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순창 구암사에서 백파대사를 계승한 설두-설유-석전-운기 등 호남의 대강백을 만나다. 게시기간 : 2020-03-31 07:00부터 2030-12-17 00:00까지 등록일 : 2020-03-30 13:3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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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구암사 부도밭은 상단, 중단, 하단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에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어 좌우로 나뉜다. 현재 부도는 상단과 중단의 두 단에만 있고, 하단에는 없다. 상단에는 부도가 3기가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에 설파당(雪坡堂) 부도가, 향우측에 백파당(白坡堂) 부도, 향좌측에 정관당(正觀堂) 부도가 있다. 중단에는 승려비 1기와 부도 7기가 모셔져 있는데, 향우측으로부터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가 세워져 있고, 그 좌측에 설두당(雪竇堂) 부도, 설유당(雪乳당) 부도, 석전당(石顚堂) 부도, 일헌당(一軒堂) 부도, 중산당(中山堂) 부도, 운기당(雲起堂) 부도, 홍룡당(洪龍堂) 부도가 있다. 상단의 설파당(설파상언, 1707~1799)과 백파당(백파긍선, 1767-1852)은 불가별전4에서 이미 간략하게 살핀 바가 있듯이 조선후기 구암사를 중심으로 화엄학과 참선수행을 강조한 호남의 고승이었다. 정관당(正觀堂)은 앞의 두 스님에 비해 덜 알려진 스님인데, 백양사의 정관쾌일(正觀快逸)이다.
1. 순창 구암사 부도밭 그는 백파긍선-도봉국찬-정관쾌일-백암도원-설두유형으로 이어지는 승맥상에서 백파긍선을 이으면서 그것을 설두유형에 전하는 백암산 백양사의 큰스님으로 이해된다. 장성 백양사와 고창 선운사와 승맥상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순창 구암사에 정관쾌일의 부도가 모셔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정관쾌일의 승비(僧碑)가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중단에는 상단의 세 분 큰 스님을 잇는 승려들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부도밭의 배치에서 승려들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법맥(法脈)을 살필 수 있다. 맨 우측의 백파대사비 좌측에 설두당 부도가 주목된다.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90)이다. 그의 법명은 봉기(奉琪)이고 자는 유형(有炯)이며 설두(雪竇)는 법호이다. 성은 완산 이(李)씨로서 1824년(조선 순조 24년, 道光4) 에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전리에서 태어났다. 나이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장성 백양산으로 들어가 정관쾌일(正觀快逸) 대사 문하에서 머리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스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 백암도원(白岩道圓) 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침명(枕溟) 강주에게서 선참(禪懺)을 받았으며 백암 계사의 당(堂)에서 향불을 지피고 예를 올려 전법제자가 되었다.
2. 우측으로부터 백파대사비, 설두당 부도, 설유당 부도, 석전당 부도가 모셔져 있다. 그는 일찍이 서당에서 태사사(太史史)와 소미서(少微書)를 공부하였는데 이때 스승께 사집(四集)과 삼경(三經)의 의미를 판별하여 줄 것을 졸라 스승을 당혹케 하기도 하였다. 태사사는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의 역사서인 『사기(史記)』이고 소미서는 소미(少微) 강지(江贄)의 『통감절요(通鑑節要)』이며 사집(四集)은 『서장(書狀)』, 『도서(都序)』, 『선요(禪要)』, 『절요(節要)』이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을 지칭한다. 그는 침명한성 강백의 강석을 찾아가 사교(四敎)의 의문점을 해소하고 순창 영구산 구암사 백파긍선의 선담법회(禪談 法會)에 참석, 대교(大敎)의 난관을 해결하였다. 이 법회에서 그는 한 가지의 화두(話頭)를 받고 백파긍선의 선맥(禪脈)을 이어 백파대사의 4대 법손이 되었다. 이 무렵 백파긍선의 『선문수경(禪文手鏡)』에 대한 반론으로 초의의순의 『사변만어(四辨漫語)』와 우담홍기의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이 나와 백파의 선론(禪論)을 비판하므로 설두는 다시 『선원소류(禪源溯流)』를 지어 백파의 선론을 옹호하였다. 그는 1870년(고종 7년, 同治9) 모악산 불갑사(佛岬寺)로 주석처를 옮겨 황폐한 사찰의 면모를 일신시킨 뒤 다시 담양 월산면 용흥사(龍興寺)로 옮겨가 그 곳에 머물면서 또한 퇴락한 절을 중수하였다. 또한 백파 스님의 행장을 알리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의 비석을 세우고 어제어필(御製御筆)의 각(閣)을 건립하였으며 『기신론(起信論)』을 대대적으로 간행한 예를 본받아 『염송집』의 판역(板役)을 주선하였다. 설두유형은 1889년(고종 26년, 光緖15), 환옹환진(幻翁喚眞)의 청에 의하여 양주 천마산 봉인사(奉印寺)에서 선문강회(禪門講會)를 열고 이듬해 8월 입적하니 향년 66세였다. 그는 경담서관(鏡潭瑞寬), 함명태선(涵溟太先)과 더불어 조선 말기 불문(佛門)의 삼걸(三傑)로 꼽힌다.『통방정안(通方正眼)』, 『선문(원)소류(禪門(源)溯流)』, 『설두시집(雪竇詩集)』, 『사기(私記)』 등 그의 유작들이 전해지고 있다. 백파긍선의 법맥은 구봉인유(龜峰仁裕) - 도봉국찬(道峰國燦) - 정관쾌일 - 백암도원(白岩道圓) - 설두유형(雪竇有炯) 등으로 전해지며, 그의 동문형제로는 보월만익(普月萬益), 영월경문(影月鏡文)이 있으며, 그의 문인들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전하지는 않는다. 설두당 부도의 좌측에 설유당(雪乳堂) 부도가 있다. 설유당은 설유처명(雪乳處明, 1858-1903) 스님이다. 성은 배씨(裵氏). 호는 설유(雪乳). 충청남도 공주 출신이다. 본래 법명은 혜오(慧悟)이며, 뒤에 처명이라고 고쳤다. 아버지는 세엽(世曄)이며, 어머니는 고령 박씨이다. 15세에 부모가 돌아가자 관북 안변 석왕사(釋王寺)로 출가하여 도운(道雲)의 제자가 되었고, 16세에 도운을 따라 호남으로 와서 백파(白坡)의 제자 유형(有炯)에게 수학하였다. 얼마 뒤에 은사 도운이 퇴속하여 죽자 유형을 은사로 삼아 수학한 지 10여 년 만에 마침내 다륜(茶輪)의 법맥을 이었다. 설두유형이 입적한 뒤에 강석(講席)을 이어받아 20여 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학도를 따뜻하게 교화하였으므로 그 교육을 받은 자가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 1895년 강석을 문인 정호(鼎鎬)에게 맡겼다. 강석을 문인에게 맡긴 뒤에 고요한 방으로 물러나 내외의 여러 서적을 독파하였다. 시문에도 조예가 깊어 고인의 가풍이 있었으며, 당시의 명사인 황매천(黃梅泉)·기송사(奇松沙)·정운람(鄭雲藍) 등과 깊이 교제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설하집(雪下集)』이 있었으나 간행되지 않았다. 설유당 부도 좌측에 석전당 부도가 있다. 석전당은 석전 박한영(1870-1948)이다. “北한영 南진응”의 장본인이다. 서울에는 박한영 스님이, 남쪽에는 화엄사 진응혜찬 스님이 대강백이라는 일제강점기로부터 전해지는 말이 있다. 그는 1870년(고종7) 음 8월 18일에 전북 완주군 초포면 조사리에서 탄생했다. 부친의 휘는 성용(聖鏞)이요, 모친은 진양 강씨이다. 부친이 일찍이 돌아가셔서 농사를 지으며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타고난 총명과 남다른 학문에의 관심은 일찍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하여 이미 17세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몽훈장(童蒙訓長)을 하였다. 19세(1888) 되던 해에 전주 위봉사의 금산화상(錦山和尙)에게 출가, 득도하니 법명을 정호(鼎鎬)라 하였다. 21세 (1890)에는 장성 백양사 운문암의 환응탄영(幻應) 스님에게 사교(四敎)를 사사하고, 23세 (1892)에 순천 선암사의 경운원기(擎雲) 스님에게서 대교(大敎)를 수학했다. 환응, 경운 스님은 당대의 유명한 대강백이었다. 25세에는 안변 석왕사를 비롯하여 신계사와 건봉사에서 안거하였고, 이어서 26세(1895)에는 순창 구암사의 설유처명 대사에게 참하여 사법(嗣法) 했다. 이때 석전(石顚)이란 호를 설유처명에게 받게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백파에게 ‘석전(石顚), 만암(曼庵), 다륜(茶輪)’이라는 글씨를 지어 주면서 “뒷날 제자 가운데 도리를 깨친 자가 있거든 이로써 호를 삼으라.”는 부탁이 설유처명에게 유전되어 그 이름이 전수된 것이라 한다. 설유처명에게 사법한 다음 날 구암사에서 개당(開堂)하니 학인이 운집하여 종풍을 크게 드날렸다 한다. 30세(1899)에는 진주 대원사에서 대강회를 베풀고, 이어 백양사, 해인사, 법주사, 화엄사, 석왕사, 범어사 등에서 강설삼장의 대법회를 열어 강설하였다. 1908년 39세 되던 해 서울에 올라와 만해(卍海) 슨짐 등과 함께 불교유신운동을 펴는 한편, 41세(1910)에는 원종 종무원 종정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연합협약을 체결하여 한국불교를 일본의 조동종에 합종시키려 함에, 진진응, 한용운, 오성월, 김종래 등과 함께 임제종 정통론을 내걸고 이를 저지하였다. 즉 1910년 11월에서 1912년 6월에 이르는 동안 처음에는 언론 등을 통해 원종을 규탄하다가, 증심사·송광사·범어사 등으로 임제종 종무원을 옮기는 한편, 광주, 서울, 대구 등지에 임제종포교소를 설치하여 반조동종의 임제종지를 선양하였다. 43세(1912)부터는 『조선불교월보』를 통해, 또는 44세(1913)에는 그가 직접 발간한 『해동월보』를 통해 유신을 역설하며 불교인의 자각과 불교개혁운동을 촉구하였다. 그 뒤 55세(1924)에는 『佛日』(조선불교회 발간)의 창간시 백용성과 함께 편집인을 맡았으며, 56세에는 『조선불교총서』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한편 43세(1912)에는 명진학교의 후신인 중앙불교전문학원의 교장에 취임하고, 45세(1914)에는 고등불교강숙의 숙사(塾師)로, 47세에는 불교중앙학림의 강사가 되었으며, 57세(1926)에는 서울 개운사에 전문강원을 설립하여 20여년에 걸쳐 불교의 지도적 영재를 양성하기에 심혈을 기울였 으며, 63세(1932)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되어, 고등교육 일선에서 불교를 전하고 도제양성에 온 몸을 다바쳐 불교중흥과 조국광복의 인재양성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60세(1929) 때에는 개운사 선원에 있으면서 조선불교선교양종의 敎正에 취임하여 조선불교의 최고지도자로서 폭넓은 도량 으로 한국불교를 지도해왔다. 64세(1933)에는 중국을 다녀오고, 76세 (1945)에 해방을 맞아 조선불교중앙총무원 초대 교정으로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새로운 종단을 이끌어 오다가, 말년에는 전북 정읍 내장사에 내려와 1948년 4월 8일 79세, 법랍 61세로 입적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는 최근세의 한국불교를 이끌어온 선각자요 지도자로서, 당시 한국불교의 선·강맥의 전승이 거의 그에 닿지 않음이 없다 할 정도로, 선교를 겸한 고승이요 대석학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니, 근대 한국의 최고 지성들, 즉 운기, 운허, 청담, 서경보 등의 출가승은 물론, 이광수, 신석정, 조지훈, 서정주, 김달진, 김어수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직간접으로 그의 학덕을 입었던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도 짐작되듯이, 그는 당시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층 전반에 걸친 폭넓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그 가운데 특히 만해 한용운과의 관계는 남다른 데가 있어 1913년 5월 『조선불교유신론』의 발표시 그 제자(題字)를 손수 그가 썼을 정도로 깊은 정을 나누었다 한다. 석전의 법맥계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청허휴정(淸虛休靜)—편양언기(鞭羊彦機)—월담설제(月潭雪霽)—환성지안(喚醒志安)—설파상언(雪破尙彦)—퇴암태관(退菴泰瓘)—설봉거일(雪峰巨日)—백파긍선(白坡亘璇)—도봉국찬(道峰國燦)—정관쾌일(正觀快逸)—백암도원(白岩道圓)—설두유형(雪竇有炯)—다륜익진(茶輪益振)—설유처명(雪乳處明) — 영호정호(映湖鼎鎬)로 이어졌다. 석전의 저술은 『石顚文鈔』, 『石顚詩鈔』 등의 문집 외에 『精選緇門集說』, 『戒學約詮』, 『拈頌新編(전5권, 프린트본)』 등 9책의 단행본류의 저서와, 각종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100여건이 넘는 논설과 수필이 남겨져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그의 독창적 사상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석전문초』는 「석림수필」과 「석림초」의 2편으로 되어 있는데, 21장으로 되어 있는 「석림수필」은 주로 그의 선사상과 지율엄정정신, 그리고 시선일치 등 그의 중심사상이 담겨있다. 60여편으로 되어 있는 「석림초」에는 근대를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한국고승들의 비명, 음기, 탑명 또는 사원들 의 중건기, 그리고 고승들의 행략과 그들의 영(影)과 찬(贊), 또는 법당의 상량문 등의 문헌이 실려 있다. 석전당 좌측에 모셔진 일헌당(一軒堂)·중산당(中山堂)을 건너뛰어 운기당(雲起堂) 부도가 있다. 운기당은 운기성원(雲起性元,1898~1982)이다. 그는 조선후기 백파긍선의 강맥을 계승한 석전(石顚) 스님의 제자로서 내·외전을 고루 갖추었다. 운기스님의 수행과 삶을 전강제자 혜남스님(영축총림 통도사 전계사)은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에 있는 운기스님 비문을 통해 정리했다. 대강맥 운기스님은 언제나 교(敎)와 선(禪)을 일치한 수행을 강조했다. 참선수행을 병행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항상 참선을 닦고, 교(敎)를 생각하라”고 했다. 선교일치(禪敎一致)가 공부 지침이었으며, 당신의 삶이었다. “공부해라. 비구승이 되거라”는 것이 운기 스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석전 박한영 스님의 강맥을 계승했다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주위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운기스님이었지만, 석전스님의 강맥을 계승했다는 점은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운기성원(雲起性元1898-1982)은 1898년 12월 26일 전북 고창군 해리면 광승리에서 부친 배두섭(裵斗涉) 선생과 모친 밀양 박씨(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세속 이름은 배화수(裵華洙)이다. 1915년 고창 선운사에서 경암선사(炅庵禪師)를 은사로 득도했다. 사서삼경과 『주역』, 『춘추』 등 외전(外典)을 두루 익혔으며, 1924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선문염송(禪門拈頌)』 등 내전(內典)도 서울 개운사 대원암에서 깊이 공부했다. 당시 대원암에 개설된 조선불교전문강원(朝鮮佛敎專門講院)에는 석전(石顚)스님이 강주로 있으면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이 강원을 수료한 것은 1925년으로 세수 27세였다.
3. 좌로부터 운기당 부도, 중산당 부도, 일헌당 부도가 모셔져 있다. 1934년부터 고창 선운사 주지를 지냈으며, 1936년에는 장성 백양사 강원의 강주(講主)가 되어 후학 양성에 나섰다. 1936년 백양사에서 석전스님을 법사로 대덕법계(大德法階)를 받은 스님은, 이듬해인 1937년 석전스님에게 전강(傳講)을 받음으써 조선후기 화엄종주(華嚴宗主)인 설파(雪坡)-백파(白坡)-설유(雪乳)-석전스님의 강맥을 계승한 선지식이이 되었다고 파악된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김제 금산중고등학교장으로 인재를 양성했으며, 1958년에는 다시 선운사 주지를 맡았다. 한때 정읍 호남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70년에는 동국역경위원으로 위촉되어 경전 번역에 주력했다. 1975년부터 1982년까지 해남 대흥사와 제11교구본사 불국사에서 강주로 제자를 양성하다가 1982년 12월29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84세, 법납 68세였다. 그의 강맥은 1977년 전강을 받은 중산혜남(中山慧南, 영축총림 통도사 전계사, 전 중앙승가대 교수)스님을 비롯해 재선(在禪) 응각(應覺) 도형(道亨) 철웅(鐵雄) 도일(道一)스님이 잇고 있다. 그의 상좌로는 기산(基山) 정산(定山) 재정(在正) 혜산(慧山) 계진(戒眞) 재진(在進) 대오(大悟) 대우(大愚) 계원(戒元) 범여(梵如)스님이 있다. 운기스님 부도와 미당 서정주가 지은 「운기당성원대강백비(雲起堂性元大講伯碑」가 고창 선운사에 모셔져 있는데, 순창 구암사 부도밭에는 운기 스님 부도만 있다. 이와 같이 구암사는 백파대사 이후에는 설두유형(雪竇有炯,1824~1889) - 설유처명(雪乳處明, 1858~1903) - 정호한영(鼎鎬漢永, 1870~1948) - 운기성원(雲起性元, 1898-1982) 스님 같은 대강백이 주석하면서 화엄 불교교학과 참석수행으로 후학을 양성하며 법등을 이어갔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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