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유풍(遺風)과 부휴계(浮休系)의 정통성을 강조한 송광사의 금명보정(錦溟寶鼎) 게시기간 : 2020-06-09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6-05 15:1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
||||||||
1.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 진영계보지도(眞影系譜之圖)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풍암영각(楓巖影閣) 안의 벽에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 진영계보지도(眞影系譜之圖)」가 걸려 있다.
그 진영계보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고 또 재미있는 것이 많다. 이것을 보기 쉽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우선 금명당(錦溟堂)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는 풍암당(楓巖堂, 楓巖世察, 1688-1765)의 제2세 응암당(應庵堂, 應庵朗允, 1718-1794) 아래로 호명당(虎鳴堂, 제3세)- 성월당(聖月堂, 제4세)- 지봉당(智峰堂, 제5세)- 벽련당(碧蓮堂, 제6세)- 금련당(金蓮堂, 제7세)- 금명당(錦溟堂, 제8세)으로 승맥(僧脈)이 이어진다. 금련당은 금련경원(金蓮敬圓,1875-1887)이고, 금명당은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이다. 2. 금명보정의 삶과 저술 금명보정(錦溟寶鼎)이 어떤 스님인지 좀 살려볼 필요가 있다. 금명(錦溟)은 법호(法號)이고 보정(寶鼎)은 법명(법명, 法諱, 佛名)이다. 보정의 자는 다송자(茶松子), 호는 금명(錦溟), 첨화(添華)이고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상종(金相宗)으로 인조대 공신인 학성군(鶴城君) 완(完)의 적손이었으며 모친은 완산(完山) 이씨(李氏)이다. 15세가 되던 1875년(고종 12)에 출가하여 송광사 금련경원(金蓮敬圓)에게 머리를 깍고 2년 후 경파(景坡)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사방을 유력하면서 당대의 종장(宗匠)을 찾아 교학을 배웠으며 송광사의 허주덕진(虛舟德眞, 1806-1888)을 만나 의심을 깨쳤다고 한다. 또 30세가 되면서 스승 경원(敬圓)의 법을 계승하여 개당(開堂) 하였고 이후 송광사는 물론 지리산 화엄사 등 인근 사찰에서 강설하였다. 보정이 강사로서 활동하고 있을 1890년 즈음 국내외적인 세속의 현실이 급박하게 변하고 있었다. 산중에서 수행과 강학(講學)에만 몰두할 수 없게 된 보정은 1898년(광무 2) 선교양종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고 송광사의 도총섭(都摠攝, 주지직)의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후 4차례에 걸쳐 총섭을 역임하면서 송광사를 이끌게 되었다. 1921년에도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이전에 소임을 살았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하였다. 그러나 강원의 강주(講主) 소임은 『송광사사료집성(松廣寺史料集成)』에 의하면 1920년대에 계속해서 맡고 있었다. 보정은 그의 비명(碑銘)에 쓰여 있듯이 화엄강주(華嚴講主)로 불리우는 스님이다. 그는 나이 70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용은완섭(龍隱完燮)·백은종택(栢垠鍾宅, ?-1989) 등이 있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대소 원근의 사적(事蹟)에 모두 해박하였고 그 핵심을 알아 30년을 하루같이 기록했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그만큼 사적이나 불교사에 정통하였다고 이해된다. 그의 저작 내용이 그의 『비문』과 『행록초』에 담겨있다. 『비문』에서는 시문집 약간 권과 편록을 합쳐 수십 종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행록초』의 목록에 『鄕史列傳』이 추가되고 『須彌山圖』가 생략되어 있다. 『행록초』에는 「저술(著述)」과 「편록(編錄)」을 구분하고 있는데, 「저술(著述)」로는 『茶松詩稿』3권, 『茶松文藁』2권, 『佛祖讚詠』1권, 『淨土百詠』1권을 들고 있고 「편록(編錄)」에는 『曹溪高僧傳』1권과 『釋譜畧錄』1권, 『著譯叢譜』1권, 『三藏法數』1권, 『續名數集』1권, 『念佛要文科解』1권, 『大東詠選』1권, 『質疑錄』, 『十地經科』, 『楞嚴經科圖』, 『須彌山圖』가 있다. 이들 저술의 상당수는 『韓國佛敎全書』12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저술 중 「백열록(栢悅錄)」은 조선 후기 불교와 관련된 시문 가운데 승속을 아울러 주요 작품들을 간추려 편집한 것이다. 이 책에는 백파긍선 스님의 선론에 대한 추사 김정희의 비판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초의의순 스님의 『東茶頌』 유통 정황과 보정 스님의 스승인 범해각안 스님의 글이 확인되는 등 조선 후기 불교사의 한 단면을 충실히 그려내고 있어 그 내용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의 저술은 선과 교, 염불을 병행하는 조선후기 ‘삼문수업(三門修業)’의 전통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는 깊은 교학적 바탕 위에 불교사를 이해하여 집성하였고, 선과 교, 염불의 전통을 모두 계승하였다고 파악된다. 3. 고려후기의 보조지눌의 유풍과 부휴계 정통론 제창 보정은 그의 저술 「念佛要門科解」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普照는 조계선종을 창립한 해동 조계산의 조사이며 경절문, 원돈문, 정토문 3문의 宗主이다. 경절문과 원돈문은 習定均慧의 추요이며 정토문은 濟世度生의 방편이다.
라고 하여 조계선종의 창립자 지눌은 부휴계의 근거지인 조계산 송광사의 조사(祖師)이며 조선후기 삼문(三門)의 종주(宗主)로 위치 지어졌다. 조선후기의 삼문(三門) 즉 경절문, 원돈문, 정토문은 각각 선, 교, 염불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이것은 선교겸수의 방향, 화엄교학과 간화선의 수행방식으로 정리한 보조지눌의 사상과는 다른 것이었으나, 보정은 삼문수업(三門修業)의 유래를 지눌에게 소급하고 조계산에 선종, 교종, 염불종의 3종이 있어 창사(創寺) 이래 모두 겸행(兼行)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또 삼문이 定慧(禪敎)와 중생구제(念佛)의 방안이라고 하면서 선교겸전(禪敎兼全) 정혜균수(定慧均修)로 요약되는 보조유풍(普照遺風)을 부휴계(浮休系)가 계승하였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송광사를 매개로 부휴계가 조계종의 적자임을 표명하고 자파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인식은 풍암세찰의 탑을 송광사 부도전에 봉안하면서 쓴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계의 불조원류가 전래됨에 있어 臨濟 후 太古의 뒤로 다른 사찰과 다른 특수함이 있으니, 芙蓉 밑에 淸虛와 浮休의 두 갈래가 각기 宗風을 퍼뜨렸는데 오직 부휴의 적손의 傳燈이 끊이지 않았고 조계의 傳法이 가장 성하였다. 이에 浮休부터 幻海까지 9탑을 세운 것이니 순서가 분명하다. 우리 조사들의 탑은 碑殿(부도전)을 떠나지 않고 普照를 떠나지 않으며 이곳에 상주하면서 영원히 松門을 진호한다.
고 하면서 보조유풍과 송광사 전통 위에 성립된 부휴계를 조계종의 정통으로 보는 인식이 확인된다. 송광사의 삼일암(三日庵)이나 국사전(國師殿) 등을 중수할 때 牧牛(목우자 知訥)의 가풍을 계승하는 뜻을 밝히는 등 종주(宗主) 지눌(知訥)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1910년대 후반 송광사에서 부휴선수가 새삼 주목되면서 조계종주로 현창되고 적전 풍암세찰의 탑이 부도전의 제 위치에 복원된 것은 조사 현창사업과 부휴계 중심의 불교사 인식에 맞물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때 조계종은 부휴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부휴선수 이후의 부휴계는 “浮休宗“으로도 칭해졌다. 조선후기에 송광사에서 보조유풍을 매개로 자파의 정체성을 다진 부휴계는 부휴정통론에 의해 ‘종(宗)’의 명칭을 사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보정은 또한 청허계의 본산 대흥사의 범해각안에게도 수학하였다. 부휴계인 보정이 청허계의 범해각안의 제자가 됨으로써 부휴계와 청허계를 아우를 수 있는 위치가 되었으나 보정은 부휴정통론을 제창함으로서 그 한계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 범해각안은 초의(艸衣) 스님의 다맥(茶脈)을 계승한 스님인데, 보정을 통해 초의(艸衣)의 다법(茶法)이 송광사의 다풍(茶風)으로 연결되게 하였다. 보정의 자(字)인 다송자(茶松子)는 ‘차를 좋아하는 송광사의 스님’이란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