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원(元) 간섭기에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으로 송광사를 이끈 원감충지圓鑑沖止) 게시기간 : 2020-02-2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2-2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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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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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1226-1293)는 몽고족의 침입과 원(元)의 내정간섭으로 이어지는 격동기 고려후기 사회의 시대적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살다간 송광사 승려였다. 그는 몽고와의 전쟁기에 관리생활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원의 고려 내정 간섭기에 수선사(修禪社, 고려후기의 송광사) 제6세 사주(社主)로서 당시의 불교계를 이끌어 간 대표적 승려였다. 원감충지에 관한 자료는 그가 남긴 시·소·표·문(詩·疏·表·文)으로 이루어진 『원감록(圓鑑錄)』과 그의 생애를 기록한 「조계산수선사 제6세증시원감국사비명(曹溪山 脩禪社 第六世 贈謚圓鑑國師碑銘)」이 있고, 『동문선(東文選)』에도 그의 시문이 많이 실려 있다. 원감충지의 삶은 항몽과 원간섭기라는 전란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피난과 빈궁에 고생하는 백성들의 아픔에 공감한 애민·우국 승려로 이해된다. 충지의 생애 원감국사 충지는 법휘(法諱)가 법환(法桓)인데, 뒤에 충지(沖止)로 고쳐 불렀으며, 자호(自號)는 복암노인(宓庵老人)이었다. 그의 속명(俗名)은 위원개(魏元凱)이고, 원감국사(圓鑑國師)는 그의 시호(謚號)이며 탑호는 보명(寶明)이다. 그는 고려 고종 13년(1226)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위소(魏紹)를 아버지로 하고,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정안현(定安縣)에서 태어났는데, 정안현은 장흥을 가리키는 고려시대의 지명으로 원감충지는 오늘날 전남 장흥군 출신이다. 장흥군 부산면 구룡리 자미 마을 뒷산 속칭 병풍바위(屛岩, 높이 數十丈)라고 불리는 깎아지른 단애(斷崖)에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의 진영이라고 하는 초상이 부조되어 있는데, 오랜 비바람에 씻겨 현재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고, 희미한 윤곽만을 알 수 있는 정도이다. 또한 장흥군은 현재 위씨(魏氏)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조선후기 호남실학(湖南實學)의 3人 가운데 한 사람인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를 배출시킨 곳이다.
1. 원감국사 충지 진영 충지는 9세에 비로소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총민하여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 가운데에 뛰어났고 경서자사(經·書·子·史)를 눈에 지나는 대로 외웠으며, 또한 문장을 잘 지었다고 한다. 고려 고종 29年(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같은 왕 31년(19세)에 예부시(禮部試)에 장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세상 사람들은 장흥에 있는 장원봉(壯元峰)을 일컬어 이것은 원개(元凱, 충지의 속명), 문개(文凱, 충지의 동생)의 장원에 의하여 얻어진 이름이라 하고, 그 오른쪽 봉우리는 거말봉(居末峰)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의 셋째 동생 신개(信凱)로 인해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 영가서기(永嘉書記)라는 벼슬을 하였으며, 그 뒤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국위를 선양하였다고 한다. 그후 금직옥당(禁直玉堂, 한림학사직(翰林學士職)인 듯함)에까지 올라갔는데 그의 문체가 원숙하고 통달하고 아름다워서 노소 관인들도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충지는 일반적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소양을 닦아 남다른 재능을 보이면서 10여 년간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의 지식인으로서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길 이외에는 달리 생활의 방도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 고종 32년(1245)으로부터 같은 왕 41년(1254)까지 관직생활을 하였는데, 유교적 재능을 인정받아 관직을 높여가면서 세속적인 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속세를 떠날 뜻이 있어 부모에게 머리 깎고 승려 되기를 간청하였으나 쉽게 승낙을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유학(儒學)에 상당한 지식을 가짐으로써 장원까지 한 충지에게 그의 부모의 바람은 일반 유학자들처럼 세속에서의 관리로서의 삶을 더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충지가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직접 체험한 참담한 고려의 현실상황이 속세를 벗어나 구도자적인 승려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지 않았나 여겨진다. 당시 고려의 현실은 몽고족의 침입으로 인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참담하던 시기였다. 특히 충지가 관직생활을 하였던 고려 고종 32년(1245)으로부터 같은 왕 41(1254)년간은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의 집정자인 최이(崔怡)와 그의 아들 항(沆)이 항몽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시기로서 몽고족의 말발굽소리가 끊어질 새가 없는 시기였다. 항몽정책을 표방한 최씨무인정권은 정권안보적 차원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기고, 육지에 남은 백성들은 몽고와의 전쟁을 치르는 한편, 강도정부(江都政府)를 유지하기 위한 과중한 조세 부담이라는 이중적 고통을 안고 있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개인의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없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직면하여 충지는 관직을 버리고 출가를 결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충지는 고종 41년(29세)에 선원사 주법(禪源社 主法) 원오국사(圓悟國師, 修禪社 第5世)에게 나아가서 평소에 품었던 바를 말하고 득도(得度)를 허락 받아 구족계를 받았다. 그런 얼마 뒤에 그는 석장(錫杖)을 남쪽으로 굴리어 불교 공부하는 자리에 두루 참석하였다. 그는 멈춘 곳마다 총림(叢林)의 중진이 되었다. 때로는 적막한 곳에 앉아 있으면 허수아비와 같았으며, 어떤 때는 무리 가운데 노닐면서 빼어났으며, 여러 곳에 자적(自適)하였다고 한다. 그는 원래부터 주지직을 맡은 것을 싫어하였는데, 스승 원오국사(圓悟國師)의 교유(敎諭)와 원종(元宗)의 왕명으로 비로소 신어산(神魚山) 감로사(甘露社)(경남 김해)의 주지로 부임(赴任)하게 되었다. 충지가 김해(金海) 감로사(甘露社)에 조석(住錫)하고 있던 때 어떤 선덕(禪德, 덕망있는 선승)의 요청에 시로 응수하였는데 봄날 계원중(桂苑中)에 꽃이 피더니 암향(暗香)은 소림풍에 부동(不動)이구나 오늘 아침 익은 과일 감로에 젖었고 끝없는 인천(人天)이 한 맛으로 맛보리 라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충지의 포부와 그가 도달한 경지를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계수나무 동산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가 열아홉 살 때에 예부시에 장원급제 하였던 것을 살핀바 있다. 충지는 이제 자신의 경지가 원숙해졌음을 익은 과실에 비유하였고, “끝없는 인천(人天)이 한 맛으로 맛보리”란 구절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대비(大悲)의 정신이 깃든 그의 본원(本願)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보배로운 싯귀(寶偈)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원근(遠近)에서 충지의 명예을 듣고 반드시 한번 친견(親見)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충지가 감로사(甘露社)에 주석(住錫)하면서 사찰의 범종과 법고가 일신(一新)되고 불사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충지에게 도를 묻는 숙덕(宿德)과 불법을 구하는 도반이 발꿈치를 이어 폭주함으로써 법석이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감로사의 주지가 된 3년만인 원종 10년(44세) 5월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이때부터 유명한 고승들에게 흔히 있게 되는 신이한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뒤 김해 감로사를 떠나서 원종 13년(47세) 3월에 정혜사(定慧社, 순천시 서면에 있음)로 이석(移錫)하였다. 이때 게송(偈頌)을 지어 스님에게 보였는데 다음과 같다. 계족봉(鷄足峰) 그 앞의 오랜 옛 도량(道場) 이제 오니 푸른 산 빛 유달리 빛나는 구나 맑은 시냇물 소리 바로 장광설(長廣舌)이거니 무엇하러 구태여 잔소리 설법하랴 충지는 정혜사(定慧社)에 들어와서 시냇물소리(자연의 본체)가 바로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이어서 늘 설법하고 있으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할 것이냐고 하고 있다. 깨닫고 보면 삼라만상이 진리 아닌 것이 없다는 뜻으로 조용히 참선에 몰입하려는 그의 심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충지가 정혜사(定慧社)에 머무를 당시 수선사 제5세인 원오국사(圓悟國師) 천영(天英)도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 충지가 그의 스승 원오국사 천영에게 바친 2편의 시를 살펴보면 그의 승려생활에 어떤 전기(轉機)가 닥쳐오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새끼를 먹이다가 마침내 나는 방법 가르치고 늙은이의 지극한 사랑 다시 말할 것도 없네. 은근히 계봉 아래 보내오니 몸이 가루된들 이 은혜 어찌 갚겠나. 누각은 첩첩 옛 사찰인데 계산의 모습은 천하제일이구나. 내가 자리 이어 받음은 진실로 분수 아니거니 당년의 국노풍을 더럽힐까 두렵네. 이 시(詩)에서 수선사 제5세 원오국사 천영과 긔 제자 충지 사이에 수선사의 법맥을 계승하는 일이 묵계(黙契)됨을 엿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이 시기는 충지의 승려생활에 전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로서의 생활이 어려움을 “계봉고(鷄峰苦)”란 시에서도 토로되고 있다. 몽고와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전국토가 황폐해짐에 따라 산사에도 자연스럽게 궁핍한 생활이 닥쳐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상황변화는 수선사(修禪社)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 최씨 무인정권의 몰락으로 외호(外護)가 없게 되어 더욱 가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사찰은 면세·면역의 특권 아래 많은 경제적 부를 축적했지만, 원의 간섭 하에서는 사원전(寺院田)이 동정군(東征軍, 고려·원 연합의 일본 정벌군)의 군자(軍資)로 몰수되어 절집에서의 승려들의 생활은 곤궁(困窮)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충지가 용감하게 붓을 들어 원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 황제에게 토지를 되돌려달라는 표문)를 올려 그 부당성을 주장하여 동정군(東征軍) 군자에 편입된 토지를 되찾게 되었다. 참선수행마저 할 수 없는 당시의 분위기를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충지의 형편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원(元)에서 충렬왕 원년(50세) 3월에 충지를 부르게 되자, 고려 정부의 독촉이 심한 나머지 마지못해 충지는 원나라의 수도에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원 세조는 친히 그를 맞아들여 빈주(賓主)의 예로 대접하고, 귀국할 때에 금란가사(金欄袈裟), 벽수장삼(碧繡長衫,) 백불 한쌍(白拂一雙)을 하사하였다. 충지가 귀국하게 되자, 충렬왕은 관기(官記) 염용(康用)으로 하여금 회위하여 절로 모셨다. 그 다음 해에(충렬왕 2년) 선종 최고위 승계인 대선사를 더하였다. 그 뒤 청주(淸州)의 현암난야(玄巖蘭若), 진각사(眞覺寺)를 돌아보고 수선사로 되돌아왔다. 충렬왕 12년 2월에 원오국사(圓悟國師) 천영(天英)이 입적하게 되자, 대중들이 수선사(修禪社) 사주(社主)로 천거하여 제6세 사주로서 개당(開堂) 설법하게 되었다. 수선사 제6세가 된 후 7년간의 생활은 법석(法席)과 강진 월남사(月南寺) 중건(重建) 등의 불사(佛事)를 주관하다가 충렬왕 18년 정월 10일 새벽에 문인(門人)에게 “살고 죽는 일은 인간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갈 것이니 너희들은 잘 살라(有生死는 人世之事라 吾當行矣리니 汝等은 好住하라)”하고 입적하였다. 속세 나이는 67세였고 승려나이(法臘)은 39세였다. 충렬왕이 충지의 입적 소식을 듣고 크게 애도하며 칙서(勅書)를 내려 문도들을 위로하고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액(塔額)을 내렸다. 그의 부도는 송광사 남암(南庵)의 옛 터 북쪽에 세워졌다. 그의 입멸 후 22년만인 충숙왕 원년(1314)에 그의 문인(門人) 정안(靜眼), 진적(眞寂), 신열(神悅) 등이 원감국사비(圓鑑國師碑)를 세웠다. 그러나 이 비석은 전란으로 파괴되었고, 지금부터 200년 전인 조선후기에 화주(化主) 시안(時安), 주지 찬연(住持 贊玄) 등이 그 자리에 중건하였다. 지금 송광사 감로암(甘露庵) 앞에 있는 비가 바로 그것이다.
수선사 제6세 원감국사 충지는 불교는 물론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할 정도의 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인물로서 유불일치적(儒佛一致的)인 사상적 특성이 있는 폭넓은 승려였다. 오늘날 그의 문집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 歌頌)』 1권이 남아 있어 그의 삶과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충지의 현실인식 우리는 원감국(사圓鑑國師 沖止)가 13세기 전란의 소용돌이와 원나라의 내정간섭기를 살다간 승려였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는 비록 속세를 떠나 출가한 승려의 몸이었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국토에서 일어난 역사적 상황 밖에서 초연한 존재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불교의 요체(要諦)가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자기를 발견하려는 노력과 중생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그들을 구제하려는 행동, 즉 동체대비(同體大悲)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충지가 살았던 시대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고려 후기의 참담한 민족의 현실 앞에서 충지는 어떠한 의식이나 입장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아갔을까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마땅히 주목되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남긴 시문(詩文) 가운데 사회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을 추려서 그의 현실인식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의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채찍 한번으로도 만월(蠻越)을 칠 수 있거늘 조그마한 도적(小寇) 사나와도 문제 될 것 없네 붉은 수염 금갑옷의 기상은 구름을 능가하고 그 밖에 문장도 무리를 뛰어났네. 지난 날 송만(松巒)에서 남은 한이 있는데 어느 날 저녁 등잔 아래에서 자세히 글을 논하리. 라 하였다. 충지가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는 입장에 있던 병마사(兵馬使) 김석(金碩)에게 보낸 시이지만, 삼별초를 “소구(小寇)”로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당시의 대세로 보아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의해 궤멸될 운명에 놓여있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에 충지는 대세에 순응하여 현실적으로 실익을 추구하려는 입장에서 삼별초를 “소구(小寇)”로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수선사를 후원했던 최씨 무인정권의 몰락으로 몽고와의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불교계에서는 사굴산문 중심의 수선사를 대신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 중심의 일연(一然) 계통의 불교가 불교계를 영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불교계 내부의 변동으로 인해 충지는 한층 더 당시의 암담한 현실을 고뇌하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충지는 이제 집권 권력층과의 밀착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충지가 충렬왕 6년(1280)에 일본정벌에 필요한 전함을 제작할 때 비참한 실상을 절실하게 표현한 시 「영남간고상(嶺南艱苦狀)」이 있다. 충렬왕 9년(1283) 원나라의 일본정벌이 일단 좌절된 이후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민의 아픔을 읊은 이 시는 그의 현실인식의 절박함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영남간고상(嶺南艱苦狀)」에 쓰인 다음 해인 충렬왕 7년(1281) 제2차 일본정벌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쟁물자의 준비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때이니 만큼 백성들의 부담은 비참할 정도로 무거웠던 것이다. 당시의 농민들은 농사철을 놓치고 모두 동원되어서 전함 제작을 위한 벌목에 동원되어 지쳐 버렸다. 농민들의 태반은 굶주림에 허덕여 죽을 지경에 이른 암담한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충지의 현실 인식에 대한 절박성은 당시의 다른 유명 승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중생제도(衆生濟度)에 서원(誓願)을 둔 승려라면 백성들이 겪는 현실의 질곡(桎酷)을 외면할 수 없을텐데 말이다. 충지가 기득권을 가진 권력지배층과 밀착되어 있었다면 현실고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후기 수선사를 이끌던 충지의 현실에 대한 절박한 인식은 원간섭기 수선사의 불교계 내에서의 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의 수선사는 일연(一然) 중심의 가지산문(迦智山門)에게로 영도적 지위를 넘겨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불교계내 상황변동은 충지로 하여금 중생들이 겪은 현실적 고통에 더욱 눈을 뜨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충지는 일연과 달리 기득권을 가진 집권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적인 눈으로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충지의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 우리는 지금까지 소략하게나마 원감국사 충지의 생애와 현실인식을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불교계 내부의 동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충지는 고려후기의 전란과 정치권력의 부침(浮沈) 속에서 일생을 살다간 대표적 승려였다. 수선사에 출가한 충지는 최씨 무인정권과의 관련 아래 시대적 아픔과 중생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갔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최씨 무인정권의 몰락으로 수선사의 외호(外護)가 무너져 버리고, 또한 불교계 내부의 위상에서도 역할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충지는 이러한 시기에 수선사를 이끄는 대표적 승려였다. 이때부터 충지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면서, 고뇌에 찬 백성들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기 시작하여 많은 시작품을 남겼다. 충지의 현실인식의 전환은 당시의 집권층과 소원해 짐으로써 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이를 구제하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에서 가능하였지 않았나 여겨진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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