다고 인심이 진정되거나 복종하지는 않는다.’ ‘예로부터 반역은 공신에서 많이 나왔으니 공신을 믿을 수 없다.’ 국왕과 공신 외척이 꺼리고 싫어하였다. 지금 서천에 속하는 한산, 군산에 들어간 임피의 수령을 맡았고, 1512년에는 담양부사가 되었다. 1515년 가을, 강천사 계곡에서 순창군수 김정, 잠시 담양 창평 고향으로 휴가 나왔던 사헌부 장령 유옥(柳沃)과 회동하였다. 유옥(1487∼1519)은 15살 생원, 1507년 21살에 문과에 장원한 기재(奇才)였다. 24살에 무안현감으로 나갔는데 ‘향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마음에 품고 따르는’ 치적을 올렸다. 세 사람은 국왕의 여론 수렴 구언(求言)에 따라 상소를 작성하였다. 먼저 국왕이 조강지처 신씨(愼氏)와 부부인연을 끊었던 내막을 밝혔다. 신씨는 ‘사위를 위하여 처남을 버릴 수 없다’고 하여 죽임을 당했던 신수근(愼守勤)의 따님, 반정 이튿날 즉위식을 앞두고 박원종ㆍ유순정ㆍ성희안 세 공신에 의하여 궁궐에서 쫓겨나 사가로 내침을 당했었다. 훗날 원자가 생겨 왕위를 잇게 되면 폐비 윤씨 사사가 빚어낸 것과 참화가 닥칠 수 있다고 지레짐작하여 국왕을 강제 이혼시킨 것이다. 상소는 또한 신왕의 즉위를 알리는 주문의 후안무치한 거짓을 들췄다. 당시 중국에 ‘선왕은 간질병을 걸렸고 세자가 죽자 양위하였으며 신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알렸었다. 인심이 귀의한 신왕을 하늘의 버림을 받았던 폭군의 승계자로 만들고, 신씨를 축출한 사실을 숨긴 것이다. 결론은 간명하였다. 공신에게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불충의 죄로 신씨를 중궁으로 삼자! 당시 중궁전은 비어있었다. 그해 봄 원자 훗날의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는 산통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었다. 이른바 신씨복위소(愼氏復位疏), 세 사람이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인수(印綬)를 계곡에 걸어두었대서 ‘삼인대(三印臺)상소’라고도 한다. 그러나 상소를 봉함할 때 두 사람은 유옥의 서명을 만류하였다. “우리 모두 노모가 계시는데, 우리에겐 아우가 있어도 그대는 독자가 아닌가!” 파장은 컸다. 중종은 ‘큰일이다. 국가 대사를 어찌 소신의 말을 듣고서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사헌부ㆍ사간원의 수장이던 권민수(權敏手)와 이행(李荇)은 ‘음흉하고 사특한 흉소(凶疏)ㆍ사론(邪論)’으로 탄핵하였다. 이들은 한때 연산군의 핍박을 받았지만, 신씨를 쫓아낸 공신과 중궁전을 차지하려는 후궁 외척들과 얽혀있었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중견 신료들은 구언에 따른 언론은 처벌할 수 없다는 원칙론을 내세웠으나 역부족, 두 사람의 유배를 막진 못하였다. 신씨복위소가 올라간 날의 사론이 다음과 같았다.3) “이 논의는 매우 올바른 것인데도 좌우의 의논이 분분하여, 서로 시비하다가 나중에는 양시양비(兩是兩非)로 번져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사림이 반목하여 마침내 참혹한 화에 이르렀다.” 참혹한 화는 4년 후 기묘사화를 말한다.
삼인대비 시대의 변화를 생각하는 신진유생, 사림관료는 신씨복위소를 국왕부터 인륜에 모범을 보이고 사대외교에서 국가의 체통을 지켜야 공신정국을 마감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는 시대선언으로 받아들였다. 그해 늦가을 실시된 알성시도 어수선하였다. ‘대간이 언론을 죄주고 언로를 막은 것은 잘못’이라고 논술한 유생이 30여 인이나 되었던 것이다. 시험관을 배출하는 사헌부ㆍ사간원과 국왕의 조치를 비판하는 제술은 합격 출세, 일신 영달보다는 언론의 진실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런 유생이 급제하였다. 당당한 행보, 담대한 도전의 시작, 그중에 조광조가 있었다.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 종6품 벼슬을 받자 ‘이록(利祿)에 관심이 없어 대과를 하지 않다가 사지가 되었다’며 알성문과에 응시하였었다. 조광조(1482∼1519)는 함경도 동북면 수복, 위화도 회군, 조선 개국 그리고 무인정사(戊寅定社)에서 공훈을 세운 혁혁한 가문의 후예였다. 본래 함경도 용진에 살았고 이성계 가문과 혼인을 맺었었다. 그런데 조부가 안평대군의 당여로 지목되어 훗날 복권되기는 하였지만 십여 년 극변안치를 당하였고 부친은 과거에 들지 못하여 벼슬이 낮았다. 열아홉 살에 평안도 어천역 찰방으로 나간 부친을 뵈러 가며 묘향산 북쪽 희천에서 유배 살던 김굉필(金宏弼)을 스승으로 삼았다. 무오사화가 일어난 1498년이었다. 김굉필(1454∼1504)은 성현의 뜻을 마음에 담은 잠심공부, 벼슬보다는 자아 완성이 먼저라는 ‘선수기후치인(先修己後治人)’을 주창한 ‘도학파’의 선구였다. 그것은 사회기강 문란, 국가 왕실과 훈구공신의 사치와 탐욕을 비판하는 도덕운동, 실천담론이었다. 1500년 평안도에 기근이 들자 배소를 전라도 순천으로 옮겼다가 4년 후 위선(僞善)으로 모함한 임사홍의 간계에 걸려 교수형을 당하였다. 조광조에게 김굉필을 위한 만사나 제문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부친상을 마치고 묘실(墓室)을 떠나지 않고 공부에 몰두하여 일가친척은 ‘세속과 어긋나서 남의 비방을 사고 있다’고 꾸짖고, 지인들조차 ‘광자(狂者)’ ‘화태(禍胎)’로 지목하며 왕래를 끊었을 정도였다. 1510년 진사시에 장원하였는데, 이때의 「봄의 노래」는 명품이다.4) ‘음과 양이 뒤바뀌며, 리와 기의 묘한 요체가 깃드니, 리가 기를 타며 서로 감응하네’로 시작하여 ‘하늘에 봄이라 사람에겐 인이 있어, 그 모든 근본이 태극이니 다르고도 같다네. 이를 누가 알리? 바로 무극옹(無極翁)일세’로 마쳤다. 우주자연의 운동 변화와 인간의 윤리 실천 생명 존중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되새긴 것이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첫 구절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의인화로 반전한 대목이 인상 깊다. 조광조는 함경도 경원부사로 가는 조원기(趙元紀)를 송별하며 ‘조정에 있으면 임금을 바르게 하고 고을에 나가면 백성에게 교화를 베풀어야 함’을 밝혔다.5) 임금을 바르게 한다는 ‘격군(格君)’은 맹자의 ‘대인은 임금의 마음 잘못을 고쳐야 함’에 연원이 있는데, 공자 또한 ‘임금이 잘못하면 숨기지 말고 그 뜻을 거스르도록’ 가르쳤다. 조원기(1457∼1533)는 무오사화 직전 사관으로 재임하다 연산군의 사초 열람을 막았다가 파직되고 갑자사화 때에 형장을 받고 외방에 유배를 당했었는데 바로 숙부였다. 숙부에게 ‘격군과 교화’가 학문관료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한 것인데, 출사하기 전 1514년이었다. 처음 성균관 전적의 보직을 받았던 조광조는 사간원 정언으로 옮기자 ‘언론을 탄압하고 언로를 봉쇄한 대간’을 탄핵하였다. 신씨복위소의 처분이 잘못되었음을 아뢴 것인데, 중종이 선뜻 받아들이며 삼사의 진용을 바꾸었다. 정국이 일변하며 기묘사림이 포진하였으니, 신씨복위소 석 달만이었다. 이때 대사헌 김안국(金安國)은 문장과 학술, 시무의 경륜이 탁월하였으며, 대사간 이장곤(李長坤)은 연산군이 무비재략(武備才略)이 두려워 다시 잡아들이려고 하자 유배지 거제에서 함흥까지 망명하여 소 잡고 가죽신 만드는 양수척(楊水尺)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다. 김굉필의 문인들이었다. 기묘사림은 격군안민(格君安民), 치군제민(致君濟民)을 자임하였다. 임금에게 사람을 살리는 하늘의 뜻,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하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성(聖)을 마음에 담아야 함을 거듭 진달하였다. 군주일심(君主一心), 군주성학론(君主聖學論)이었다. 또한 군주 홀로 다스릴 수 없는 나라, 벼슬로 잇속을 챙기는 소인을 물리치고 현명하고 양심적인 군자를 끌어들여 함께 다스릴 것을 요청하였다. 임현사능(任賢使能), 군신공치론(君臣共治論)이었다. 조광조는 ‘하늘이 백성을 위하여 임금과 신하를 두었으니, 백성을 마음 삼아야 함’을 거듭 설파하였고, 중종 또한 적극 동의하였다.6) “하늘이 임금을 낸 것은 백성을 위해서이다. 임금이 혼자서 다스릴 수 없으므로 관(官)을 설치하고 직(職)을 분담하였으니, 이 역시 백성을 위해서이다.” 한편 『소학』 교육과 향약 실천을 국가정책으로 채택하고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강조한 『이륜행실도』를 널리 반포하였다. 나아가 농사와 양잠 서적, 『벽온방(辟瘟方)』 『창진방(瘡疹方)』과 같은 의약 서적을 우리 글로 풀이하여 대량 보급하였다. 요즘 말로 국민과 함께 하는 도덕실천 교육운동, 산업 발전, 전염병 방역이었다. 또한 사습을 혁신하고 학문기반을 조성하였다. 김굉필은 유보되었지만, 정몽주가 절의와 도학의 사표로 문묘에 배향되고, 북송 성리학의 원전과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을 수입하여 간행 보급하고자 하였다. 『전습록(傳習錄)』도 이때 들여왔다. 그것은 사류집단의 각성을 촉구하고 학술 연구를 촉진함으로써 군주와 백성의 중간자, 균형추로서의 선비, 공부하는 삶의 위상을 높이려는 사상문화기획이었다. 이러한 정론과 사업은 개국 1세기를 지난 나라의 그간 적폐를 해소하고 시대의 변화 발전에 부응하는 조치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영상 정광필을 비롯한 정승 판서도 동의하였다. 특히 고관대작ㆍ도고상인ㆍ지방토호 등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자는 ‘한전법(限田法)’에도 우호적이었다. 비록 소유토지 한계가 50결, 천 두락 수준으로 결정되어 처음의 취지와는 동떨어졌지만, 자영농을 보호하고 농민개간을 장려하려고 하였던 점에서 ‘부익부빈익빈’이 당연한 기득권에는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대신 그룹은 사림의 공론에 따라 선발한 인재에게 응시기회를 부여한다는 현량과(賢良科)에는 미온적이었다. 기왕 천거제가 정승대신, 외척공신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로 운영되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경국대전’에 규정된 과거제의 근간을 뒤흔들 파괴력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기묘사림과 대신 세력은 국가 성헌(成憲) 체계를 보수(保守)할 것이냐, 변통(變通)할 것인가를 두고 갈렸다. 굳이 말하면 운영 개선 차원의 개량주의와 변법을 통한 전면 개혁의 갈등이었다. 과거사 인식과 해법도 달랐다. 당시 조정은 세조의 ‘임금 아닌 자의 생모가 종묘에 신주를 둘 수 없고 문종과 같이 묻힐 수 없다.’는 의지에 따라 폐출되었던 현덕왕후를 복위시켰으며, 노산군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 제사 지내고 후사를 정하였다. 그러나 조광조ㆍ기준 등이 ‘사육신 충신론’을 제기하자 대신 그룹과 상당수 신료는 당혹스러웠다. 세조를 폭군으로 만들고 왕통을 훼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량과 개혁의 틈새를 수구파 공신외척이 파고들었다. 국왕 또한 조광조 등이 왕실 신앙을 이기심의 발로로 몰아붙이며 기어코 소격서 철폐를 관철시키자 피로감을 토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를 거짓 공훈으로 더럽힐 수 없다는 명분을 앞세운 ‘위훈삭제(僞勳削除)’ 즉 ‘공신개정(功臣改正)’이 추진되었다. 반정 과정에서 아무런 공훈을 세우지 않았던 공신을 도태시키고 그들에게 내린 많은 재산까지 환수토록 한 것이다. 국왕도 재가하였다. 이때 공신외척이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국왕을 흔들며 이들의 사주를 받은 훈련원 병사가 시위하였다. 마침내 밀지가 내렸으니 1519년 겨울 11월 15일 신무문(神武門)의 정변, 기묘사화였다. 1) 『訥齋集』 별집 권1, 「육봉에게 별급하며 적은 글 別給六峯文」.
2) 『訥齋集』 속집 권1, 「呵呵」 본래 ‘크게 웃다 荷荷’였는데 속집을 편집한 숙종의 영상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제목을 고쳤다. 3) 『중종실록』 22권, 10년(1515) 8월 8일 4) 『靜菴集』 권1, 「春賦」 “惟陰陽之交變兮 寓理氣之妙要 理乘氣而相感兮…遂作歌曰 在天兮春 在人兮仁 皆本太極 異而同兮 識此何人 無極翁兮” 5) 『정암집』 권1, 「送叔父赴慶源鎭」 “在朝而格君 處藩而宣化” 6) 『정암집』 권3, 「檢討官時啓六」 “夫君臣者 爲民而設也. 上下須知此意 晝夜以民爲心 則治道可成”; 『중종실록』 32권, 13년(1518) 4월 25일.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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