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한국 최초의 트로트 노래비, 「목포의 눈물」 게시기간 : 2020-03-28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3-27 11:3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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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유달산을 오르다 보면, 막 가팔라지기 시작하는 비탈진 언덕 위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서 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트로트 노래비이다. 이 비는 1969년 6월 10일 목포악기점을 운영하던 박오주(朴午周)씨가 기증하여 세웠다.
‘목포의 애국가’라고까지 불리는 「목포의 눈물」은 “일제하 우리 민족 모두의 ‘망향가’였고 해방 후에는 설움 받는 전라도 사람들의 ‘시름가’였다. 그리고 민주투쟁의 연대에는 장렬히 산화한 열사들에 대한 남도인의 진혼가이기도 했다.”1)는 말처럼 목포는 물론 남도인들의 삶과 함께 하였다. 힘들고 슬플 때뿐만 아니라 기쁘고 즐거울 때도 「목포의 눈물」은 어김없이 우리 옆에 있었다. ‘유행가’라 불리던 대중가요는 레코드·축음기에 실려 1930년대에 황금기를 맞았다. 바로 이때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황금기를 더욱 빛나게 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하여 OK레코드사와 손잡고, 향토노래가사를 공모했다. 여기에 문일석(文一石)의 작품 「목포의 노래」가 3천여 통의 응모작 중 영예의 1등으로 당선되었다. 애절한 별리의 한을 담은 이 「목포의 노래」를 OK레코드 사장 이철은 「목포의 눈물」로 제목을 바꾸어 손목인에게 작곡을 의뢰하였고, 흥행사적 안목에서 목포 출신의 어린 가수인 이난영이 부르도록 하였다. 1935년 「목포의 눈물」은 음반이 출시되자마자 크게 히트하였다.2) 이렇게 트로트의 원조 「목포의 눈물」과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였다. 「목포의 눈물」은 한낱 유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달래는 노래 말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리는 가사가 되었고 선율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더욱 유행하였다.3)
트로트 열풍과 남도 「목포의 눈물」은 요즘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트로트 가요의 원조격이다. 한국에서 트로트는 1960년대부터 다시 발전하기 시작한 뒤, 1970년대에 이르러 4분의 4박자를 기본으로 하되, 강약의 박자를 넣고 독특한 꺾기 창법을 구사하는 독자적인 대중가요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최근 모 TV 방송국에서 방영한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이 불을 붙인 트로트 열풍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나 열어젖힌 것처럼 거세게 퍼져나갔다. 여기를 보아도 트로트, 저기를 보아도 트로트다. 나아가 「트롯신이 떴다」처럼 해외에까지 나가 K-TROT의 바람을 일으키려 애쓰는 레전드급 가수들의 모습을 보면 뭉클해지는 감동도 느낀다. 진도 출신 송가인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거침없이 “송가인이어라∼”를 외치며 그 유행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어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물론이다. 남도와 트로트는 유독 인연이 많다. 원조격인 이난영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모 일간지에 소개된 기사를 보면,4) 레전드급 가수들인 남진, 김연자, 주현미 등이 모두 남도 출신들이다. 영암에는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가 있어 이곳이 하춘화의 고향임을 알리고 있다. 강진, 오기택 등도 모두 남도 출신들이다. 판소리의 창법 트로트가 남도와 인연이 많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트로트는 일제 강점기에 유입된 네 박자의 미국 춤곡 폭스트로트(Foxtrot)가 그 어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뽕짝’이란 이름이 사실은 더 걸맞은 표현이다. 처음에는 주로 ‘유행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60년대 이후에야 트로트라는 장르로 굳어졌다. 이때 뽕짝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다만 뽕짝은 비칭(卑稱)이란 인식이 강해서 점차 트로트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뽕짝은 원래 ‘라시도미파’의 독특한 5음계를 갖는 단조 트로트였다. 그것이 조금씩 해체되어갔고 1960년대 후반에는 스탠더드팝과 혼융하면서 단조 트로트의 전형적인 음계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2000년 이후 장윤정이나 박현빈의 노래를 트로트로 구분하는 것은 선율이 아니라 창법이나 연주 관행, 창작자의 계보 등 때문이라고 한다. 즉 ‘올드패션’이라는 인상이 트로트로 분류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5음계는 거의 깨졌고, 오히려 꺾음목 등의 창법에서 그 특성을 찾고 있다. 대체로 소리를 내지르는 적극적인 발성 방식을 사용한다. 따라서 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나오고, 음정도 큰 폭으로 움직이며, 음정의 미묘한 움직임보다는 소리의 선이 크고 굵게 움직이는 쪽을 선호한다고 한다. 판소리는 이런 창법의 바탕으로 훈련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판소리의 발성은, 광대의 수련과정에서 목이 쉬고 피를 토한 후에 다시 터져 나온, 듣기에는 탁한 것 같으면서도 성량이 크고 변화가 많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판소리의 기원으로는 서사무가(敍事巫歌)를 꼽는다. 서사무가는 판소리와 함께 장편 구비서사시이므로 서사무가에서 판소리로의 전환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서사무가는 창과 아니리를 섞어서 부르는데다가, 전라도의 무가는 판소리와 같은 장단 변화를 지니고 있어 연관성이 더욱 높다. 판소리는 누가 뭐래도 예나 지금이나 전라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조용필과 김수희, 그리고 주현미도 모두 판소리 훈련을 거쳤고 그 덕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감의 슬픔을 구사하는 가창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미스 트롯의 송가인이 판소리 가수였다는 점도 트로트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남도 출신 가수들이 트로트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창법의 전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흥(興)과 한(恨)도 네 박자에 섞여 - 남도소리 네 박자의 오락성 등이 더 트로트다움을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트로트는 “4분의 4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 대중가요의 한 장르”라고 정의한다. 그만큼 4분의 4박자가 트로트의 핵심이다. 이 리듬 덕분에 트로트는 따라 부르기 쉽고 흥을 돋우는 리듬을 갖고 있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서민들의 음악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네 박자의 리듬이다. “니가 기쁠 때/ 내가 슬플 때/ 누구나 부르는 노래/ … /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네” 송대관의 「네 박자」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이다. 이 가사가 담고 있는 그대로 네 박자의 리듬 속에서 기쁨도 슬픔도 다 녹여 흥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트로트의 묘미이다. 「목포의 눈물」이든 「남행열차」든 그 가사를 살펴보면 결코 기쁠 것 없는데, 기아 타이거즈의 응원가가 되면 어느 틈엔가 흥을 북돋는 노래가 된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즐겁게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네 박자 덕분이다. 우리말의 전통적인 3·4조 운율에 네 박자만큼 어울릴 수 있는 리듬도 없다. 그래서 우리말을 노래 속에 가장 잘 버무릴 수 있는 장르가 트로트이다. 남도를 상징하는 민요인 육자배기에는 4음보의 노랫말들을 늘어놓고 2음보의 숨구멍을 두는 형태라고 한다. 즉 4박 형식의 말하기와 2박 형식의 호흡하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5) 이를 통해 한과 흥의 정서가 버무려진 남도소리가 나온다. 그래서 남도소리의 요체를 “슬프고 밉고 혹은 탄식하는 마음들이 기쁘고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들과 기운생동하며 부딪치다가 이내 화평의 자리로 이끈다.”고 해석하였다.6) 이런 남도소리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를 수 있는 트로트와 잘 통한다.
크로스오버로 담아내는 뽕짝의 힘 ‘트로트’ 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뽕짝이라 해서 천시하고, 또 엔카에서 유래했느니 왜색이니 운운하기도 했었는데, 지금 이런 트로트 열풍은 그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미스터 트롯」에서는 트로트의 하위 장르를 정통 트로트, 댄스 트로트, 올드 트로트, 발라드 트로트, 락 트로트, 세미 트로트, 국악 트로트, 블루스 트로트 등으로 나눠놓았다. 사실상 요즘 유행하는 모든 장르의 노래들을 트로트라는 틀 안에 버무려놓고 있다. 마치 우리말로 부르는 노래는 전부 트로트가 돼버린 듯하다. 이게 과연 맞나? 그러면 트로트 아닌 노래는 뭐가 있나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트로트의 역사를 보면, 이도 일리 있는 구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처럼 다양한 다른 장르들이 트로트가 되어버렸을까? 이를 한국적인 크로스오버에서 찾고 있다. 크로스오버란 장르가 서로 다른 음악의 형식을 혼합하여 만든 음악인데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들어오면 이를 뽕짝이란 틀에서 혼융해 버린다.7) 뽕짝은 우리말의 언어적 특질에 가장 잘 맞는 멜로디 라인을 가진 음악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서양노래를 우리말로 바꿔 부르면 그 맛이 잘 안 난다. 억양과 강세가 다르고 3·4조 운율을 갖는 우리말에 맞게 바꾸다 보면 그 과정에서 크로스오버가 일어나 이미 우리 것, 즉 뽕짝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뽕짝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정감 어린 용어인데, “수준 낮은”, 또는 “천한” 등의 느낌을 준다고 해서 잘 쓰지 않으려 한다. 뽕짝이 어떤 유흥에도 잘 어울린다고 이를 수준 낮은 음악이라고 비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뽕짝이 질 낮은 음악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정서에 잘 맞아 대중적인 파급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쉽고 편하고 우리말의 감칠맛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장르가 바로 뽕짝인 것이다. 트로트가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일본 문화의 찌꺼기’로 치부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일제 때 나왔다고 다 왜색 일색이 아닌 것처럼 트로트도 마찬가지다. 바로 우리의 독특한 크로스오버가 작동하여 우리 것으로 변용시켰다. 서양의 12음계에 의해서 변형된 엔카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운율이 결합해서 뽕짝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트로트라는 음악의 형식이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태어났던 것이다. 뽕짝의 원적(原籍)이 어디였든지 우리 언어로 부르게 되면, 그것은 그런 굴절의 과정을 이미 겪은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뽕짝이 되었던 것이다.8) K-TROT가 되어 한류의 흐름에 동참하려는 지금 21세기는 뽕짝이 갖고 있던 20세기의 부채감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트로트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예(濊)에서는 “항상 10월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고 하였고, 고구려는 “그 백성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겨한다.”, 또 한(韓)에 대한 기록에서도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는 것을 즐겼다.”고 되어 있다. 노래를 즐기는 것은 동이족의 보편적 특징이었다. 이처럼 예로부터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우리 민족이 요즘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가 무엇일까? 한국갤럽이 지난 2019년 조사한 결과를 보면, 1위는 ‘만남’(노사연), 2위는 ‘내 나이가 어때서’(오승근), 3위 ‘안동역에서’(진성), 4위 ‘사랑의 배터리’(홍진영), 5위 ‘남행열차’(김수희), 6위 ‘동백아가씨’(이미자) 순이었다. 트로트가 열풍을 일으키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니면 벌써 그렇게 우리 사회가 고령화되었나? 한국 최초의 트로트 노래비인 「목포의 눈물」 비를 돌이켜 보는 지금, 트로트 열풍의 원조를 만나는 느낌이 새삼스럽다.
1) 한송주, 「60년간 민족의 심금 울린 영원한 ‘망향가’ ‘목포의 눈물’」(『藝鄕』, 1995. 1.)
2) 1935년에 일본의 ‘나라’에 있는 제국 그라마폰에서 오케이레코드사 제작으로 이난영이 취입하였다고 한다. 「목포의 눈물」 가사의 1절은 목포의 낭만과 꿈을, 2절은 민족적 원한을, 3절은 이충무공에 대한 추모의 정을 각각 담고 있다. 3) 이 부분에 대하여는 고석규,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공간·문화』(서울대출판부, 2004) 참조. 4) 「전국민 사랑받는 우리 … 트로트 가수여라∼」(『광주일보』 2020. 3. 17.) 5)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육자배기란 무엇인가」(『全南日報』, 2019. 6. 19.) 6)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당골 박병천」(『全南日報』, 2019. 11. 13.) 7) 이영미, 『한국대중예술사, 신파성으로 읽다』(푸른역사, 2016) 8) 이우용, 『우리 대중음악 읽기』(창공사, 1996). 뽕짝 관련 서술은 이 책을 주로 참고하였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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