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회고와 우정의 공간, 쌍계루 게시기간 : 2020-03-10 07:00부터 2030-12-24 16:00까지 등록일 : 2020-03-09 16:0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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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선현으로는 유일하게 공자를 모신 대성전 문묘에 오른 김인후가 늘그막에 백양사에 갔다가, 쌍계루의 사연을 듣고 정몽주의 시를 따라 읊었다.1) 누각 위에 안면이 익은 몇몇 승려들, 기꺼이 예전 법규를 지키니 기쁘구려. 절간(絶磵)이 청수(淸叟)의 간절한 요청을 전달하여, 오천(烏川)이 목옹(牧翁)을 위해 시구를 보탰다네. 일찍이 환암(幻庵)이 기문을 베꼈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수행한 도반의 법호가 우연찮게도 징(澄)이로군. 아픈 몸 이끌고 느릿느릿 돌길을 지나다보니, 봄바람은 소년 시절 산에 올랐던 일을 저버리지 않았네. 목옹은 목은 이색, ‘징(澄)’은 청수의 법호, 오천(烏川)은 영일(迎日)의 옛 이름으로 정몽주의 별호였다. 그러나 쉽게 호출할 수 있는 이름이 된 것일까? 정도전은 나오지 않는다. 제6구의 「쌍계루기」를 베꼈다는 환암(1320∼1392)은 평안도 용천 태생으로 법명은 혼수(混脩), 자는 무작(無作), 시호는 보각(普覺)이었다. 일찍이 태고보우의 법맥을 이었고 나옹혜근에게 신표를 받았다. 공민왕이 극진하게 대우하고 우왕이 왕사ㆍ국사로 초빙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대장경을 봉안하자 그 법회를 주관하였을 만큼 인연이 각별하였다. 한때 ‘조계종대종사’가 되어 송광사에도 머물렀다. 옛 자취를 거의 잃어버린 충주 청룡사에 탑비가 있는데, 권근이 지은 비문에 따르면 ‘글짓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붓을 들면 사어(辭語)가 정미하였고, 특히 편지를 잘 써서 식자들이 모두 칭송하였다.’2) 이색이 환암의 법회에 가는 절간 편에 건넨 환암에 대한 회포가 다음과 같았다.3) “환암은 젊어서 시와 술로 어울렸던 벗님, 중년에 참선하였으니 이제 늙어선 쉬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굽어 살피며 불법을 크게 펼치니, 중생도 응당 보배 가득한 산을 찾아들게야.” 이러한 환암혼수가 기문의 글씨를 썼고, 백양사 승려들이 고이 간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인후가 이를 본 것이다. 김인후(1510∼1560)는 백양사에서 멀지 않는 장성군 황룡면 맥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혹은 담재(湛齋), 본관은 울산이다. 젊은 시절 정읍 내장산의 영은사(靈隱寺), 태인 도고산의 운주사(雲住寺), 순창 광덕산의 강천사(剛泉寺) 등에서 공부하였는데, 백양사도 찾았다. 손위 동서 김약묵(金若默)를 만나 ‘작년 오늘엔 양재역, 비를 만나 달팽이 오두막집에 움츠렸고… 금년 이 날엔 백암산 아래, 달빛 섬광이 만리 장공을 밝히네.… 부평초 어디 머물지 알지 못해, 붉은 먼지 뒤집어쓴 십년 나그네…” 하였던 것이다.4) 1541년 겨울 별시에 김약묵과 나란히 급제하였다. 김인후는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홍문관과 세자의 학문을 인도하는 시강원을 떠나지 않았다. 그만큼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좀처럼 의견을 개진하거나 소신을 피력하지 않았다. 하여 강직하지 못하고 유연하다거나 물정에 어두운 것 아닌가라는 수군거림을 받았다. 경상도 예천 즉 화산(花山)이 고향인 김의정(金義貞)에게 건넨 시가 있다.5) 화산(花山)의 김학사(金學士)께 여쭙노니, 지난번 둘러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였소? 내가 유연하고 원만하다니 이는 부질없는 조롱이요, 스스로 물정에 어두운 듯 교묘하게 공론을 기피한다니! 김의정(1495∼1547)은 십여 년 연상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봉직하다가 심정의 손녀를 며느리 삼은 탓에 김안로에게 배척당했었다. 기실 김인후에게 경연에서 임금을 힘껏 보필하고 훗날 의정부의 훌륭한 재상이 되시라, 권면하였다. 그래도 김인후는 애써 무심한 듯, ‘응당 작은 구실아치에게 앵무새 잔을 가져오라 하여, 취한 채 남녘 들창에 기대어 저문 강을 흘기리라’ 하였다. 그만큼 야릇한 조정, 외척의 국정 농단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 세자의 처지는 외로웠다. 1543년 정월 한밤중 동궁 세자 침소에 불길이 치솟을 정도였다. 항간에 문정왕후의 동기인 윤원형이 도발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였지만, 세자는 ‘덕이 부족한 몸이 참람하게 동궁에 있으니,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이라고 자책할 따름이었다. 이해 늦봄, 세자가 비단 폭에 바위에 기댄 ‘단단하고 곧으며 텅비고 마디가 있는 固直空節’ 대나무, 묵죽 한 폭을 건넸다. 여기에 김인후가 제사(題詞)를 넣었다.6)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사귀가 정갈하고 자세하니, 바위를 벗 삼는 정신을 여기에 채우셨네. 이제야 신성한 넋이 조화를 기다림을 깨달았나니, 하늘과 땅이 한데 뭉친 뜻을 어길 수 없으리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면 하늘은 가을이라는 칠석 지난 7월 19일, 김인후는 홍문관에서 당직하며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았는데, 때마침 부친의 편지가 왔다.7) 이날 힘들게 키워주신 노고를 생각하니,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부모님 더욱 그리워 만리 밖 시골아이가 전하는 편지, 허둥지둥 뜯고 보니 눈물이 수건에 가득.” 그리고 이튿날 아침 경연에 나갔다. 병조판서 이기(李芑)가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입시하여, 군기시(軍器寺)ㆍ선공감(繕工監) 등의 늙은 관장을 젊은 능력자로 교체하고 하급자가 상급자를 능멸하는 풍조를 진달하였다. 자기 사람 챙기기와 토론과 비판을 기강 해이로 단죄하겠다는 돌심보를 드러낸 것이다. 이때 김인후가 기묘사림의 완전 복권과 『소학』 보급과 ‘향약’ 실시를 건의하였다. “근래 죽어도 죄가 남는 무상한 소인은 모두 복직되었는데, 일시 잘못이 없지 않지만 본심은 나라를 속이지 않은 자들은 상은(上恩)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숭상한 글까지 폐기하니 지극히 미안합니다.” 기묘의 화근을 만든 심정ㆍ이항(李沆) 등은 김안로가 축출되며 복직되었는데, 조광조ㆍ김식(金湜)ㆍ김정(金淨)ㆍ기준(奇遵) 등은 여전히 죄망(罪網)에 갇혀있고 『소학』과 『주자증손여씨향약』이 금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낮고 작았다. 이틀 후 한낮 경연에서 보다 분명하게 아뢰었다. 이때 좌참찬 이언적(李彦迪) 또한 거들었다. “사화가 일어나며 인심이 무너지고 풍속은 어지러워져서, 사람들이 배우려 하지 않고 음식남녀의 욕심만 알아 비상한 이변이 자주 일어나니, 역사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이날 중종께서 『소학』은 인륜을 밝힌 글이니 전강(典講)할 때 강독하는 문제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다음 합좌(合坐) 때에 아뢰도록 전교하였다. 『소학』을 국가의 강독 교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향약은 여전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깔보고 천한 자가 귀한 자를 업신여기는 폐단’을 일으켰고, 조광조 등은 ‘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국가를 그르쳤던 죄인’이었다.8) 김인후는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예부터 벼슬살이는 시름[患]이 많아 환해풍파(宦海風波)라 하고, 가장 무섭기는 용왕의 비늘을 건드리는 역린(逆鱗)이라더니…. 143자 장편 「환해」를 다음과 같이 마감하였다.9) “구름 산 아래 돌집에 누워 가난한 게 낫겠네, 메마른 밭 몸소 갈며 굶지 않으면 되지. 처자식 이끌고 세상 밖으로 노닐면서, 샘과 돌에 몸을 맡기고 난초 캐며 향내 맡으리라. 행세하고 세상 구함도 소중하지만, 필시 망동하다가 더더욱 후회할 터이니.” 얼마 후 추석, 귀성의 말미를 얻고선 내친 김에 부모 봉양을 내세워 가까운 고을 수령을 신청하였다. 이황이 329자 장편 송별시를 건넸는데 이렇게 시작한다.10) “그대 보지 못했나? 북해의 곤어(鯤魚)가 천익(天翼)을 펼치고, 붕새 되어 구만리 바람 헤치며 어디로 갔는지를. 저 아래 여기저기 뱁새 무리, 오락가락 누릅나무 부딪치며 정말 즐겁다 하는군.” 그리고 성균관에서 김인후를 만난 이후 벼슬살이 허망함을 털어놓았다. 지난 날 반궁에서 그대와 노닐 적에, 한 마디로 도가 맞아 서로 흔쾌하였지.… 우리에게 부귀는 뜬 구름이라, 우연히 얻은 게지 내가 구한 게 아니로세.… 은혜와 영광이 겹쳤어도 정말 마땅치 않았는데, 어수선한 세월에 파랑마저 겪다니.… 이황은 당시 궁중의 군마를 돌보는 사복시 첨정, 얼마 후 성균관 사성으로 바뀌자 역시 성묘를 빌미로 휴가를 냈다. 김인후는 1543년 겨울 옥과현감에 부임하였다. 부친의 고희연도 해드렸다. 틈나면 향교에 나가 교생을 지도하고 인근 자제를 친절하게 가르쳤다. 서정 또한 간명하고 공평하였다. 곡성 성덕산 관음사에서 나온 물길이 마이산에서 시작하는 섬진강 본류로 들어가는 합강(合江)에서 밭 경계의 감나무를 두고 다툼이 있었을 때였다. 처분은 간단하였다. “밭주인 쪽 가지의 감은 밭주인이 갖는다.” 그러자 두 주인은 경계에 있는 가지의 감을 씨과일, 석과(碩果)로 삼을 요량인지 그대로 두었다. 훗날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기를 세웠던 이 마을 출신 유팽로(柳彭老)가 노래하였다.11) “이름 하여 하서의 감이라, 사물은 교화 중에 절로 자란다네. 두 사람 부끄러워 서로 넘겨주었으니, 천년 감동을 어찌 잊을쏘냐.… 지금 선생은 가셨지만, 한 그루 나무는 절로 봄빛이로세.” 이렇게 옥과에서 1년 반, 중종이 붕어하고 인종이 즉위하였다. 김인후는 조문사절을 맞이할 제술관 즉 중국사신과 시를 주고받을 시전재(詩戰才)로 차출되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이때 모화관 먼발치에서 세자시강원에서 여러 달을 모셨던 신왕을 뵈었다. ‘사방의 장막과 휘장, 임금의 옥련(玉輦)까지 온통 하얀 터, 천안(天顔)은 누렇게 부어있었다.’ 옥과로 귀임하기에 앞서 이조전랑 노수신과 깊숙한 술잔을 나누고서 망극지통(罔極之痛)의 불길함을 토로하였다. “마음속 생각은 멀고 가까움이 없는데, 하늘의 달은 비웠다 찼다가 하는군. 초가지붕 처마 아래에서 지는 해를 우러르자니, 세상 앞길은 또 다시 어찌될꼬?”12) ‘지는 해 落日’은 ‘금상(今上)’으로 읽으면 뜻이 분명하다. 이렇듯 노수신에게 속내를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노수신이 진도 유배 어느덧 15년, 1562년 2월 백양사 승려가 쌍계루의 기문과 정몽주ㆍ김인후의 시를 가져왔다. 여기에 담담하게 감회를 풀었다.13) 번거롭게 호승에게 겁화(劫火)의 잿더미를 묻지 않고도, 누각을 거듭 새롭게 올린 자취를 상고할 수 있구려. 해동 종유(宗儒)가 첫 머리에 시를 짓고, 하서 후학이 차운시를 보탰구려. 백년 외로운 섬에서 용모는 파리하고 여위었어도 기분은 한바탕 쌍계루 꿈에 상쾌하고 맑아지는군. 우리 유도(儒道)가 응당 오랜 세월 감응을 일으켰나니, 일찍이 이 누각에 몇 사람이나 올랐던고? 정몽주와 김인후의 시를 불가에서도 고이 간직하는 것에 감탄하며, 정몽주를 동방의 유종(儒宗), 김인후를 그 유학의 계승자로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이보다 2년 앞서 김인후의 상여가 나갈 때, 노수신은 ‘지난 날 하서를 만나 태학에서 함께 어울렸는데’로 시작하는 200자 장편 만사를 ‘경신년 삼월, 천지간에 소재는 이제 외톨이’로 마쳤었다.14) 경신년은 1560년이다. 1) 『하서전집』 속편 「雙溪樓敬次圃隱韻」 “樓頭識面兩三僧 持守前規喜爾能 絶澗言因淸叟懇 烏川句爲牧翁增 曾聞寫記庵爲幻 今見隨行號偶澄 扶病懶經頑石路 春風不負少年登”
2) 권근, 『양촌집』 권37, 「有明朝鮮國普覺國師碑銘」 3) 『목은시고』 권31 「절간이 남쪽으로 환암의 법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집에 들러서 작별을 고하다 絶磵南赴幻菴法會 過門告別」 “幻菴詩酒少同遊 中歲參禪老歇休 俯爲世人弘大法 寶山應見衆來求” 4) 『하서전집』 권4, 「與金太容兄論詩 四月八日」 “去年今日良才郵 雨不能行縮蝸室…今年此日白巖下 長空萬里蟾光徹…萍蓬依泊不自知 十年奔走紅塵客…” 5) 金義貞, 『潛庵逸稿』 권5(부록), 「行狀」(柳台佐 撰); 『하서전집』 권7, 「寄友人」 “爲報花山金學士 向來環坐說何言 名吾軟熟空嘲誚 自托昏冥巧避論” 其二 “經幄論思須爾力 中堂遙想璧連雙 應呼小吏傳鸚鵡 醉倚南窻睨晚江” 6) 『하서전집』 권6, 「應製題睿畫墨竹 癸卯」 “根枝節葉盡精微 石友精神在範圍 始覺聖神侔造化 一團天地不能違” 7) 『하서전집』 권6, 「七月十九日 直玉堂作」 “言念劬勞在此辰 晨興達夕倍思親 村童萬里將書至 顚倒披緘淚滿巾” 8) 『중종실록』 권101, 38년 7월 20일 및 22일. 이틀 후 이언적은 경상감사로 발령 났다. 모친 봉양을 구실로 사직을 아뢰었기는 하지만 내몰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9) 『하서전집』 권4, 「宦海」 “…終不如雲山石室臥窮年 薄田躬耕終不餒 提妻挈子物外遊 放浪泉石搴蘭茝 行身濟世亦攸貴 豈必妄動生尤悔” 10) 『퇴계집』 권1, 「送金厚之修撰 乞假歸覲 仍請外補養親恩許之行」 “君不見鯤魚化作垂天翼 九萬搏風竟奚適 下有區區斥鷃輩 搶楡控地皆眞樂…我昔與子遊泮宮 一言道合欣相得…富貴於我等浮雲 偶然得之非吾求…恩榮合沓謬所當 歲月紛綸閱江浪” 11) 유팽로, 『月坡集』 권1, 「河西柿」 “名曰河西柿 化中物理長 兩人慙俱讓 千載感何忘 可比萊公柏 能侔名伯棠 先生今去後 一樹自春光.” ‘내공백(萊公柏)’은 북송의 구준(寇準)이 심은 잣나무로 수령 시절 선정의 혜택을 입은 백성이 돌보았다고 하며, ‘백당(伯棠)’은 주나라 소공이 농번기에 백성에게 피해를 주기 않기 위하여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정무를 보았던 감당나무로 『시경』 「소남(召南)」에 있다. 12) 『하서전집』 권8, 「見寡悔書」 “昨見盆城面 今看寡悔書 心懷無遠近 天月有盈虛 斷酒曾知戒 逢場不願餘 茅簷向落日 世道復何如” 과회는 노수신의 자. 분성(盆城)은 김해의 옛 이름으로 소과 동방인 김희년의 고향이다. 13) 『소재집』 권4, 「임술 이월 쌍계루 제시에 차운하다 次韻 寄題雙溪樓 壬戌二月」 “不煩灰刦問胡僧 記蹟重新攷可能 海左宗儒餘事首 河西後學嗣音增 百年孤嶼衰容槁 一夢雙溪爽氣澄 吾道應爲曠世感 此樓曾有幾人登” 14) 『소재집』 권4, 「哭河西」 “往昔河西遇 來遊泮上偕…庚申歲三月 天地一穌齋”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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