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17세기 서예사의 표상,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 게시기간 : 2020-06-06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6-05 13:3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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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대학자로 개혁 정치를 추진했던 정암 조광조 선생(1482∼1519). 그 개혁의 여파로 일어난 기묘사화. 결국 개혁의 꿈은 스러지고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달포만에 사약을 받는다. 1519년 기묘년, 중종 14년. 뒷날 조정암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이 빗돌을 세운다. 1667년 정미년, 현종 8년. 149년째 되는 해. 유배지의 자취를 기록하고 추모하기 위한 비석.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 다시 313년이 흘러 1979년 문화재로 지정된다. 명칭은 화순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유허비. 전라남도 기념물 제 41호. 유허추모비, 유허비, 기념물의 용어가 보인다. 비문의 내용은 조광조의 출자와 급제, 기묘사화와 유배, 능주의 적거살이와 사약, 유허비의 건립 등에 대한 내력을 적고 있다. 비석을 세운 곳이 적거하던 집이고 명을 마친 옛터[遺址]라는 점,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지 149년째가 되어서도 선비들이 흠모가 이어지며, 정포은(鄭圃隱)과 김한훤(金寒暄)이 있었지만 정호와 주희의 연원을 계승하고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으로서 학문의 표준을 삼은 것은 선생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대사헌 재임 때인 11월 기묘사화와 유배, 관노 문후종의 집에서의 적거, 12월 20일의 사약에 의한 죽음, 금상 정미년(1667, 현종 8)에 능주 목사 민여로가 비를 세웠다는 내용에 이어 끝에 명(銘)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비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글을 짓고 쓴 이를 보자. 비문을 지은이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본문 글씨를 쓴 이는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전서 글씨는 민유중(閔維重 , 1630~1687)이 썼다. 학자이자 서예가로서 당대에 뛰어난 활동을 한 인물이다. 비문상의 직품을 보면 송시열은 의정부 우찬성 겸 성균관 좨주 세자이사, 송준길은 원임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좨주 세자시강원 찬선, 민유중은 충청도관찰사 겸 수군절도사 순찰사. 송시열의 문장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정자(程子)·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하였기 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고,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그리고 송시열의 서예는 율곡학파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기호학파의 서체가 그러하듯이 석봉체(石峯體)가 근간이 되며 안진경체(顔眞卿體)·주자체(朱子體) 등이 혼재되었다. 서풍은 웅건장중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준길은 앞면 비제와 뒷면 비문을 썼는데 송시열과 함께 석봉풍의 골격에 안진경풍의 웅건장중한 품위를 더한 독창적 필법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비문을 지은 송시열도 글씨로 알려져 당시 양송체(兩宋體)라 하였다. 이처럼 양송(兩宋)을 추종한 사림들은 모두 그들의 필법을 배워 하나의 서파를 이루었다. 특히 송준길의 글씨는 그의 인품과 높은 학문적 경지에서 우러난 예술성 때문에 서법의 모범으로 추앙되어 선비 글씨의 전형이 되었고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광조적려유허비」는 62세에 썼는데 앞면의 대자 비제는 다양한 변화와 능숙한 필법이 구사되어 노련한 서사 솜씨를 잘 보여 준다. 뒷면의 글씨는 앞면보다 더 활달하고 자유자재하다. 해서가 주를 이루지만 행서도 있어 말년의 통달함이 잘 드러난다. 민유중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서풍 또한 송시열·송준길 서풍과 유사하다. 「정암적려유허비」에 쓴 비액 “靜庵趙先生追慕碑”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전서로 장방형의 틀 안에 일정한 굵기의 획을 대체로 곧게 사용해 근엄하면서 힘차다. 「정암적려유허비」의 전서와 관련하여 송준길이 민유중에게 보낸 편지가 『동춘당집』에 실려 있다. 전서 글씨를 어찌 쓸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전서는 ‘정암선생추모비(靜菴先生追慕碑)’로 써 있다. 민지숙[유중]에게 줌 능비(綾碑)의 전액(篆額)을 만약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로 쓰면 좋겠으나, 비문(碑文)의 글자는 큰데 전자(篆字)가 너무 작으면 서로 어울리지 않을 듯하니, 약간 굵은 글씨로 ‘정암선생추모비(靜菴先生追慕碑)’ 일곱 자만 써도 무방하겠는가? 부디 잘 헤아려 좋은 종이에 칸을 그어서 보내 주게나. 그리고 영감의 직함(職銜)도 아울러 써서 보내 주게나. 비 건립을 주관한 능주목사 민여로(閔汝老, 1598~1671)는 1666년 2월부터 1669년 4월까지 능주목사를 지냈다. 부임한 이듬해 1667년 4월에 정암적려 유허비를 세웠다. 이처럼 「조광조적려유허비」의 비문을 지은이와 글씨를 쓴이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다. ‘양송’으로 불리면서 조선 중기 서단을 이끌었던 송시열과 송준길은 동학이면서 서로의 지지 세력이었고, 그들의 뜻을 받든 민유중은 양송의 제자이면서 송준길의 사위다. 따라서 이들이 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사실만으로도 조광조의 위상과 비의 의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에 '문장은 우암(文章尤庵)이요, 명필은 동춘(名筆同春)'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정암적려유허비는 ‘우암찬(尤庵撰)’ ‘동춘필(同春筆)’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정현숙, 「화순 <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의 서예사적 가치」, 화순군 조사자료] 적려유허비는 조선 시대 능주목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길가에 있는데 거북 좌대 받침돌에 홈을 파서 비몸을 세우고, 이수의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석의 형태를 보면, 비몸에는 앞면에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라는 글씨를 2줄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위부분에 가로쓰기로 ‘정암 조선생 추모비(靜菴趙先生追慕碑)’를 전서(篆書)로 새겼고 아랫부분에는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기(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記)’라는 비 음기를 내려쓰기로 새겼다. 비석의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이며 머릿돌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엉키어 있고 뒷면에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각은 1876년(병자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조광조의 11세손 조성교(趙性敎, 1818~1876)가 1874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이태 뒤 「적려유허비각 중수기」를 짓는다. 『정암선생속집』(부록 권4)에 실려 있다. 송사 기우만(1846~1916)의 문집에 「정암선생 적려유허비각 상량문」이 있다. 1982년, 1983년, 1997년에 보수하였다. 앞면 1칸, 옆면 1칸 맞배지붕 건물이다.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방풍판을 달았다. 1986년에는 5칸 강당을 지었고 3칸의 영정각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였다. 유배 생활을 하던 초가를 복원하여 적려 유허비 주위를 정화한 것이다. 지금의 문화재 지정 격은 전라남도 기념물이다. 비석은 보통 유형문화재로 분류하는데, 기념물로 하여 지정한 것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되면 기념물은 사적, 유형문화재는 보물이나 국보가 된다. 기념물은 유적 중심이지만, ‘장소’의 역사성도 중시한다. 도학 정치의 표상 조정암선생의 적려 유허의 장소도 중시하여 기념물로 지정한 것이다. 그런데 비문의 역사성과 함께 서예사적 가치도 뛰어나다. 이러한 가치로 국가지정문화재가 된다면 보물에 해당한다. 「조광조적려유허추모비」는 조선시대 도학정치의 표상인물인 조광조의 유배지 역사현장 기록유산이다. 당대의 문신이면서 대학자인 송시열이 문장을 짓고, 당대의 문인이면서 명필인 송준길과 민유중이 글씨를 쓴 조선의 혁신적 정치가 조광조의 무게를 말해 주는 중요한 석비이다. 특히 무르익은 송준길 말년의 웅건하고 풍후한 해서와 행서, 사위이면서 제자인 민유중의 힘찬 전서를 지니고 있어 서예사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금석문이다.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 전경 뒷면 제액 전서(민유중) 앞면 대자(송준길) 뒷면 비문(송준길)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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