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조선말기의 약국 기록 자료, 강진 박약국 문서 게시기간 : 2020-04-04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4-0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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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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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노병사. 사람사는 데는 당연히 질병이 따르게 마련이다. 다쳐서건 선천적이건 돌림병이던. 그리고 건강 장수를 바라며 약을 찾기도 한다. 전통시대에는 약을 어떻게 구입하고 주문하고 유통했을까. 이에 대한 실물 자료는 많지가 않다. 그런데 강진 박약국 문서는 1892년에서 1901년에 이르기까지 약국을 운영하면서 약재를 유통했던 기록으로 잘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소 매우 드물게 전하는 기록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1호가 된다. 지정명칭은 강진 병영 박약국 문적(康津 兵營 朴藥局 文籍). 2017년 7월 27일 지정. 박약국 문적은 조선시대 후기~근대기에 강진 전라병영을 중심으로 “박약국”을 경영 했던 비당 박재빈(朏堂 朴載彬, 1829~1898)과 아들 국포 박장현(菊圃 朴章鉉, 1854~1900), 강재 박기현(剛齋 朴冀鉉, 1864~1913) 등 박씨 집안에서 기록한 약재 도소매 관련 문서(1892~1901) 11책과 전라감영 간행 목판본 <동의보감> 전질 25책이다. 박씨 집안은 인구가 많고 상업이 발달한 전라병영에서 19세기말에 “박약국”이라는 약국을 경영했다. 약재를 매입하여 첩약을 조제하거나 환약을 제조하고 약재와 약을 판매하는 일종의 ‘한약방’이다. 박약국은 도매와 소매를 함께 하고 전국 각지에서 약재를 조달하는 지역 거점 약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약국은 막대한 자본력, 정밀한 영업망, 풍부한 정보력, 그리고 많은 경영원을 통해 운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영 극대화를 위해 치밀한 장부를 작성하여 보관하였다. 또한 의학 지식을 위해 의학서를 구입해 활용하였다. 문서는 약재를 매입하고서 그 명세를 기록한 <무약기(貿藥記)>, 약재와 약을 판매하고서 그 내역을 기록한 <제약책(製藥冊)> , 또한 당시 거래관행은 외상이 주였기 때문에 외상 파악과 수금을 위한 <약가초기(藥價抄記)>와 <약가봉상책(藥價捧上冊)>, 그리고 <각처각국거래책(各處各局去來冊)> 등이다. 박약국의 <무약책>, <제약책>, <약가초기> 등은 약재 도소매와 관련된 내용을 그때그때 기록한 문서이다. 박약국에서 판매한 약종과 약재의 매입처, 매입자, 거래 손님, 계산의 방법, 도소매차 오고가는 교통비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거래 손님은 주변의 지인이나 원근 주민 등 일반 소비자, 중간 소매상, 약국 등이 있다. 약재의 이동과 약종의 분석 등을 통해 특정 시대의 향촌사회의 의약 소비실태나 질병에 관한 자료를 알아 낼 수도 있다. 일부 약종은 지역의 특징도 나타난다. ‘보증기탕’ 등 자양강장제 성격의 처방이 있는데, 육체노동을 하는 농촌 주민들의 생산 활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약국 경영활동과 함께 높은 의학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다량의 의학서적을 구입하여 활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동의보감> 25권 전질이다. 대부분의 전통 약재 처방은 <동의보감>이나 <방약합편(方藥合編)>을 따랐다고 하는데 <동의보감> 소장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박약국 문서에 보이는 처방 가운데 ‘광명단’ 등은 <동의보감>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의학입문(醫學入門)>을 본 것으로 보고 있다. 강진이라는 향촌사회에서 <의학입문>을 보았다면 박약국을 운영한 인물들의 의약에 관한 지식의 수준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박약국 경영의 근거지였던 병영은 조선시대 전라병영이 1417년에 자리 잡았던 지역으로 서남해의 사회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박씨가 선대는 옴천면 오추리에서 약국을 하다가 병영면 박동을 거쳐 1895년에 병영면 지정리 개성평(開城坪)에서 비당 박재빈(1829~1898)이 박약국을 경영하였다. 박동리와 지정리는 군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병영장이라는 장시가 열리는 전라병영의 행정․경제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개업한 박씨가의 약국이름은 성을 따서 박약국 또는 지명을 따서 개성국(開城局)으로 불리었다. 문서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자. <무약기> 2책은 임진년(1892)과 을미년(1895) 기록이다. 약재를 매입에 대해 날짜별로 종류, 수량, 가격, 매입처를 기록하였다. 박약국 주변 강진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있다. 강진지역은 성전 율치 나사판(백작약 1근, 8전) 작천 토동 전중이, 옴천 박씨, 병영 오추동 김서방 등이다. 도내는 고흥, 낙안, 해남, 동복, 고산, 나주, 장흥, 전주, 진도 등이 보인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1892년 4월에 진피(귤껍질 말린 것) 20근을 9냥 5전에 매입한 사례가 있다. 또한 서울⋅평양⋅함흥 등지와 전주⋅공주⋅대구 등지의 약령시에서 약재를 매입하였다. 약령시는 약재 전문 시장으로 봄과 가을 연 2회 열리었다. 1892년 4월에 공주 약령시에서 약재를 136냥 3복 어치를, 당재(중국산)를 26냥 5전 5복 어치를 매입하였다. 개항장인 경상도 동래에서 약재를 매입하기도 하였다. <제약책>은 약재와 약을 판매한 기록이다. 병신년(1896), 정유년(1897), 무술년(1898), 기해년(1899) 등 4건이 있다. 여기에는 권역 지어진 마을별로 약재를 가져간 사람들의 이름, 약종, 약값, 결제내역 등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1896년 1월 5일에 병영면 낙산에 사는 김영일이 쌍화탕 5첩을 1냥에 사면서 일시불로 결제하였다”는 형식이다. <약가봉상책>은 2년치(기해, 경자) 1책이다. 당시 거래 관행은 외상이 주였기 때문에, 외상 파악과 수금을 위해 기록한 것이다. 마을별로 외상 달린 사람 이름과 약값이 기해년 것부터 이전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상환했으면 언제 얼마를 상환했다고 추가 기록되어 있다. 본인이 직접 가지고 왔으면 ‘上’으로, 박약국의 允三(친족)이 받아 왔으면 ‘允三捧’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약재, 생필품, 노임 등 다른 물건이나 방법으로 공제한 경우, 아예 탕감한 경우도 있다. <각처각국거래책>은 4년치(을미~무술/1895~1898) 1책이다. 외상 파악과 수금을 위해 기록한 것이다. 일반 소비자를 다룬 약가초기나 약가봉상책과는 달리, 이는 50여 곳의 멀리 있는 ‘각처(各處)’나 거래액이 많은 ‘각구(各局)’만을 다룬 것이다. 예를 들면, 완도의 김봉조, 청산도의 김의유, 고군면의 윤군(尹局), 서울의 허국(許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일반 소비자와 중간 도매상(또는 약국업자)을 분리해서 관리했다는 것은 경영 합리화에 많은 관심을 쏟았음을 증명해준다. <각인처전곡거래일기>는 표지는 병신년이라 적혀 있지만, 내용은 을미년(1895년)부터 계묘년(1903년)까지 박약국에서 각인에게 빌려주고 받은 금액을 날짜별로 기록한 장부이다. 여기에는 사채로 빌려주고 받은 금액도 있지만, 약재 매입을 위해 빌려주고 받은 금액과 함께 의약 값으로 받은 금액도 들어 있어 박씨가의 약국경영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동의보감>은 조선 최고의 의학 서적이다. 박약군 소장본은 18세기 중반에 전라감영에서 중간한 것이다. 책 끝의 간기는 “歲甲戌仲冬內醫院校正完營重刊”이다. 갑술년은 1754년으로 보인다. 1753년(영조 29, 계유)에 “영영(嶺營)에서 간판(刊板)하게 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완영에서도 중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판본은 규장각, 장서각, 연세대학교학술정보원 등에 있지만 현재 전라도 지역에서 18세기 것으로 전질이 남아 있는 경우는 희귀하다. 박약국을 운영했던 박재빈의 아들 강재 박기현(1864∼1913)이 기록한 <강재 일사(剛齋日史)>는 1891년부터 1903년까지 강진, 장흥일대에서 향촌사회의 동향과 박기현과 그의 문인과의 교류를 기록한 일기이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의 동학농민군 측과 관군 측의 동향과 전투상황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6호이다. 그런데 이 <강재일사(剛齋日史)>에도 10여회의 의약활동에 관한 기록이 나와 비교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1891년 1월 17일 : 진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화방 매부 병이 낫지 않고 더 위급하다는 기별이 어제 왔으니, 너는 의원을 맞이해서 가보도록 하라고 하셨다. 나는 김의 의유씨를 가마에 태워서 가서 보았다(進賜主曰 汝花坊妹夫疾 不療愈篤急奇昨來 邀醫汝往 余邀金醫義由甫於轎子而見). 1896년 6월 6일 : 하고 최의원 집에 가서 형님의 증세를 설명하고서 가미양위탕을 지어와 하루 두 번 다려 마시게 했다. 저녁에 나는 잠시 집으로 돌아와 마을 노인에게 형님의 학질을 막도록 청하였다(往下古崔醫家 而論兄主瘧祟 而得加味養胃湯之劑 一日再煎服之 夕余暫還巢 請里老防兄主之瘧疾). 조선시대 후기에는 전국 곳곳에 민간 의료시설이 설치 운영되는데 보통 의국(醫局)과 약국(藥局)이 이원화되어 있다. 의국은 환자를 치료하고 약을 투여하였고, 약국은 약을 판매하기만 하였다. 이러한 의약관련 운영 실태를 알 수 있는 문서로 현전하는 것은 드물다. 강진 병영 박약국 문서는 조선후기~근대기의 약재 도소매와 관련된 약국문서로서 박약국에서 판매한 약종과 약재의 매입처, 매입자, 거래 손님(일반 소비자, 중간 소매상, 약국), 결제 방법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리고 전국적으로도 희귀하게 남아 있는 약국문서이다. 또한 전라감영에서 간행한 동의보감 전질본 역시 조선후기의 약국과 직접 관련이 있는 귀중한 의학 문헌이다. 이처럼 강진 박약국 문적은 의학사와 향촌생활사, 경제사(회계문화), 문화사 등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가치가 있다. 강진 병영 박약국 문적 무약기(임진, 1892년) 기재 내용 “박약국” 명칭 기록 주문서(무술) 을미 사월 공주령 무약기 (공주 약령시 약재 매입록) <각인처전곡거래일기> 1896년 8월 23일 기록. 양사집[장흥 부평 거주]이 돈 140.75냥을 박약국에 유치해 두었는데 94.8냥을 조익환 편에, 20냥을 당숙 편에 상환하여 갔다는 기록이다. 당시에 ‘환’을 거래한 내용을 알 수 있다.(김덕진 논문 인용)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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