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시초대석] 작법으로 읽는 한시 절구(7) 묻노라[爲問] 게시기간 : 2020-06-04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6-0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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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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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제(題)는 머리 부분에 쓰는 것을 말한다. 머리는 위쪽이나 앞쪽을 의미하므로, 책머리, 벽, 기둥의 위쪽에 쓰는 것을 제라고 한다. 따라서 기제(寄題)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 있으면 써서 보내 주어 위쪽에 걸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인사는 의정부(議政府)의 사인(舍人)들이 근무하던 관청이다. 사인은 조선 시대 정4품 관원으로, 의정부 정승들을 보좌하면서 정승의 결재 사안을 각 관청에 전달하는 역할 등을 담당하였다. 그 사인사 경내에는 연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배꽃이 많아 이정(梨亭)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사인(舍人)은 직무가 한가하였으므로 매양 선생(先生), 즉 전직자들을 청하여 기녀들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는 일이 많았는데, 연못과 누대의 경치가 좋아 재상들도 자주 참석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신선이 산다는 영주(瀛洲)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는 기록이 청천당(聽天堂) 심수경(沈守慶)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인다. 제1구에서는 술동이에 담긴 죽엽주를 백옥 술잔으로 들이키던 모습을 묘사하여 즐거운 호사가 있었음을 제시하였다. 제2구에서는 부질없이 돌아본다는 표현을 통해 제1구에서 제시하였던 호사가 현재의 일이 아닌 옛날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는 아쉬움을 보여주었다. 제3구는 절구에서 전환이 일어나는 자리이다. 제2구에서처럼 아쉬움으로 끝내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곳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상징적인 것이 바로 배꽃이다. 전술한 것처럼 사인사 연정 자리에는 원래 배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배꽃을 대표적으로 거론하였다. 연꽃이 많아 연정이라고 이름을 고쳤던 만큼 연꽃을 떠올려도 될 법하지만, 여기에는 시의 작법과 관련한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시에서는 제목에 쓰인 글자를 다시 본문에서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를 제목의 글자를 침범했다는 의미로 ‘범제(犯題)’라고 한다. 주로 첫 구절에 쓰일 때 이 규칙을 적용하는데, 여기서는 소재를 선정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제4구에서는 그 꽃이 피었는지 아닌지를 묻는 형식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개미개(開未開)’라는 표현은 ‘피었는가? 아직 피지 않았는가?’라는 의미로, 한시에서 어떤 사실의 여부를 물을 때 쓰는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옛날의 아름다운 일을 회상하면서도 감정이 격해지지 않고 하나의 경물을 대상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한시 비평으로 유명한 조선의 허균(許筠)은 역대 명시를 추린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이 시를 ‘정감이 있다.[有情]’라고 평하였다. 제4구에 쓰인 ‘위문(爲問)’이라는 시어는 ‘묻노라’, ‘물어보자’라는 의미이다. ‘시험 삼아 한 번 물어 보련다’는 의미의 시문(試問), 차문(借問), ‘묻고자 한다’는 의미의 ‘욕문(欲問)’이라는 시어와도 용법이 유사하다. 절구의 제3구에 쓰일 때는 제3구에서 묻고 제4구에 그 답을 제시하는 자문자답의 형식을 취하거나, 제3구와 제4구가 모두 의문형으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하는 게 일반적이다. 제4구에 쓰일 때는 물음만 던지는데, 구절 마지막에 여부를 묻는 말이 따라오는 형식이 많다.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고도 많은 여운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수법이다. 이 시의 작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던 강혼(姜渾, 1464~1519)이다.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또는 동고(東皐)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8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로 인해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문신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장류(杖流)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나 곧 도승지에 올랐고, 중종반정 때는 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에 봉해지고 우찬성에 올랐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에 『목계일고(木溪逸稿)』가 있다. 점필재 문하의 동문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과 막역한 사이였고 문장으로도 나란히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탁영과 수헌은 사화 때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을 당한 반면, 목계는 시를 좋아하던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였다. 이 때문에 1506년 중종반정을 주동하던 박원종(朴元宗) 등은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였고, 반정 이후에도 ‘폐조(廢朝)의 총애받던 신하[倖臣]’라고 탄핵을 받았다. 심지어 명종 연간에 국가에서 문집을 간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인물됨을 문제 삼아 반대하는 여론이 많아 취소되기까지 하였다. 특히 연산군 말년 왕이 아끼던 궁녀가 죽자 지나치게 슬퍼하는 왕을 위로하기 위해 애사(哀詞)와 재소(齋䟽)를 지어 왕의 격찬을 받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이 일로 인해 사림으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같은 일로 인해 문장가로서의 명성에 흠집이 나고 관료로서의 행보에 어려움이 있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이다. 그 역시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여 당시에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역시 궁녀를 잃은 연산군을 위로하는 시를 지었다가 관로가 막혔다.
시 자체로 보면 상대의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 수작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애도시 한 수 때문에 그토록 기구한 운명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본인도 알았을까? 어명에 따라 지어 올린 것[製進]일 뿐인데 이처럼 혹독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우선은 당시의 이른바 신진사림(新進士林)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점필재 문하의 훌륭한 인재들이 처참하게 화를 당한 이후라 정서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겠다. 또한 문장으로 세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들인지라 연산군이라는 혼군에게 총애를 받는 것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역사는 반복되고, 전대의 일은 현대의 거울이 된다. 위 시에 쓰인 ‘위문(爲問)’이라는 시어처럼 한 번 물어보자. 어쩌면 내심 즐기고 있는 지금의 일들로 인해 훗날 이런 곤경에 처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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