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시초대석] 작법으로 읽는 한시 절구(5) 가련타[自憐] 게시기간 : 2020-04-02 07:00부터 2030-12-24 21:00까지 등록일 : 2020-04-0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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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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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는 다양한 시풍이 존재하는데, 크게 구분하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로 나눌 수 있다. 보통 이들 시를 분류할 때 당시는 서정적인 면이 강하고, 송시는 관념적, 설리적(說理的)인 면이 강하다고 한다. 당시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위주로 그림처럼 그려내는 시라면 송시는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위주로 안배하여 엮어나가는 시라고 보는 것이다.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아래 두 시를 보면 그 분위기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의 시는 당(唐)나라 이백(李白)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라는 시이고, 뒤의 시는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시이다. 둘 다 여산(廬山)이라는 곳을 대상으로 읊은 시인데, 독자가 느끼는 맛은 차이가 있다. 이백의 시에서는 특별히 깊은 뜻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독자 스스로가 자연스레 여운을 가지게 되는 데 비해, 소식의 시에서는 시인의 판단이 깔려 있어서 독자가 그에 맞춰 이끌리게 되는 감이 있다. 조선 초기부터 선조 연간까지는 뛰어난 시인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을 이루던 시기이다. 당시와 송시가 번갈아가며 유행을 이루기도 하고, 나란히 유행하기도 하였는데, 아무래도 송시풍이 더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시인들이 나타났는데, 이른바 ‘삼당시인’이다. 그들은 조선 선조(宣祖) 연간의 시인들로서, 송시풍이 아닌 당시풍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손곡(蓀谷) 이달(李達) 세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저명한 시인이자 문신이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제자들로서, 박순 역시 당시풍을 강조하던 인물이었다. 강원도 원주 출신의 이달을 제외하고는 나주 출신의 박순, 장흥 출신의 백광훈, 영암 출신의 최경창은 물론이고, 이들과 친하게 시를 주고받았던 임제(林悌), 양대박(梁大樸) 등이 모두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당시 호남 지역에서는 당시풍이 대세를 이루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볼 수 있다. 시의 작자인 이달(李達, 1539~1612)의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서담(西潭), 동리(東里)이다. 본관은 신평(新平)이라고 하기도 하고, 홍주(洪州)라고도 한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에게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고, 후에 박순에게서 당시를 배웠다. 조선 중기의 저명한 시인이자 한시 비평가였던 허균(許筠)이 그의 제자이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1574년(선조 7)에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있을 때 이달을 청하여 대접하였는데, 이 시는 이 때 지은 것이다. 화려한 봄날 한창 흥이 오를 호시절에 몸이 병들어 관청의 동헌에서 머물고 있어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첫 두 구절에서는 봄기운이 한창인 시절, 만물에 생기가 도는 광경을 묘사하였다. 남쪽 연못에서는 겨우내 줄었던 물이 불어나 있고 그 위로는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대나무 숲 근처에서는 복사꽃이 막 피어나고 있다. 독자들이 봄날의 실제 경치를 보는 듯한 묘사가 훌륭할 뿐만 아니라, 푸른 연못과 흰 물안개, 녹색의 대나무 숲과 연분홍의 복사꽃 색상을 그림처럼 또렷하게 대비시킨 솜씨가 과연 당시풍의 대가 답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제3구의 자련(自憐)은 ‘자신을 가련하게 여긴다’는 의미인데, 하나의 상투어가 되어 ‘가련타’, ‘슬프다’라는 의미의 영탄적 시어로 많이 사용된다. 주로 절구시 제3구의 첫머리에 놓아, 앞의 두 구절에서 전개되던 분위기의 전환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이 시 앞 두 구절의 아름다움이 시인에게는 오히려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을 이 시어가 잘 표현하고 있다. 같은 의미, 같은 용법의 시어로는 ‘가련(可憐)’, ‘추창(惆悵)’ 등이 있다. 다만, ‘가련(可憐)’의 경우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서 주의해야 한다. ‘련(憐)’자가 보통은 ‘가련타’라는 의미이지만, ‘사랑스러워라’, ‘즐거워라’, ‘부러워라’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역대로 문인, 학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당(唐)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저주서간(滁州西澗)」이라는 시에 대표적인 사례가 보인다.
아래 구절에 따라오는 두 구를 보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독련을 ‘유독 가련하다’로 보게 되면, 뒤의 두 구절과의 절구시로서의 시적인 균형이 맞지 않게 된다. 네 구 모두 암울한 분위기가 되어버려 전구(轉句)에서의 긴장감과 반전의 묘미가 줄어드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쉽게 잡히지 않고 있다. 아시아에 국한된 문제로 여겨졌던 이 역병은 이제 유럽, 미국 등 전 세계인이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전염을 막기 위해 제안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은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그 때문에 국내에서는 이맘때쯤 절정을 이루던 상춘 행락 인파도 많이 줄었다. 물론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벗어난 사례가 일부 있어 사회적으로 비난 여론이 일기도 한다. 꽃구경을 즐기겠다는 것을 무조건 욕할 수도 없다. 우리 민족은 뭐든 함께 해야 직성이 풀리는 속성이 있다. 기쁨도 슬픔도 늘 함께 나누려고 한다. 좋은 일은 함께 해서 기쁨을 배가시키고, 힘든 일은 함께 해서 고통을 반감시킨다. 산에 가도 북적이는 곳으로 가고, 바다에 가도 북적이는 곳으로 간다. 꽃구경도 북적이는 곳에서 한다. 오갈 때의 길 막힘, 인파의 부대낌 같은 것은 사소한 불편 정도로 예사롭게 넘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함께 하면 할수록 고통이 더해지는 상황이다. 아무리 꽃놀이가 좋고 봄놀이가 좋더라도 고통을 키운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올해는 모쪼록 그 흥취를 좀 누그고 이 시 한 수를 읊으며 아쉬움을 달래고 말일이다. 글쓴이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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