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나으리 덕택이라고 게시기간 : 2020-02-13 07:00부터 2030-12-24 21:00까지 등록일 : 2020-02-1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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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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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신현(申絢)이 지방 수령인 형 신진(申縉)에게 보낸 간찰 ‘간찰 중에는 당시의 생활에 대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1818년 서울에 있는 고관 벼슬을 하고 있는 동생 신현이 경상도 신녕(新寧) 현감으로 나가 있는 큰형에게 보낸 이 간찰은 당시의 정치, 사회, 제도, 문화 등 많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편지이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의 손녀사위인 신대우(申大羽, 1735~1809)는 네 살 터울인 신진(申縉, 1756~1835), 신작(申綽, 1760~1828), 신현(申絢, 1764~1827) 세 아들을 두었다. 소론 명가인 평산신씨 신대우 가문은 양명학을 전하는 강화학파의 명문으로 신대우와 신작은 당시에 이미 문장과 글씨에서 명망이 있었다. 이 편지는 막내인 신현이 큰형인 신진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신현은 승지 벼슬에서 벗어나 호군(護軍)의 산직(散職) 벼슬을 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림1 신대우의 문집 [완구유집(宛丘遺集)]. 세 아들 진(縉), 작(綽), 현(絢)이 나란히 편집, 교열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신작이 예서로 필사한 것을 그대로 판각한 당대 최고의 목판본 문집으로 평가된다. 신현은 편지에 여러 이야기를 하고도 할 말이 아직도 많이 남아서 별지(別紙)에 이어서 썼다. 보통 별지는 협지(夾紙), 태지(胎紙)라고도 하는데, 대개의 편지에서는 예의와 격식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본지(本紙)에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내용만 있고 실제의 용건은 태지에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 편지에는 본지와 태지가 있지만, 여기에서 태지를 쓴 것은 비밀스러운 용건이나 감추어야 할 내용이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고 형에게 전해야 할 말들이 많아서 두루 말하다 보니 말이 길어져서 별지에 이어서 쓴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그림2 피봉과 본지, 협지가 모두 갖춰진 사대부가의 전형적 간찰이다. [新寧大衙入納 義寓上平書 戊臘十一曉] 上納吏上來後 更無去來之/人 稍阻悵慕 冬煖似春 南/土風氣 想亦同此 伏未審/ 氣候若何 今年捧糴 亦於/至月內了畢 更無催科之/關心者否 舍弟爲趂參/候班 數日前入城 擬於經歲/後還歸 而衿山緬禮 以明年/四月得日 而破舊墳 必於今年/爲之爲吉云 故再昨已送士益告/由 先破西方而歸矣 日前有政/ 仲兄主新通於東壁 副擬/堂下淸宦 更無加於此者 事//甚喜幸 頃日次對 大臣以銓堂泮長/之分而兩岐 到今不便 還爲如前//通融以用之意 仰倩/蒙允 如弟者 旣已/謝却於//銓地 而又將擬議 還是可/悶事耳 又有他紙 姑不備 戊寅(1818, 순조18)臘月十一曉 舍弟 絢 上書 [신녕 대아 입납/ 어의동 집에서 올리는 안부 편지/ 무인년 12월 11일 새벽] 상납리(上納吏)가 올라온 후에는 다시 왕래하는 사람이 없어 소식이 좀 뜸하여 쓸쓸하고 그립습니다. 겨울이 봄처럼 따뜻합니다. 남쪽 땅의 바람 기운도 역시 이곳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건강은 어떠십니까? 금년에 환곡을 받는 것도 11월내에 마쳐서 다시는 세금 받는데 신경 쓸 일이 없겠지요? 저는 조회(朝會) 반열에 참여하기 위하여 며칠 전에 서울에 들어와서 새해를 보낸 후에 돌아가려고 합니다. 금산(衿山)의 묘 이장하는면례(緬禮)는 내년 4월로 날짜를 잡았는데 옛 묘는 금년에 파묘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여 그저께 사익(士益)을 보내어 고유를 하고 먼저 서쪽 편을 파묘한 뒤에 돌아왔습니다. 일전의 인사에서 중형님이 새로 동벽(東壁, 홍문관 응교)에 신통(新通)이 되어 당하의 청직 벼슬에 부망(副望)으로 의망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어서 일이 매우 기쁘고 다행입니다. 전날 차대(次對)에서 대신들이 전당(銓堂, 이조의 당상관)과 반장(泮長, 대사성)은 두 길로 나뉘어져 가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 제도가 좋지 않으니 도로 전처럼 섞어서 기용하자는 뜻으로 앙청하여 윤허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이미 인사를 맡은 이조 당상관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또 장차 의망하려는 논의가 있으니 이것이 도리어 민망합니다. 또 다른 별지가 있으니 이만 줄입니다. 무인년(1818, 순조18) 납월(12월) 11일 새벽 사제(舍弟) 현 상서 그림3 간찰 본지 今番/晬辰 又不得陪過 伊日/仲季 於茶禮後 對酌/一醉 悵慕以過矣 濩之/眼病及足疾 近幸得安/ 而公都會入見 終是重難/ 臨時停止 况三式未滿 而/主試之意 亦未可信也 渠/以明年會圍之坐停爲大/悵 有欲觀庠製之意/ 昨日追來在京 而此亦不/易得也 泮試互相推諉/ 無人擔當者 安知今年/又不歸於闕試耶 此時/仲兄主獨處亦難待 至/念間 自當先爲下送耳/ 軍布御營及都監/所納 皆通報于大將 旣/不遲滯 又不生頉 他邑則/多退送生頉之處 而此吏/獨能無事 以偏荷上德/ 頗稱謝 可笑耳 이번 생일날에도 또 모시고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둘째와 막내인 제가 차례를 한 후에 대작하며 한바탕 취하여 그리워하면서 지냈습니다. 명호(신현의 아들)의 눈병과 족질은 요즘 다행히도 편안해졌습니다. 공도회를 들어가 보는 것이 끝내 어려워서 일단 그만두었습니다. 하물며 세 식년(式年)이 차지 않았는데 시험을 주관한다는 뜻도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놈은 내년의 회시(會試)가 정지되어서 크게 섭섭해 하면서 상제(庠製) 시험을 보려는 의사가 있어서 어제 뒤따라와서 서울에 있습니다만, 이도 역시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시(泮試)는 서로 미루어서 담당할 사람이 없으니 금년에도 또 시험을 거르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요즈음 중형님께서 혼자 계시는 것도 역시 대접하기 어려울 것 같아 20일 경에 먼저 내려 보낼 것입니다. 군포는 어영청 및 훈련도감에 납부하는 것을 모두 대장들에게 통보하여 지체되지도 않고 또 탈도 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읍에서는 많이 점퇴되기도 하고 탈이 난 곳이 있는데, 이 향리만 혼자 무사했다면서, 오로지 나으리 덕을 보았다고 자못 칭찬하고 사례를 하니 우습습니다. 그림4 간찰 별지 먼저 피봉에 [신녕 대아 입납/ 어의동 집에서 올리는 안부 편지/ 무인년 12월 11일 새벽]이라고 되어 있다. 신녕은 신녕현(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일대), 대아는 ‘지방관으로 있는 아버지나 형에게 아들이나 아우가 큰 관아라는 뜻으로 지방 이름 아래에 붙여 겉봉에 쓰던 말’이라고 사전에 정리되어 있으나 반드시 아버지나 형의 관아만 대아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의동 집에서 올리는 안부 편지[義寓上平書]’라는 말은 신현이 당시 서울에 올라와서 머물고 있던 서울집 어의동(於義洞)으로, 신씨 일가는 1811년에 어의동 기대(企臺)로 이사하였다. 기대는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이 살았던 곳이라서 기재, 기대, 후대 사람들은 신대(申臺)라고도 하였다. 그곳은 낙산 언저리 어의동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는 조금 높은 언덕이 있는 풍치가 좋은 곳이었다. 이곳은 봄가을 경치가 매우 좋아서 서울 동쪽 낙산 언저리에 살고 있던 노인들이 극원(屐園) 이만수(李晩秀)를 맹주로 하여 홍천시사(紅泉詩社)를 만들어 몇 년 동안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홍천시사에는 이만수와 권식(權烒) 등 소론 중심의 인사들로 구성되었고 신진 3형제도 모두 참여하였다. 평서(平書)는 평신(平信)이라고도 쓰는데, 평안하다는 안부 편지이고 상평서는 안부 편지를 올린다는 뜻이 되겠다. 첫머리에 나오는 상납리(上納吏)는 신녕현의 아전 중에 공물이나 군포 등 각 고을의 상납 납부의 책임을 맡아서 온 아전으로, 이 부분은 편지를 보내게 되는 전후 상황과 시후(時候) 인사이다. 신녕현의 상납물을 맡아서 납부하는 아전이 서울에 오는 편에 형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있었고, 이후에는 현의 일들이 대강은 끝나 좀 편하지 않느냐는 안부 인사이다. 지방에서 환곡 받는 일은 11월이면 끝나는 것 같다. 후반(候班)은 정초에 임금을 알현하는 조회 반열로 신현은 승지의 바쁜 직책에서 잠시 벗어나 호군이라는 산직에 있었기 때문에 좀 한가할 때이다. 산직도 정초의 조회에는 참여하는 것 같다. 이번 생일날이 누구의 생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차례를 지낸 후에 바로 윗 형인 신작과 큰 형 신진을 그리워하며 크게 취하였다고 하였다. 집안일로는 금산(衿山)의 묘 이장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금산의 묘를 이장하는 면례(緬禮)는 신작의 첫 부인 반남박씨를 금산에서 사촌에 이장하는 것을 말한다.([石泉遺稿]卷2 雜著 亡室朴氏墓誥) 돌아오는 새해 4월에 이장 날짜를 잡았는데 옛 묘는 금년에 파묘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여 사람을 보내어 고유를 하고 먼저 서쪽 편을 파묘하였다. 면례에 있어서 택일을 하고 파묘를 하고 고유를 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편지에서는 형인 신작과 자신의 벼슬 생활에 대한 근황도 전하고 있다. 신작이 동벽(東壁)에 신통(新通)이 된 것은 당하(堂下)로서 청환(淸宦)에 부의된 것으로 영예스러운 일이라는 것, 또 자신의 벼슬에 관련해서는 차대(次代)에서 대신들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이조의 당상관인 전당(銓堂)과 성균관 대사성인 반장(泮長)이 나뉘어 나가는데, 대신들이 차대(次對)에서 이를 전처럼 섞어서 기용하자고 건의해서 윤허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신현의 형인 신작은 서울에서 과거를 보느라 아버지가 성천에서 죽을 때 임종을 못한 불효가 되어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1808년 신현이 성천도호부사가 되자 75세 고령의 신대우는 호조참판 벼슬을 그만두고 아들의 임소인 성천에 취양(就養)을 갔다. 그곳 관아의 문이 우화문(羽化門)이었는데 신대우(申大羽)는 이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집에 돌아갈 수가 없겠구나 하고 예감을 하였다는 설화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온다. 서울에 경과(慶科)가 설행되자 신작은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 응시하러 갔다가 문과에 합격한 후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성천에 내려갔으나 아버지를 임종하지는 못하였다. 문과에 합격한 이후 그는 여러 청요직에 임명되지만, 그는 주로 광주 사촌에 있으면서 한번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정을 핑계 대고 사직서를 내고 재외(在外)라고 하면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는데도 신작은 청요직으로 당상관에까지 올라간다. 또 신작은 형제들이 다 참여하고 있는 홍천시사(紅泉詩社)에도 그는 시만 보내고 잘 참석하지 않았다. 좀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 형제의 우애는 매우 좋아서 형제간에 한 집에서 잘 지내고 신진이 아들이 없자 신작이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잇게 하였다. 아버지의 [완구유집]을 편찬 간행할 때에도 세 형제가 최선을 다하여 신작이 직접 쓴 고졸한 예서체로 신진이 현감으로 있는 신녕에서 간행하려 하였으니 각수의 솜씨가 불량하여 서울로 올라와서 광주 사촌 집에서 당시 조선 최고의 각수를 고용하여 몇 달 만에 간행하였다. 세 형제가 매우 우애가 깊다는 것은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나 아버지의 문집 [완구유고]를 세 아들 진, 작, 현 나란히 편찬 교열하였다는 표기에서도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 또 신현은 아들 명호가 과거에 응시하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전해주고 있는데, 사실 조선후기의 과거제도는 오늘날의 대학입시 제도만큼이나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공도회(公都會)란 매년 1회씩 각도에서 유생들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초시와 복시를 치르고 도별로 정해진 인원을 선발하여 생원·진사시 초시 합격 자격을 주어 회시에 직부하게 하는 시험이다. 삼식(三式)은 세 식년인지 3년인 식년인지 모르겠지만, 식년은 자(子), 오(午), 묘(卯), 유년(酉年)이고 세 식년은 세 차례의 식년이므로 6년 이상 호적에 올라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외방 별과를 볼 때 세 식년 이상 외방의 호적에 이름을 올린 사람에게만 응시를 허용하였다. 회위는 회시를 말하는데, 초시도 아직 합격 않았는데 왜 회시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상제(庠製)는 서울 사학(四學)의 합제(合製)를 말한다. 사학에서 매년 4번씩 시험을 실시하여 40명씩 총 160명을 뽑고 연말에 대사성이 다시 시험하여 우등자에게 생원·진사시 회시에 직부하는 자격을 준다. 반시(泮試)는 승보시(陞補試)라고도 하는데, 성균관의 우두머리인 대사성이 매년 10차례씩 사학 생도를 시험하고 성적을 합산하여 우등자에게 생원·진사시의 초시 합격 자격을 준다. 반시는 성균관 시험 즉 성균관에서 보는 제술 시험이 되겠다. 공도회, 삼식, 상제, 반시 등의 용어 자체를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 도대체 신현의 아들 명호는 어느 단계에서 어떤 시험을 보려고 한 것인지, 과거 연구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도 속시원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아버지들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과에도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음직으로 54세의 나이에 선공감 가감역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광흥창의 봉사, 직장, 주부를 거쳐 58세에 적성현감이 되었으나 6개월 만에 파직되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광주(廣州) 사촌(社村)의 시골집과 서울 낙산 밑 기대의 서울집을 오가며 학자로서 명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서는 그를 ‘패위(佩韋) 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명호(1790~?)가 남긴 [추유편(秋遊篇)]이라는 시회(詩會) 기록은 낙산 밑 기대와 혜화문 밖 정릉 재간정(再澗貞) 등에서 가을 단풍을 구경하면서 쓴 시문을 정리한 시집으로 홍천시사와 같은 취지의 소론 중심의 시회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편지의 말미에서 신현은 은근히 신녕 향리의 말을 빌어서 자신의 공치사를 하고 있다. 다른 군현의 군포 상납은 점퇴된 것도 있고 탈이 난 것이 많았는데, 신녕현의 군포 상납이 쉽게 되었다는 것이다. 승지 벼슬을 하고 있던 그가 형님이 수령을 하고 있는 신녕현의 군포 납부의 편의를 봐달라는 말을 어영대장, 훈련대장에게 건넸던 모양이다. 군포 납부가 그냥 품질, 규격이 맞아서 곧장 납부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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