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유배객 정도전, 무열선사를 찾다 게시기간 : 2020-02-18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2-17 11:2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
||||||||
1375년(우왕 1) 5월 고려국은 공민왕 국상과 신왕 승계를 명나라에 주청하고도 중원에서 쫓겨난 북원의 우왕 책봉조서를 받들고자 하였다. 그간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뒷받침하였던 신진사대부가 저항하였는데, 특히 북원 사신을 영접하라는 명령을 받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완강하였다. “응당 저들의 목을 벨 것이요, 아니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겠다.” 곧장 유배. 이때 34살이었다. 유배지 회진(會津) 가는 길, 나주성 동루에 올랐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이기며 삼한 통일의 기틀을 세운 땅, 그때 여러 왕자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왕위에 오른 혜종의 외향(外鄕), 더구나 거란에 쫓긴 현종이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던 고을에 왔다니 감개무량하였다. 그런데 도처가 온통 왜구의 창궐로 헐벗고 시름하는데 바다 가까운 나주는 어찌 물산이 풍성하고 민생은 편안한가? ‘수령이 덕을 베풀고 민심을 모은 때문’이라 하고, 단언하였다. “고을 어른들이 백성들을 평소 의리를 알도록 가르쳤다!”1) 사또다운 사또, 사람다운 교육의 힘을 들춘 것이다. 유배객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하다. 그리고 거평부곡(居平部曲) 소재동(消災洞)―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로 들어갔고, 1377년 7월까지 2년 남짓 살았다. 소재동은 안온하고 넉넉하였다. 순박하고 근면한 농부들은 지체 낮은 부곡에 살면서도 다소 문자를 익혔고, 야담과 전설을 기억하며 또한 인근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술을 빚으면 같이 즐기고 제철 토산물이 생기면 서로 나누었다. 물론 귀양객도 빠뜨리지 않았다. 띳집 두 칸도 이들이 도와주니 금방이었다. 하여 ‘나의 귀양살이가 불쌍해서인가, 아니면 먼 시골이라 나의 죄를 몰라서인가?’ 하였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2) 이러한 맑고 밝은 인심을 만나며 정도전은 ‘마음이 묻고 하늘이 답함’이라는 논설에 천리 심성의 문제를 정리하고,3) 왜구가 장성 진원의 깊은 산중 가상사(佳祥寺)까지 쳐들어왔을 때 병든 노스님을 구완한 제자 스님 조명(祖明)과 제주를 가다가 왜구를 만나 죽음으로 항거하였던 호장(戶長) 정침(鄭沈)과 같은 어질고 의로운 행적을 듣고 기록하였다.4) 문과 동방으로 천안군수 지내고 담양 처가에 살던 문과 동방 강호문(康好文), 신돈의 전횡에 맞서다가 광주로 낙향한 탁광무(卓光茂) 등과 교유하였다.5) 한편 전라도원수와 그 막료 김의경(金義卿)과도 스스럼없었는데, 김의경이 개경으로 돌아가자 훗날을 기약하며 속내를 보였다.6) “재상은 인재를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긴다고 들었다[宰相以人事君].” 재상이 인사권을 행사한다는 ‘재상정치론’은 순자(荀子)의 ‘상등 신하는 인재를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김’ 및 주자의 문인 채침(蔡沈)의 ‘옛 대신은 인재를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겼음’과 같은 맥락이었다.7) 배움을 구한 후학도 기꺼이 인도하였다. 원 세조 쿠빌라이에게 인정받았던 몽골어 통역관으로 충선왕의 국구가 되었던 조인규(趙仁規)의 현손으로 ‘재상지종(宰相之宗)’ 가문인 조박(趙璞, 1356∼1408)이었다. 본관은 평양, 당시 여황(艅艎)―황룡강과 극락강 사이 광주시 광산구에 살았다.8) 조박이 과거 보러갈 때 격려하는 글이 의미심장하였다.9) “유학을 배운 보람을 세상에 밝게 드러내라. 그러면 나는 살아서 태평한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요, 죽더라도 밝은 시대의 귀신이 될 것이다.” 이러한 조박이 용진사(湧珍寺) 극복루(克復樓)의 기문을 가져왔다. 무열대사(無說大師)가 지었다. 왜구가 침범하였을 때 젊은 스님이 살려낸 그 노스님이었다. 정도전은 안연(顏淵)이 묻고 공자가 일깨운 ‘자기 욕심을 이겨내고 본연의 예로 돌아가야 어짊 克己復禮爲仁’으로 누각 이름을 붙였다니 반가웠다.10) 하여 “마음이 근심스러우면 좋은 산천과 아름다운 풍월에도 서글픈 느낌만 더하는 법, 그러나 욕심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마음이 활짝 열려서 보이는 것 만나는 곳마다 즐겁다. 극복루는 누추한 곳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즐거움을 변치 않았던 안자의 요체를 얻은 것이다.” 용진사는 황룡강을 두고 어등산과 마주보는 용진산에 있었다.11) 정도전은 무열을 만나볼 요량이었을까? 극복루에 올랐다.12) 일찍이 스님의 기문을 읽고, 극복루에 오르리라 생각했다오. 이끼 낀 오솔길을 더듬어가며, 깊숙한 동문에 들어왔네. 천 길 고목은 빼어나고, 깊은 계곡은 팔월 가을이로세. 번거로운 생각 씻은 듯하니, 여기서 오래오래 머물렀으면. 이때는 만나지 못하였다. 유배지의 정도전이 만나고 싶었던 무열은 누구일까? 1764년(영조 40) 완주군 송광사에서 간행한 『불조원류(佛祖源流)』가 스님은 용진사에서 입적하였고 거기에 탑이 있었음을 전하는데, 탑비를 찾을 길이 없고 비문 또한 볼 수 없다.13)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고, 수계(受戒)와 인가(印可) 때에 받던 법명과 법호는 어찌되고, 행로는 어떠하였을까? 우리는 다행스럽고 고맙게도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한국사DB》 《한국고전종합DB》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등을 들고날 수 있다. 먼저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무열은 스스로 지은 자호이고, 당호는 연서당(演西堂)이며 언젠가 국왕의 어필을 받들고 태고보우(太古普愚)에게 ‘찬(讚)’ 즉 찬양의 품평을 요구하였다. 그때 보우는 ‘유학하는 스님이 깊고 그윽한 풍취를 그리워하네[儒釋慕玄風]’란 구절이 있는 찬사를 건넸다.14) 무열은 공민왕과 우왕의 국사로 초빙된 최고 고승 태고보우(1301∼1382)와 관계가 있고, 국왕에게 글씨를 받을 만한 지위를 누렸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면 법호는 어찌될까? 1355년 늦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을 때 이색(李穡이 지었던 「수안사(壽安寺) 방장(方丈)에 연무열(演無說)과 섭백경(聶伯敬)이 앉아 있다」에서 법호가 ‘연(演)’임을 알 수 있다.15) 당시 이색(1328∼1396)은 사명―당시 원은 공민왕비 노국공주에게 ‘승의(承懿)’라는 호를 내렸다―을 마치고, 원의 한림원에서 반년 남짓 봉직하며 강소(江蘇)와 절강(浙江)을 방문하였다. 수안사(壽安寺)는 절강의 임해(臨海)에 있었는데, 그때 무열을 만났던 것이다. 다음은 그때 시의 앞부분이다. 수안사 방장(方丈)에는 털끝만치 티끌이 없어, 말에서 내려 당(堂)에 오르는 내 넋이 즐거워라. 단구(丹丘) 선생은 필법(筆法)이 신묘하고, 죽간(竹磵) 늙은 선사는 시어(詩語)가 새롭더라. 즉 글씨가 좋은 백경(伯敬)의 필명은 ‘단구’, 시를 잘 짓는 무열은 죽간을 시호(詩號) 삼았던 것이다. 당시 28살의 이색에게 무열은 ‘늙은 선사’였다. 부친 연배거나 십여 년 연상이었으리라. 이듬해 귀국한 이색은 몇 년 후 무열을 ‘장로(長老)’로 호칭하며 그리움을 풀었다.16) 무열 산인은 문장 좋은 한림스님, 먼 바다 끝에서 만나고 너무 세월이 깊어갔구려. 매화 떨어지려는데 봄추위가 극심하니, 응당 남쪽 창을 보고 온종일 읊으리라. 이렇듯 이색은 무열을 ‘장로’ ‘문장 뛰어난 스님 釋翰林’으로 존중하였다. 실제 무열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한참 유명하였던 『죽간집(竹磵集)』을 간행하였다. “『죽간집』 한 책은 나옹(懶翁)의 제자인 승려 굉연(宏演)이 구양현(歐陽玄)ㆍ위소(危素)를 종유하여 두 학사가 서문을 썼는데, 시가 매우 웅건하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있는데, 이로서 보면 무열의 법호는 굉연(宏演)이었다.17) 구양현(1273∼1357)과 위소(1303∼1372)는 『송사』ㆍ『요사(遼史)』ㆍ『금사(金史)』를 편찬한 역사가이며 문장이 빼어난 고위 학사관료였다. 이들에게 서문을 받았으니, 『죽간집』은 구양현이 살아있던 1356년 이전, 중국에 있을 때 엮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현이 적은 대로 굉연은 나옹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은 1348년 연경에 도착하여 1358년 귀국할 때까지 10년 동안 강소ㆍ절강ㆍ산서ㆍ하북의 명찰 대덕을 순방하였으니 서로 만났을 수 있다.18) 그런데 나옹이 원 황실이 중건한 광제사(廣濟寺)의 주지를 맡았던 1355년, 광연은 ‘보은선사 사문’으로서 『장승법수(藏乘法數)』 서문의 두 번째 필자로 이름을 올렸다. 『장승법수』는 원의 가수(可遂) 스님이 방대한 대장경에서 주요 용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편찬한 일종의 ‘불경사전’이었는데, 첫 번째 서문은 구양현이 장식하였다. 또한 위소에게는 보광사를 중창한 원명충감(圓明冲鑑, 1275∼1339)의 행적을 알리며 ‘중창비’에 새길 명문(銘文)을 의뢰하였다. ‘소싯적 보광사에서 경전을 배운’ 인연이 있었는데, 이때 직함은 ‘도성의 선원보은선사 주지’였다.19) 보광사 중창비(重創碑)는 나옹이 귀국한 1358년 여름에 세워졌다. 그런데 ‘보은선사(報恩禪寺)’와 ‘도성선원보은선사(都城禪源報恩禪寺)’가 대몽항쟁을 이끌던 최이(崔怡)가 강화에 건립한 호국원찰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여 유명한 선원사(禪源寺)일까? 아무튼 굉연무열은 한때 명성과 위상은 높았다. 이렇듯 임천 보광사에서 불교에 입문한 무열은 중국에서 원의 한림학사와 교유하고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장승법수』 출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귀국해서는 어필을 받고 태고보우에게 ‘유승(儒僧)’으로 인정받았다. 이제 광연무열을 만나러 장성 백양사로 가야 한다. 1) 『三峯集』 권3, 「나주의 동루에 올라서 부로들에게 효유하는 글 登羅州東樓 諭父老書」(1375)
2) 권4, 소재동기(消災洞記) 3) 권6, 「心問」ㆍ「天答」 4) 권3, 조명상인에게 주는 시의 서[贈祖明上人詩序] 및 권4, 정침전(鄭沈傳) 5) 권1, 「호연 이집의 시운을 써서 동년 자야 강호문에게 보이다[用李浩然集詩韻 示同年康子野好文」 및 「자야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호연의 운을 써서 보이다[聽子野琴 用浩然韻示之] 및 권2, 「취봉사 누각에서 한 수를 지어 탁선생에게 올리다 鷲峯寺樓上賦得一絶奉寄卓先生」 및 권4, 「경렴정 명에 쓰다景濂亭銘後說」 6) 권3, 「하상국 춘정시의 서문 河相國春亭詩序」 및 「전교 김부령에게 주는 시의 서문 贈典校金副令詩序」. 7) 『순자집해』 6, 「大略」 “下臣事君以貨 中臣事君以身 上臣事君以人”; 『서경집전』 권9 「周官」 “古者大臣以人事君.” 일찍이 공자는 ‘대신은 도로서 임금을 섬긴다 大臣以道事君’고 하였다. 8)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여황의 토성(土姓)으로 조씨가 있다. 평양 조씨 일파가 여황에 자리 잡은 것은 조박의 증조(趙延壽)와 부친(趙思謙)의 귀양살이 귀향형(歸鄕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시 ‘본관(本貫)’으로 돌려보내는 귀양살이는 본관이 있던 주군(州郡)의 속현(屬縣)이나 향ㆍ부곡으로 내쫓는 것이었는데, 처ㆍ외향도 해당되었다. 고려왕을 넘보았던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다가 충숙왕에게 가산을 몰수당하고 섬에 유배되었던 조현수의 처향이 광주였다. 9) 권3, 「조생의 과거 길을 전송하는 서문 送趙生赴擧序」. 1382년 문과에 급제한 조박은 개국ㆍ정사 1등공신이 되었다. 정도전과 함께 하다가 그의 몰락에 가담한 것이다. 과전법을 주창한 조준(趙浚)의 칠촌 당질이며 ‘왕자의 난’ 즉 무인정사(戊寅定社)을 단행한 이방원(李芳遠)의 손윗동서였다. 10) 권3, 「무열산인의 극복루기 뒤에 적다 無說山人克復樓記後說」 11) 용진사는 지금 없는데, 노사 기정진의 문인인 근대 유학자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의 강학 공간인 용진정사(湧珍精舍)가 들어섰다. 12) 권2, 「용진사 극복루에 오르다 登湧珍寺克復樓」 “曾讀山人記 思登克復樓 試尋苔徑細 來入洞門幽 古木千章秀 深溪八月秋 灑然滌煩慮 聊可此淹留” 13) 사암채영(獅巖采永), 『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 「高麗祖師」“無說禪師 常住湧珍之寺 碑在寺.” 14) 『太古和尙語錄』 하, ‘無說’ 세주 “演西堂以自號無說二字 敬奉御筆求讚” 《한국불교전서》 6. 『태고화상어록』 편찬자는 왜 굳이 ‘수계나 인가’ 때의 법명ㆍ법호가 아니라 ‘속명이나 다름없는 자호’를 적었을까? 무열이 비록 보우와 교유하였지만 직계 문인은 아니었음을 들추고 싶었을지 모른다. 15) 『목은시고』 제3권, 「壽安方丈 演無說 聶伯敬在坐」 “壽安方丈無纖塵 下馬登堂怡我神 丹丘先生筆法妙 竹磵老禪詩語新 茶瓜留客自離俗 圖畫照人殊逼眞 只恨斜陽出門去 宦途嶮巇迷路津.” 이계표 학형의 교시에 따르면, 스님의 호칭은 ‘태고보우(太古普愚)’ ‘나옹혜근(懶翁惠勤)’과 같이 법호ㆍ존호ㆍ시호를 앞에 쓰고 법명ㆍ자호를 뒤에 적는다. 16) 『牧隱詩藁』 권7, 「정월 하순에 남쪽이 편지를 받아보고 여러 벗을 생각하다 正月下澣 得南來書 因憶諸公」 ‘無說長老’ “無說山人釋翰林 相望海角歲年深 梅花欲落春寒甚 應向南窓盡日吟” 17) 成俔, 『慵齋叢話』 권8, “竹磵集一帙懶翁弟子僧宏寅 與歐陽玄危素遊 兩學士作序 而詩最健.” 광연과 쌍벽을 이룬 시인스님인 식영암(息影菴)과 함께 『동문선』에 십여 수가 실려있다. 18) 『牧隱文藁)』 권14, 「普濟尊者諡禪覺塔銘幷序」. 나옹은 각처의 고승을 순례하였는데, 중국에서 맨 먼저 친견하고 귀국 전야 마지막 참알한 고승은 1327년 고려에 들어와 금강산에서 설법하고 회암사를 창건하며 선풍을 일으키고 중국으로 돌아갔던 인도 출신으로 중국으로 귀화한 지공(指空, ?∼1363)이었다. 그때 지공에게 법의를 받았으며 귀국해서 회암사를 중창하였다. 19) 위소(危素), 「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剏碑」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