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 간찰체는 따로 없다? 게시기간 : 2020-03-26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3-25 09:5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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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서체(尹尙書體)>
간찰 쓰는 글씨나 법식이 따로 있는가? 추사 김정희는 간찰의 서체에 특별한 법식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추사보다 한 세대쯤 선배인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은 근암(近巖) 윤급(尹汲, 1697~1770)의 글씨를 칭양하면서 사람들이 윤급의 척독(尺牘)을 얻어 경쟁적으로 모방하였고 윤급의 편지 글씨를 그가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므로 ‘윤상서체’라고 한다고 하였다. 필법이 정밀하고 유려하여 당시의 큰 인물들의 비갈은 공이 쓴 것이 많았다. 사람들이 그의 척독을 얻어서 경쟁적으로 흉내냈는데 그것을 ‘윤상서체’라고 하였다. 筆法精麗 當世名卿鉅公碑碣 多公所書 人得其尺牘 競倣效 謂之尹尙書體(《金陵集》 卷18 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謚文貞尹公墓表)
그림1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그의 집안 족손인 박남수(朴南壽, 1758~1787)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상서체’가 비록 벼슬하는 선비들의 모범이 되기는 하지만 대가의 필법은 아니라고 훈계하였다. 박남수는 남공철과 절친이었다. 지금처럼 춘삼월 한창 봄꽃이 만화방창할 시절에 봄비가 사흘 동안이나 계속 내려 필운동 언덕의 살구꽃들이 모두 떨어져버린 즈음 족손 남수의 예쁜 꽃편지가 온 모양이다. 갑자기 그대의 서찰이 내 앞에 내려와 나의 그리운 마음을 충분히 위로해 주네. 그러나 자줏색 편지지에 쓴 부드러운 필치는 너무도 문곡(文谷, 金壽恒)과 흡사하여 우아한 점은 있지만 풍골(風骨)이 전혀 없네. 이는 용곡(龍谷) 윤 상서(尹尙書, 尹汲)의 글씨가 비록 벼슬하는 사대부들의 모범은 될지언정 결국은 대가의 필법은 아닌 것과 같으니 이것은 불가불 알아야 하네. 此際淸翰忽墜 足慰我思 而紫帖柔毫 甚似文谷 雅則有之 風骨全乏 此龍谷尹尙書雖爲搢紳楷範 終非大家法意也 不可不知(《연암집》 권10 별집 罨畫溪蒐逸 答南壽) 족손 박남수의 편지가 당시에 벼슬하던 사대부 사이에 유행하던 문곡, 근암으로 이어지는 ‘윤상서체’를 따라서 썼던 모양이다. 연암은 이에 대하여 잊지 않고 그 글씨가 풍골이 없어 대가들이 쓰는 글씨는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연암은 자신의 조부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이 신만(申晩)과 윤급을 한림에 추천하는 한림천기에 대해 말하면서도 두 사람의 편지 글씨가 모두 절품이어서 진신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하였다. 박필균은 이들을 추천한 때문에 평생 벼슬살이가 순탄치 못하였다고 한다.(《연암집》 권3 孔雀館文稿 王考手書翰林薦記)
윤급은 자는 경유(景孺), 호는 근암(近庵),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5대손으로 황해도관찰사 윤세수(尹世綏)의 아들이다.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의 문인이다. 동국진체로 유명한 윤순(尹淳)과 같은 집안으로 해평 윤씨는 글씨에 있어서 명가로 일컬어진다. 신흠, 신익성, 신위 등의 평산 신씨, 이정영, 이광사, 이영익으로 이어지는 전주 이씨, 조문수, 조명교, 조윤형 등의 창녕 조씨 등 모두 소론 명가들이다. <간찰체는 따로 없다> 그런데 추사 김정희는 간찰 체식은 따로 없다고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유려하고 정밀하기는 하지만 힘과 골기가 없다고 하는 연암의 평은 앞에서 보았지만, 추사는 자신의 간찰을 글씨의 모범으로 배우려는 승려들의 부탁에 정색을 하고 비판하는 글을 이재 권돈인에게 보냈다. 옛 사람들이 편지를 쓰는 데, 간찰체라는 체식은 따로 없었습니다. 《순화각첩(淳化閣帖)》에는 진(晉) 나라 사람의 글씨가 많지만 간찰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나라 습속에서 가장 나쁜 것입니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없지만, 저는 일흔 해 동안에 열 개의 벼루를 갈아 구멍을 냈고 천 자루의 붓을 다 닳아 몽당붓이 되게 했으나, 한번도 간찰체의 서법을 익힌 적이 없습니다. 실로 간찰에 따로 한 가지 체식이 있는 줄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와서 요구하는 자들은 바로 간찰을 써달라고 하므로 거절하고 써주지 않았습니다. 중들이 간찰 법식에 더욱 심하게 집착하니,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古人作書 別無簡札一體 如淳化所刻 多晉人書 未甞專主一簡札 是東俗之最惡習也 吾書雖不足言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 未甞一習簡札法 實不知簡札另有一體式 來要者輒以簡札爲言 謝不敢耳 僧尤甚於簡札一法 莫曉其義諦也
이 간찰은 《완당집(阮堂集)》에 절친인 이재 권돈인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있다.(卷3 書牘 與權彝齋33) 여기에 그 유명한 “일흔 해 동안에 열 개의 벼루를 갈아 구멍을 냈고 천 자루의 붓을 다 닳게 몽당붓이 되게 했다《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는 구절이 나온다. 추사의 향년은 일흔 한 살이므로 이 간찰은 거의 말년에 쓴 간찰이라고 하겠다. 물론 대단한 과장이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칠십 평생을 글씨 연마에 바쳐온 것에 대한 자부심을 말하는 것이다. 편지의 요지는 간찰체라고 하는 체식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완당집》에 실린 문장과 실제 간찰의 문장 사이에는 몇 군데의 차착(差錯)이 있다. 실제 간찰에는 ‘未甞專主一簡札’이라고 되어 있는데 문집에는 ‘一’자가 빠져 있고, 간찰에는 ‘是東俗之最惡習也’가 문집에는 ‘是吾東之惡習也’로 되어 있다. 마지막의 ‘謝不敢耳 僧尤甚於簡札一法’이 문집에서는 ‘謝不敢 而僧輩尤甚於簡札’이라고 하여 ‘耳’를 ‘而’로, ‘僧’을 ‘僧輩’라고 쓰고‘一法’은 빠져있다. 간찰을 문집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러한 정도의 차착은 인정할 수 있다. 이 간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발신자와 수신자 등을 쓰는 간찰의 기본 형식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개 간찰은 첫머리에 시후(時候) 인사를 하고 상대방의 안부를 묻거나 확인하고, 이어서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이어서 용건을 전하고 마무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다. 이 간찰은 이러한 시후 인사나 안부를 묻는 내용이 전혀 없이 간찰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만으로 끝내고 있다. 글씨체로 본다면 이 간찰은 만년의 추사체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내용상으로 본다면 편지로서의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간찰은 정식 편지가 아니거나 간찰의 태지(胎紙)나 협지(夾紙) 형식으로 자신의 간찰체에 대한 의견을 적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글씨는 변하는 것> 추사의 글씨를 이해하기 위해서 추사의 여러 작품과 시고, 서첩, 간찰 등의 글씨를 본다. 대개 작품이나 비문 등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글씨의 서체나 구도, 포치(布置), 결구(結構) 등에 있어서 미적 감각을 최대한 보여준다. 이러한 작품 글씨보다 추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은 추사의 시고(詩稿)나 간찰 등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평소에 쓰던 그대로의 글씨가 추사의 본연의 글씨가 아닐까? 글씨는 사람의 성정과 인품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옛 사람들이 글씨를 심화(心畫)라고도 하였다. 추사의 글씨는 몇 번 변화를 겪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추사의 젊은 시절의 글씨와 만년의 글씨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장기간의 제주 유배 이후 만년의 글씨에서는 골경기험(骨勁奇險)한 추사체를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추사의 글씨가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하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젊었을 때의 추사의 글씨는 다른 사람들의 글씨와 별다른 게 없다. 아래 간찰 글씨는 41세의 김정희가 생부(生父)인 김노경(金魯敬)의 환갑연에 박용수를 초청하는 편지이다. 부친 화갑연 초청장인 셈이다. 박 정언댁 입납 섣달 추위에 건강하신지요? 우러러 위로되고 또 그립습니다. 저의 아버지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개인적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두렵습니다. 또 매우 흔쾌히 경하하여야 해서 이달 19일에 잔치를 베풀어 기쁨을 표하고자 하오니 광림해주셔서 잔치상을 올리려고 합니다. 나머지는 예를 갖추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병술년(1826, 순조26) 납월(12월) 초7일 김정희 배 朴正言宅 入納 伏惟臘沍/ 動止萬安 仰慰且溸/ 正喜家君 周甲隔日/ 私以喜懼 繼切欣/慶 將以今月十九(八)日/ 設酌識喜 奉/賜光臨 以貢筵席/如何 餘姑不備禮 丙戌臘月初七日 金正喜 拜
1826년 김정희는 사헌부 집의 벼슬을 하고 있었고 생부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은 판의금부사 벼슬을 하고 있었다. 김노경은 12월 17일생이니 환갑을 좀 지난 날짜에 수연 잔치를 베풀 예정이다. 김정희 아버지 김노경의 환갑 잔치에 초청 받은 박 정언은 박용수(朴容壽, 1793~1849)이다. 자는 중성(仲成)이고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814년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생활을 시작하여 내직으로는 이조 참의, 대사성, 외직으로는 광주 목사,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글씨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추사체의 느낌은 전혀 없는 글씨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추사체는 제주 유배 이후 신산(辛酸)한 생활을 겪으면서 기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형미가 느껴지는 글씨로 변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남이 볼 것을 의식하고 쓰는 대련(對聯)이나 제액(題額) 글씨는 자신의 정성을 집중하여 쓰는 것이므로 일상적으로 쓰는 글씨인 간찰체와 같은 범주에 놓고 평가할 수는 없다. 윤정현(尹定鉉)의 부탁으로 ‘침계(梣溪)’라는 횡액(橫額) 하나를 써주는 데, ‘침’자 예서의 적당한 글자를 얻지 못하여 30년 만에 써주었다고 하는 추사의 고백은 작품으로서의 글씨와 생활로서의 글씨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많은 간찰 글씨들이 추사의 영향을 받아서 힘 있고 거친 간찰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에 반하여 17, 18세기의 간찰 글씨들은 문곡이나 근암의 글씨를 모범으로 여겨서인지 유려하고 정밀한 간찰들이 많이 보인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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