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조선후기 화엄학의 요람, 순창 구암사에서 설파상언·백파긍선을 만나다. 게시기간 : 2020-03-17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3-16 09:3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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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산 밑에 가서 점심을 먹으면 이내 산책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두 가지 산책길이다. 하나는 담양호 용마루길 데크길을 걷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순창 복흥으로 달려가 영구산 구암사로 가는 것이다. 최근 4-5년간 늘 그렇게 해왔다. 이번엔 후자 순창 구암사로 발길을 옮겼다. 구암사 가는 길은 산길을 돌고 돌아가는데, 복흥에 이르면 산지의 분지여서 상당히 너른 들판이 있어 확트인 느낌이 정신을 쇄락하게 한다. 시골영감 장에 가듯, 느린 걸음으로 비포장 산길을 오르노라면 길 왼편으로 돌아가신 스님들 모신 부도밭이 나타난다, 명색이 학불자(學佛子)인만큼 부처님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부도밭을 지나 곧장 길을 걸어 대웅전으로 가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의미로 3배로써 부처님을 배알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웅전과 화엄전, 삼성각, 정와 등 가람배치를 생각하며 경내를 두루 살펴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화엄전에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무른다. 사찰에서 ‘00전’은 불·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화엄전은 화엄경의 설법주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구암사 화엄전은 한때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인법당(人法堂)으로 사용된 적이 건물이다. 화엄전은 영구산 구암사의 특성이 드러나는 건물이다. 화엄전이 있는 사찰이 흔하지 않다.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 화엄전이 있으나, 정작 화엄종찰이라고 하는 구례 지리산 화엄사에는 화엄전이 없다.
1. 구암사 화엄전 그런데 별로 알려지지 않은 순창 복흥 영구산 구암사에는 7칸이나 되는 화엄전이 있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구암사의 창사정신(創寺情神)이나 승맥(僧脈)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구암사 승맥을 살피기 위해서는 절 입구에 있는 부도밭으로 발길을 급히 옮기지 않을 수 없다. 부도밭은 근래에 정비사업을 하여 3단 계단으로 가지런하다. 위로부터 아래로 2단 향우측에 있는 비석이 눈에 확 들어온다. 백파대사비이다. 이 비는 본래 고창 선운사 부도 밭에 있는 승비(僧碑)인데, 여기에 또 세워져 있다. 부도밭 정비사업 하면서 새로 세운 비임에 틀림이 없다. 부도밭 정비사업 이전에는 부도 3기 정도만 쓸쓸하게 모셔져 있었다. 이 가운데 백파당 부도도 있었던 것이다. 원래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승비는 한 세트인데, 이렇듯 따로 모셔지기도 한다. 백파 스님의 부도는 구암사에, 백파 스님의 일생을 기록한 비는 선운사 부도밭에 세워져 있다가 현재는 성보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2. 구암사 부도밭 구암사 부도밭은 중앙에 올라갈 수 있는 돌계단이 있고 좌우로 부도를 안치해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는 맨윗단과 가운데 단에만 부도가 있고, 맨 아랫단에는 부도가 없이 비어 있다. 맨 위 첫째 줄에 3기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한 중앙에 모셔진 분이 중심인물이다. 누구실까? 설파당(雪坡堂) 부도다. 설파상언(1707-1791) 스님의 부도인 것이다. 설파당 부도의 향우측에 백파당(白坡堂) 부도, 향좌측에 정관당(正觀堂) 부도가 모셔져 있다. 맨위 한 중앙에 모셔진 설파상언 스님은 조선후기 화엄학 연구의 대가였다. 호는 설파(雪坡), 속성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다가 19세에 선운사(禪雲寺)로 출가하여 희섬(希暹)의 제자가 되었고, 연봉(蓮峰)과 체정(體淨)의 법맥을 이어 받았다. 한때 벽암(碧巖)의 법계(法系)에 속하는 회암(晦庵)의 지도를 받았으나, 특별히 섬긴 스승은 체정이다. 1739년(영조 15) 용추사(龍湫寺)에서 개강(開講)하였는데, 그때 이미 삼승오교(三乘五敎)를 남김없이 참구하여 통달하였으며, 그 중 특히 화엄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때까지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청량징관(淸凉澄觀)이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90권이 우리나라 화엄학 연구의 지침서가 되고 있었으나,
3. 구암사 설파당 부도와 백파당 부도 내용이 광범하고 심오하여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달리 해석되어 오해를 낳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청량의 소에 대한 주석을 읽고 소를 가르고 각 장(章)을 분류했다. 또한, 『화엄경』의 여러 판본들이 서로 다른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해인사에 있는 모든 판본들을 교합하여 80권본의 정본(定本)을 만들어서 낙안(樂安)의 징광사(澄光寺)에 봉납하였다고 한다. 그 뒤 금강산·묘향산·두류산 등지에 머물면서 참선(參禪)에 힘을 기울여 교와 선을 함께 닦았다. 1770년(영조 46) 징광사에 불이 나서 화엄판목(華嚴板木)이 모두 타버리자 구송(口誦)으로 과거에 이룩했던 80권본을 다시 판각하게 하였으며, 영각사(靈覺寺)에 경판각(經板閣)을 짓고 봉안하였다. 노년에는 매일 만 편씩 염불하기를 10여년 동안 계속하였고, 1790년 12월 병세를 보이다가 이듬해 1월 3일 앉아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法臘) 66세였다. 다비 후 제자들이 사리를 거두어 선운사 등에 부도를 세웠다. 설파당의 법맥(法脈)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志安)-체정-상언으로 이어지며, 뛰어난 제자로는 긍선(亘璇)·성우(性瑀)·홍주(洪倜) 등이 있다. 저서로는 『청량초적결은과(淸凉鈔摘抉隱科)』 1권과 『구현기(鉤玄記)』 1권이 있으나 현존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는 ‘화엄의 충신’이라고 불릴 만큼 화엄의 전통을 고수한 고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맨위 설파당 부도의 향우측의 백파당 부도는 백파긍선 스님의 사리탑이다.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은 속성은 이씨(李氏)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이고 호남의 무장현(현재의 고창군 무장면)에서 조선 영조 43년(1767)에 태어났다. 호는 백파이고 긍선은 법명이다. 12세에 출가하여 선운사(禪雲寺)의 시헌장로(詩憲長老)에게 배웠다. 뒤에 평안북도 초산(楚山)의 용문암(龍門庵)에 머물면서 공부하고, 다시 방장산(方丈山:지리산) 영원암(靈源庵)으로 가서 설파상언(雪坡尙彦)에게서 선(禪)의 종지(宗旨)를 받았다. 전북 순창군 영구산(靈龜山) 구암사(龜巖寺)로 돌아와 회정(懷淨)의 법통을 잇고,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개당(開堂)하자 강중(講中)이 백 수십 명이었다고 한다.
4. 구암사 백파당 부도 그러나 수행에 불만을 느껴 1815년(순조 15) 가을 강중(講衆)을 떠나 홀로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공부에도 만족하지 않고 1821년 봄 금강산·오대산의 선지식(善知識)을 참견하고, 이듬해 평생을 참선으로 마칠 것을 맹세하여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지었다. 그 후 충청도에서 선법을 펼쳐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사람들이 스님을 호남 선백(禪伯)이라 불렀다. 1830년 다시 영구산으로 돌아와 사찰을 중창하고 선강법회(禪講法會)를 열자 많은 무리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백파가 구암사에서 선강법회(禪講法會)를 개최할 때, 팔도의 납자들로부터 선문(禪門) 중흥의 종주(宗主)로 추앙받았다. 45세 무렵, ‘진제(眞諦)는 문자 밖에 있다’고 하면서 교학을 버리고 참선에 전념했다. 또한 <정혜결사문>에서도 “나는 어려서 출가해 공부해 왔으나 온통 다른 이의 보석만을 세었을 뿐, 나 자신은 반 푼어치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사교입선의 뜻이 굳건했다. 백파대사가 1852년 86세로 입적하자, 그와 깊이 교류하던 실학의 거봉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화엄종주백파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律師大機大用之碑)」를 지어 스님을 화엄종주요, 율사이며, 대기대용의 격외선사라고 추앙했다. 스님의 저술로는 <정혜결사문>·<선문수경>·<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六祖大師法寶壇經要解)>·<태고암가과석(太古庵歌科釋)>·<식지설(識智說)>·<오종강요사기(五宗綱要私記)>·<선문염송사기(禪門拈頌私記)>·<금강경팔해경(金剛經八解經)>·<선요기(禪要記)>·<작법구감(作法龜鑑)>·<백파집> 등이 있다. 이상의 저술 가운데 선종 각 종파의 미묘한 차이를 ‘중도(中道)’와 ‘돈오(頓悟)’를 기준으로 종합·정리한 저술인 『선문수경』에 그의 선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백파긍선이 지은 『선문수경(禪門手鏡)』은 당시 선사들 사이 일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백파가 『선문수경』을 발표했던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여러 명의 승려들이 반론과 재반론을 거듭한 선문의 논쟁이 있었다. 이는 한국불교 1700년의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교리논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5. 구암사 백파대사 비 논쟁의 촉발은 백파가 기존의 제방 선원에서 인정해 왔던 2종선론을 부정하고 3종선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백파가 임제의 삼구(三句)를 선문의 표준으로 삼고, 이것을 기준으로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으로 선법을 분류하였다. 그러나 백파의 입장은 기존의 선론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면서 선리논쟁으로 전개되어 갔다. 백파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논쟁의 불씨를 지핀 장본인은 초의였다. 초의는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지어 백파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삼종선과 이종선 논쟁이 교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여기에 추사 김정희가 실학을 바탕으로 초의와 같은 입장에서 백파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이후 설두 유형(雪竇有炯)이 스승 백파의 선론(禪論)을 재차 설파하였고, 축원 진하(竺源震河, 1851∼1926)가 백파와 설두의 논리를 반박하면서 무려 120년에 걸친 불교계 초유의 논쟁이 진행되었다. 백파는 선의 체계와 분류를 철저한 전통주의적 틀에서 이해하였고, 이를 논박한 초의 등은 실학의 새로운 학문적 경향에 영향 받아 논리와 증거를 강조하였다. 여기에 추사의 고증학적 학풍이 작용하였고, 직접 백파에게 서신을 보내 실학자로서의 관점과 이해를 개진하였다. 선문논쟁의 대체적 흐름은 『선문수경』이 발표된 이후 의순을 시작으로 백파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것은 의순의 비판처럼 백파가 정확한 문헌적 근거 없이 임제종의 우월함을 밝히려는 의도가 앞서면서 논리적 비약이 개입되었고, 이로 인해 초래된 현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선론을 뒤집고 새로운 주장을 제시한 『선문수경』은 어떤 의미에서 평지풍파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백파의 선론은 종지종통에 대해 희미해져가던 불교계에 일대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나아가 전통적 선론(禪論)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주장을 제시한 진취적 기상은 높이 평가받을 대목이다. 백파의 『선문수경』은 선을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의 삼종선으로 나누고 선의 종파를 이 삼종으로 구별하여 판단하려는 주석학적 입장에 서있다. ‘교는 사구이고 선은 활구’라고 정의하는 백파의 의리선과 조사선의 구별은 교학과 선종의 구별과 상통하며, 여래선과 조사선의 차이는 공(空)사상과 중도(中道)사상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여래선은 의리의 격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깨달음의 경계가 진공에 머문 단계이며, 조사선은 진공과 묘유가 원융한 중도를 깨달은 경계라는 것이다. 백파는 이런 구별을 통해서 결국 교학보다는 선종이 수승하다는 점과 진공묘유의 중도를 깨닫는 조사선이 최상의 선임을 밝히려 했다. 스님의 선법에는 임제선(臨濟禪)이 가장 나은 것이라는 전제와, ‘돈오’라는 선종의 독특한 주장 이면에 ‘중도’라는 교학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화엄교학’과 ‘선’을 동시에 수용하는 우리나라의 선종의 전통적인 지향이 잘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선의 심천(深淺)을 평가하는 기준을 ‘임제삼구(臨濟三句)’에 의거하는 이론을 전개한 백파의 『선문수경』으로 비롯된 논쟁은 조선조 말기를 장식하는 논쟁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고, 한국 불교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스님은 ‘선문의 중흥주’로 일컬어졌다. 백파긍선의 승계는 서산 휴정의 4대파 중의 하나인 편양문파(鞭羊門派)이며, 법맥은 휴정-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志安)-체정(體淨)-상언(常彦)-회정(懷淨)을 이었다. 스님의 법계는 화엄교학과 선을 동시에 수용하는 학풍을 지니는 특징이 있으며, 스님의 제자로는 유형(有炯)·한성(翰醒)·정관(正觀) 등이 있다. 부도밭 맨위의 설파당 부도를 중앙에 두고 향좌측에 정관당(正觀堂) 부도가 모셔져 있다. 정관당은 백파긍선의 제자인데, 알려진 바가 없는 스님이다.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3)과는 다른 스님이다. 순창 복흥 영구산 구암사를 둘러보면서 수많은 학인들이 모여 화엄강회가 열렸을 구암사의 전각, 학승들이 숙식과 거처를 했을 승방들, 교재를 인출할 불전목판을 보관한 장경각(藏經閣), 이러한 불사들을 유지하고 가능케 한 사원경제력 등 궁금한 것들이 쌓여만 간다. 이래저래 무사인(無事人)을 지향하는 학불자(學佛子)의 산책길은 깊어가는 생각으로 무겁기만 하다.
6. 구암사 정관당 부도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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