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연담을 그리며 게시기간 : 2020-03-12 07:00부터 2030-12-24 21:00까지 등록일 : 2020-03-10 17:1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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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완호에게 보낸 편지 정약용(1762~1836)이 강진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대흥사 주변의 스님들과 많은 왕래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다산의 간찰은 1813년 만덕산 기슭에 초당을 짓고 유배 생활을 할 때에 대둔사의 완호 스님에게 보낸 간찰이다. [玩虎和尙 禪几 茶山 謝帖] 新築西臺 朝夕/登臨觀潮 每憶與/蓮老同游羅山 爲/之悵慮 書來 以/遺集事縷縷 不勝/慚歎 今適騎魚弘/在坐 使之效力於艸/本 則欣然肯諾 艸/本旣完後 始可議/正本 然又方欲抄出/十餘張 以寄使行/ 此亦艸本成後乃可/爲耳 不宣 癸酉/十一月十九日 俟菴 報 [완호 화상의 선궤에 다산이 보내는 답장] 서대를 새로 짓고 아침저녁으로 올라가서 조수를 보며 매번 연담 노인과 함께 나산에서 놀던 때를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편지가 와서 유집 문제를 누누이 말씀하시니 부끄러운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마침 기어자홍이 와있어서 초본에 힘을 쓰라고 하였더니 흔쾌히 허락을 하였습니다. 초본을 완성한 후에야 비로소 정본을 논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지금 10여 장을 초출하여 심부름 편에 부치려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초본이 이루어진 후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계유년(1813, 순조13) 11월 19일에 사암이 알립니다. 그림1 정약용이 완호에게 보낸 편지(개인 소장)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초의(艸衣)의 스승이기도 한 완호윤우(玩湖尹祐, 1758~1826)이다. 완호는 대흥사(大興寺) 13 대강사(大講師) 중 10번째이다. 편지에서 연담 선사의 문집 초본을 정리한다는 기어홍은 기어자홍(騎魚慈弘)이다. 기어자홍으로 아암혜장(兒庵惠藏)의 의발의 받은 두 제자 수룡이성(袖龍頤性)과 기어자홍 중의 한 사람이다. 다산이 편지 첫머리에서 아침저녁으로 새로 지은 서대에 올라 조수를 보면서 연담 노인과 나산에서 만났던 일을 추억한 것은 다산이 젊었을 적에 아버지 정재원이 화순 현감을 할 때의 일이다. 다산은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 내려가서 공부하고 있었다. 연담(蓮潭, 1720~1799)의 속성은 천씨(千氏)이고 이름은 유일(有一) 자는 자는 무이(無二) 전라도 화순(和順) 사람이다. 18세에 무안 승달산 법천사(法泉寺)에서 출가하여 해인사에서 호암체정(虎巖體淨)을 따라 공부하여 이후 강석(講席)을 맡아서 30여 년 동안에 항상 따르는 자가 백여 명이었다.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 삼성암(三聖庵)에서 1799년에 입적하였다. 김정희도 연담 문도들의 부탁으로 연담의 게명(偈銘)을 써주었다. 아마 초의의 부탁이었을 것이다. 연담의 문집인 『임하록』에도 정약용이 회상한 젊은 시절 주고받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정약용 18세, 연담 60세 때의 일이다. 연담이 먼저 다산 형제에게 시를 지어 올리니, 정약용이 화답하였다. 먼저 연담의 시.
다음은 어린 정약용의 시이다. 열여덟 살이면 한창 젊었을 때의 나이이다.
아직 약관을 지나지 않은 청년 정약용과 환갑에 가까운 나이의 연담. 둘은 서로의 나이를 뛰어넘어 아름다운 교유를 한 것이다. 이제 연담은 죽고 정약용은 강진 바닷가로 유배와 있는 신세이다. 그의 문집을 곁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서대 높은 곳에 올라 해조음을 들으며 옛일을 회상한 것이다. 다산이 완호에게 보낸 짧은 편지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다산이 연담과 화순 나산에서 나이 차이를 잊고 함께 교유할 수 있었던 일을 추억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완호는 스승인 연담의 문집 편찬을 부탁하고 있었고 일부 몇 장이라도 정서하여 사행(使行) 편에 어딘가에 보내려고 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다산은 사암(俟菴)이라는 호를 편지 말미에 썼고 스님에 대한 편지여서인지는 몰라도, 배(拜)나 돈(頓), 장(狀)이라고 맺지 않고 보(報)로 맺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다산(茶山), 열수(洌水), 철마산초(鐵馬山樵) 등의 호를 썼지만 스스로는 사암이라는 호에 자부심을 가졌다. 사암은 『중용』에 ‘백세 동안 성인이 나와도 미혹되지 않을 것(百世以俟聖人而不惑)’이라는 귀절에서 가져온 것으로, 자신의 저작과 인생에 대해서 떳떳함이 배어있는 아호이다. 「자찬묘지명」에서 “알아주는 이는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하늘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불에 태워버려도 괜찮다”라고 하면서 당대에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평가받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후세에는 반드시 본인의 뜻을 알아주는 세상이 올 것임을 믿으면서 사암이라고 자호하였다. 다산의 글씨는 빠르고 명쾌하다. 특히 이 간찰의 글씨는 맑고 투명하다. 당시 정조가 애호하였던 송하 조윤형과 다산은 동시대 사람으로서 정조와 송하의 글씨체와 많이 닮아서 빠르고 거침이 없어 보인다. 그림2 연담의 부도가 있는 미황사 부도전(ⓒ정산) 다산이 완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논의되고 있는 연담 선사의 문집 『임하록』은 이미 1800년 이전에 이미 완성되었다. 연담은 1764년에 이미 자신의 글들을 정리하여 자서(自序)를 쓰고 있고, 그의 제자들은 간행에 임하여 당시 해남 현감으로 와있던 안책(安策), 당시의 명류였던 정범조(丁範祖), 이충익(李忠翊) 등의 서문을 다 받아 두었다. 문인 학추(學湫)의 부탁으로 해남 현감 안책이 서문을 쓴 것은 1796년이고, 이충익은 1798년, 정범조는 1799년에 서문을 썼다. 모두 연담이 입적하기 바로 전이다. 또 시집의 말미에 붙어있는 문인 영월(靈月)·계신(誡身)의 발문은 1800년 4월에 쓴 것이다. 그 아래에는 참제자(懺弟子)라고 하여 해월도일(海月道日) 이하 42명의 명단이 있고, 문제자(門弟子)라 하여 퇴운각홍(退雲覺洪) 이하 25명, 상좌 학추(學湫), 취찬(趣賛), 각공(刻工) 연관(演寛) 이하 6명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어 『임하록』에 참여한 스님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다산이 보낸 편지의 수신자인 완호윤우의 이름은 참제자 명단에 들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全羅道 靈岩 美黃寺開刊 移鎭于海南 大芚寺’라고 하여 미황사에서 개간을 하였고 대둔사에 이진을 하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3, 4권에는 소(疏), 기(記), 서(序), 상량문(上樑文), 제(題), 문(文), 찬(贊), 법어(法語), 시중(示衆), 서(書)를 추가하여 문인 계신(誡身)이 주관하여 간행하고 교정(校正)은 낭암(朗岩)이 했다. 부록으로 첨부한 스스로의 일생을 정리한 「자보행업(自譜行業)」은 1797년 12월에 썼으며, 문인 계신이 쓴 「추기(追記)」에서는 연담이 대둔사에서 강론을 하며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1798년 봄에 장흥 보림사(寶林寺) 삼성암(三聖庵)로 옮겨가서 1799년 2월에 입적한 것으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1813년의 편지에서 완호가 다산에게 편집해줄 것을 부탁하였던 연담의 글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완호윤우의 이름은 『임하록』 2권 말미의 참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므로 이 책이 간행되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 터이다. 3, 4권 소, 기, 서, 상량문, 법어 등도 문인 계신이 주관하여 간행하였고, 계신이 추기 발문을 쓴 것도 1800년이니 이미 1813년 이전에 『임하록』은 간행되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완호가 다산에게 정리해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러한 연담 선사가 입적하기 1, 2년 전에 쓴 친필 선시 두 점이 있다. 하나는 입적 2년 전에 쓴 시이고 다른 하나는 1년 전에 쓴 것이다. 앞의 시는 1798년 보림사로 옮겨가기 바로 전 해의 가을에 쓴 시이고 다른 하나는 입적 1년 전 4월 청화절에 장흥 보림사 삼성암에서 쓴 시이다. 모두 절필(絶筆)이라고 하겠다. 1797년 가을이니, 보림사로 옮기기 직전이지만 그곳으로 가려고 결심한 후에 쓴 것이 아닐까?
그림3 연담의 절필 시고(1)(개인 소장) 다음 두 번째의 절필 시는 보림사 삼성암으로 옮긴 후 4월 청화절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불법이 후학들에게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쓴 시이다.
그림4 연담의 절필 시고(2)(개인 소장) 불가의 말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선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대체로 연담은 알기 쉬운 말로 자신의 일생을 갈무리하였다. 화엄을 설법하는 연담에게는 후학들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자재무애의 능력으로 설법을 하고 깨달음을 주려고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당기(當機)’란 말은 어떤 질문에 대해 능히 대답할 만하고 대답을 이끌어가는 자재무애한 능력 즉 교법에 상응하는 근기, 어떤 일을 감당할 만하고 능히 견성할 수 있는 근기를 말한다. ‘당기일구(當機一句)’란 그 깨달음을 이룬 한마디를 말한다. 초원(椒園) 이충익(李忠翊)은 『임하록』 서문에서 보통 사람들은 스님들의 시를 ‘푸성귀 맛[蔬筍氣]’이 있어서 싫다고 하는데, 연담의 시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으며, 잘 써도 좋고 졸렬해도 좋다”고 하면서 유희삼매(遊戱三昧)의 경지를 통하여 자신의 도를 실천하려 하였다고 정리하였다. 마지막 절필 시에서도 자신의 일생을 마감하면서 담담히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아가지만, 후대의 제자들을 통하여 불법이 이어질 것을 기원하고 있는 심정을 직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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