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 “손죽도(損竹島) 해전(海戰)”의 젊은 영웅, 이대원(李大源) 게시기간 : 2020-02-15 07:00부터 2030-12-24 21:00까지 등록일 : 2020-02-12 15:5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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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지만…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은 서남 해안과 해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우리나라 최대 면적의 국립공원이다. 1981년에 14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다도해’란 말 그대로 푸른 숲, 기암괴석으로 수려한 풍광을 자아내는 수많은 섬들이 바다와 어울려 그려내는 아름다운 자연이다.
【그림1】 이대원 초상,
하지만 이곳은 “오도(五島)1)에서 동남풍을 타고 삼도(三島)2)에 이르러 유숙(留宿)한 뒤 선산도(仙山島)를 지나 곧바로 고금도(古今島)와 가리포(加里浦) 등처에 도달되는 길”3)이라거나 “삼도(三島)를 거쳐 호우(湖右)로 직행하면 하룻밤이 못되어 본경(本境, 전라우수영을 뜻함)을 침범할 수 있을 것”4)이라고 하듯이 일본 고토 열도의 왜구들이 전라도를 노략질하러 들어오는 주요 해로였다. 이 때문에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 뽐내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게 이곳은 한때 핏빛 싸움터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왜적을 격파한 전적지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중 여수 앞바다의 손죽도(損竹島)5)에는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왜적에 맞서 당당하게 싸우다 끝내 순절한 젊은 해양영웅 이대원(李大源, 1566∼1587)의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손죽도 해전과 이대원의 안타까운 죽음 1587년(선조 20년) 1월,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 지금으로부터 433년 전 이맘때 겨울이었다. 왜선 수 척이 떼 지어 고흥 녹도 근처를 침범하여 왔다.6) 사정이 급하게 되자, 녹도보장(鹿島堡將) 이대원은 주장(主將)인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에게 보고도 올리지 못한 채, 왜구들을 추격하였다. 다행히 적들을 쳐서 수급을 베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를 본 수사 심암은 이대원이 세운 전공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이대원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심암은 이대원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18척에 이르는 대규모의 왜적선(倭賊船)이 손죽도에 침입해 왔다.7) 하지만 이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 졌고 군사도 적어 도저히 적과 싸울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 심암은 이대원에게 나가서 왜구와 싸우도록 다그쳤다. 이대원은 “지금 해도 저물었고 또 군사들도 적어 덮어놓고 출전하는 것은 무모할 따름이니, 군사를 더 많이 모으고 선단을 크게 지어 내일 아침 날이 밝은 다음에 효과 있게 치고 나가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라고 진언하였다. 하지만 심암은 오히려 협박하면서 즉각 출전을 명하였다. 이대원은 “그러면 사또께서 곧 뒤미처 응원군을 거느리고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지친 군사 1백여 명을 이끌고 출전했다. 다른 진(鎭)의 배들은 왜적의 철환(鐵丸)을 두려워하여 모두 도망갔다. 이대원만이 외로이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심암이 이대원을 척후(斥候), 즉 선봉으로 나가게 하고는 뒤이어 응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대원은 사흘 동안이나 왜적들과 혈전을 벌였지만, 끝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이길 수 없었다. 이에 칼을 들어 자기 손가락을 잘랐다. 그리고 속저고리를 벗어서 거기다 손가락의 피로 절명시(絶命詩)를 써서 집안 하인에게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장례하라.”고 했다. 그리고 끝까지 싸웠지만, 패하여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적들은 항복하라고 위협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배의 돛대에 묶어 놓고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왜적을 꾸짖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그가 지은 “전라 좌수사 이공(李公) 신도비명”8)에서 이대원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석해 하였다. “공이 마침내 한 작은 보루(堡壘)의 장수로서 위용(威勇)을 세워 적을 세차게 공격하고 큰 공을 세우고도 주장(主將)의 비위에 거슬렸으니, 주장은 공의 재능을 시기하였고 적은 자신들을 괴롭힌 자를 없애려 하였다. 그리하여 묘년(妙年)의 영재(英才)로 하여금 장도(長途)에 오르는 초기에 갑자기 죽게 하였다. 그리하여 미처 임진년의 큰 적을 막아서 중흥의 위대한 공을 돕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하늘이 공을 탄생시킨 본의이겠는가. 아, 애석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대원의 절명시도 전해주고 있다. 해 저무는 군문에 바다를 건너오니 / 日暮轅門渡海來 군사는 적고 형세는 끊겨 이 인생 가련하네 / 兵孤勢乏此生哀 군주와 어버이께 은혜와 의리 모두 보답하지 못하니 / 君親恩義俱無報 원한이 시름겨운 구름 속에 맺혀 풀리지 않으리라 / 恨入愁雲結不開 이대원의 가족들은 절명시 28자가 새겨진 저고리를 고향 뒷산인 대덕산(大德山) 밑에 묻고 장례를 지냈다. 그를 시기하여 무리하게 출전을 시켜 죽음에 이르도록 한 심암은 이대원이 순국한지 44일 만에 한양 당고개(堂古介)에서 처형되었다. 이대원은 고흥 녹도 해전에서의 승리로 심암을 대신하여 전라수사에 특배되었으나 유지(諭旨)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고 한다.9) 여러 기록들에서 이대원을 ‘수사(水使)’로 칭하고 있어 이를 사실로 확인해 주고 있다. 이대원에 대한 국가의 기억은 각별하였다. 선조와 조선정부에서는 이대원을 각별히 기억하였다. 먼저 선조는 이대원의 가족 상황을 살피도록 지시하였다. 즉 “이대원의 부모가 있는가? 만일 있다면 나이가 얼마인가? 장성한 자식이 몇이고 큰 아들의 나이는 얼마인가? 살펴서 아뢰라.” 하였다.10) 선조는 이대원이 국사로 죽었기에 그의 절의(節義)를 장려하려고 그의 부모가 있는지와 아들의 나이는 많은가를 물었던 것이었다. 승정원(承政院)이 그의 편모가 수원부에 살고 있으며 자녀의 나이는 몇 살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선조는 “국가가 일반 노인에게도 매달 주육(酒肉)을 보내는데, 그 자식이 국사로 죽었으니 내 마땅히 그 어미를 봉양할 터이다. 해사(該司)를 시켜 매달 주육을 보내주고, 여생을 마칠 때까지 봄·가을에는 쌀과 콩을 보내 주도록 하라. 대원의 집에 쌀 20석을 내려주라.”
고 전교하였다.11) 이대원은 “용감하게 앞장서 배에 올라갔었고 나랏일에 죽었으니, 특별한 은혜가 없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다만 증작(贈爵)하는 문제는 “가령 사절(死節)했더라도 증작하는 일은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아서 함부로 시행할 수 없다.”고 하여 미루어졌다.12)
【그림2】 고흥 쌍충사(雙忠祠) 충렬공(忠烈公) 이대원과
그 후 1599년(선조 32)의 기사에 따르면, “녹도만호 이대원은 손죽도에서 전사하였는데 조정에서 포상(褒賞)과 벼슬을 더해 주었으며 감사 윤두수가 본진(本鎭, 녹도진으로 추정) 수군(水軍)들의 소원에 따라 사당을 세워 그가 죽은 날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13)라고 되어 있다. 이 사당이 녹동항 언덕 위에 있는 쌍충사(雙忠祠)의 연원으로 보인다. 이순신도 부산대전에서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鄭運, 1543~1592)을 이대원 사실(祠室)에 추배할 것을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에게도 자신이 아꼈던 부하의 추배를 거론할 만큼 이대원은 기억할 만한 인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14) 또 1615년(광해 7)에는 전교하기를, "김천일(金千鎰) 등을 충신의 대열에 수록한다면 이대원(李大元)·이순신(李舜臣)·원균(元均)·이억기(李億祺)·최호(崔湖)·이복남(李福男)·임현(任鉉) 등처럼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도 어찌 수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자세히 의논해 결정하여 아뢰라."15)하여, 이대원을 이순신과 같은 반열의 충신으로 대우하였다. 1668년(현종 9)에는 이대원이 살았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만력 정해년(1587)에 왜적이 전라도를 노략질하였다. 이때에 대원이 녹도 만호(鹿島萬戶)였는데, 고단한 군대를 이끌고 힘을 다해 싸우다가 지원군이 없어서 패하여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복양이 그 자손의 하소연으로 인하여 정표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병조참판에 추증하고 문려(門閭)에 정표하라고 명한 것이다.”16)
한편, 고흥 연해안 사람들은 심암의 태도에 분개하고 이대원의 죽음을 애도하여 가련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송강 정철의 큰아들 정기명(鄭起溟)도 「녹도가(鹿島歌)」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호남이 재조(再造)의 근본이 되다. “지금의 왜변(倭變)은 우연히 변경을 침범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전선(戰船)을 넉넉히 준비하여 대거 침입했습니다.”라 하듯이 손죽도 왜변17)은 왜적이 우연히 침범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대응력을 염탐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침입해 왔던 것이다. 이때의 왜적은 일본 고토[五島] 열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왜구들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손죽도에서 승리하고 또 선산도(仙山島)에서도 약탈하였다. 그 날카로운 기세를 타고 바로 변경의 성을 침범할 듯하였는데, 오히려 바깥 바다에 계속 체류하고 여러 섬에 나누어 정박하면서 오래도록 쳐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모습에서 이들이 5년 후를 대비한 정탐 부대였음 짐작케 한다. 즉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정예병을 내어서 조선의 전쟁 능력을 시험하였던 전초전 성격의 전투였던 것이다. 이대원 장군 사후(死後)에 한동안 손죽도는 “이대원 장군을 잃은 섬”이란 뜻으로 한자를 바꿔서 손대섬[損大島]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대원의 죽음은 호남 사람들에게 강한 교훈을 남겼다. 이를 남구만은 “임진왜란에 호남 지방이 유독 완전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키는 근본[再造之根本]이 되었으니, 이는 공이 먼저 왜적에게 몸을 맡겨서 사람들의 마음을 장려하고 분발시킨 효험이 아니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18)고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부대로 왜란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던 전라좌수군의 전력은 이대원의 장렬한 죽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대원의 장렬한 죽음, 또 이에 대한 국가의 기억은 임진왜란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대원의 흔적들 그의 출생지 인근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 일대에는 이대원 장군묘 및 신도비, 그의 동상과 사당 확충사(䨥忠祠) 등이 있다. 만호를 지낸 녹도 즉 고흥에는 충렬공(忠烈公) 이대원과 충장공(忠壯公) 정운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인 쌍충사가 있고, 그가 싸우다 전사한 손죽도에도 이대원 사당인 충렬사와 유적비 및 묘가 있다. 여수 돌산에는 이순신 장군을 신격(神格)으로 모신 유일한 당산(堂山)인 여수 국동 영당(影堂)이 있는데 이순신 장군을 주벽으로 녹도만호 이대원, 정운 장군의 영정을 같이 봉안하고 있다. 아름다운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그곳을 찾을 때, 자연의 풍광에 취하면서도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 흘려 싸웠던 젊은 해양영웅 이대원을 비롯한 수많은 선열의 숭고한 뜻도 함께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김덕진, 「이대원과 정운, 그리고 쌍충사」(『해양문화연구 2, 전남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2009); 「1587년 損竹島 倭變과 壬辰倭亂」(『동북아역사논총』 29, 동북아역사재단, 2010) 해양경찰교육원·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해양경찰 뿌리 찾기-조직·사건·인물』(2019)
1) 오도(五島)는 일본의 고토 열도[五島列島]를 뜻하며 일본 규슈 나가사키 현에 딸린 군도이다.
2) 삼도는 지금의 거문도이다. 예전에는 흥양현(고흥군의 옛 이름)에 속했지만, 지금은 여수시 소속이다. 3) 『선조실록』 121권, 선조 33년(1600) 1월 28일 계유 3번째 기사 4) 『선조실록』 193권, 선조 38년(1605) 11월 15일 을유 3번째 기사 5) 지금 손죽도는 ‘巽竹島’라고 쓴다.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에 있다. 6) 『선조수정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2월 1일 경신 1번째 기사 7)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2월 26일 을유 1번째 기사 8) 『藥泉集』 제17권 「全羅左水使 李公 神道碑銘」 9) 위 「神道碑銘」과 『紀年便攷』 권18, 李大源 條 10)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4월 4일 계해 1번째 기사 11)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4월 14일 계유 1번째 기사 12)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4월 4일 계해 5번째 기사 13) 『선조실록』 111권, 선조 32년(1588) 4월 25일 갑술 4번째 기사 14) 『李忠武公全書』 卷之二 狀啓一 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 15) 『광해군일기』[정초본] 97권, 광해 7년(1615) 11월 18일 경인 2번째 기사 16)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1668) 7월 14일 신해 3번째 기사, 『현종개수실록』 19권, 현종 9년(1668) 7월 14일 신해 3번째 기사 17) 손죽도 왜변은 지금 손죽도 해전이라고 부른다. 18) 『藥泉集』 제17권 「全羅左水使 李公 神道碑銘」 “壬辰之亂。湖南獨完。爲再造之根本。未必非公先以身委賊。激勸人心之效”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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