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구름위진사’ 이야기 게시기간 : 2020-02-27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2-24 10:5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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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기(李頤期, 1678~1730)가 재종 최몽현(崔夢賢, 1695~1756)에게 보낸 간찰 <사료 조사> 젊었을 적 한참 사료 조사가 재미있을 시절이 있었다. 나이 드신 노인 부부 두 분이서 집을 지키고 있는 남원의 한 반가(班家)에서였다. 선대 자료 있으면 좀 보여 달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윗방으로 안내하시며 선대 어른들의 문집이며 족보 등을 보여주셨다. 이상형의 『천묵재집』, 이문재의 『석동집』 등 집안 어른들의 문집과 족보를 보여주셨다. 그러한 자료는 굳이 여기서 찾지 않아도 되는데… 돌아 나오면서 책장 위에 놓인 한 뭉치의 문서더미가 있었다. “저건 뭐지요?” 그랬더니 그 어른이 하시는 말씀이 “그건 별거 아녀.” 그래도 살펴보니 별거 아닌 게 아니었다. 그 집안의 분재기며 매매문기, 소지 등 고문서가 한 뭉치 있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 들어가 그 고문서를 다시 살펴보고 어른과 재미있게 집안 선대 어른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어른이 이야기 해준 것 중에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고 논문에도 인용한 것이 ‘구름위진사’ 이야기이다. 바로 그 ‘구름위진사’ 이이기가 재종인 삭령최씨 최몽현에게 보낸 편지이다. 남원의 양반이라 하면 흔히 ‘최로이안(崔盧李安) 진진방태(陳晉房太)’라고 한다. 삭령최씨, 풍천노씨, 전주이씨, 순흥안씨가 먼저 꼽히고, 다음 구반(舊班)으로는 나주진씨, 남원진씨, 남양방씨, 합천태씨를 말한다. 전주이씨와 삭령최씨는 연혼 관계를 맺으며 남원 사회를 지배해왔는데 그중 제일가는 양반인 삭령최씨가에 전해져 내려온 자료 속에 이이기가 보낸 편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림1 최몽현 소장본 책에 찍힌 소장인([삭령] [최몽현] [뇌여]) <‘구름위진사’ 전설> 새로 부임한 남원부사가 그의 아들을 지역의 명족인 둔덕이씨의 집안과 혼사시키려고 청혼을 하였다. 이이기는 남원부사의 문지(門地)가 낮다고 하여 자기 집안에는 서녀(庶女)가 없다고 거절하여 부사를 모욕하였다. 앙심을 품은 부사는 이인좌의 난리가 지나간 정국에서도 토호질을 멈추지 않던 ‘구름위진사’ 이이기가 마음대로 군병을 동원한다고 고발하여 군율에 처해버렸다. 효시된 후 어느 날 밤, 마을 사람이 둔덕의 북쪽에 있는 오수장(獒樹場)에서 돌아오는데, 이이기가 구름을 타고 장검을 빼들고 내려왔다. 어디에 가시느냐고 물으니, 남원부사의 목을 베러간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헤어졌는데, 다음 날 아침 남원부사가 간밤에 급사하였다.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이이기를 ‘구름위진사’라고 한다. 이 ‘구름위진사’ 전설은 그냥 전설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였다. 이 전설 속에서 조선후기 사족과 관권과의 관계나 지역 토호의 실상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편지는 바로 전설 속의 인물인 이이기가 외가쪽으로 재종(再從)인 최몽현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이기 49세, 최몽현 32세 한창 때의 나이이다. 이이기는 남원의 명가인 전주이씨 춘성정파(春城正派)로, 증조는 천묵재(天默齋) 이상형(李尙馨)이고 조부는 석동(石洞) 이문재(李文載)이다. 남원부사가 부임하면 반드시 문안을 하고 정사를 같이 의논하는 명문이다. 편지를 받은 최몽현은 증조부가 오주(鰲州) 최휘지(崔徽之), 할아버지는 최서옹(崔瑞翁), 아버지는 최여우(崔與友)이다. 할아버지 서옹이 후사 없이 일찍 죽어 여우를 양자로 들였고 여우도 후사 없이 일찍 죽어서 멀리 충청도에서 입양을 해왔다. 자(字)가 뇌여(賚與)이다. 이이기의 할아버지 이문재가 최휘지의 사위이므로 이이기와 최몽현은 외가쪽으로 재종간이 된다. 이이기는 현재 임실 땅이 된 남원부 북쪽 끝 섬진강 상류의 들을 끼고 있는 둔덕에 대대로 살고 있었고, 최몽현은 현재 구례 땅이 된 남원부 남쪽 끝 중방 구만리라고 하는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다. [賫汝 崔生員 侍人 謹上狀 (手決) 謹封] 卽惟初冬/ 閑況佳安 向慰不淺 再從兒子/所憂 一向危篤 此間焦悶 如何/如何 向託三稏 千萬專恃 終未承/回示 何其薄耶 更加搜問 以/濟此危急 如何如何 竹瀝方入/藥料中 而坐此無可得 亦不須多/望 只得二合 足可作一旬所服/之資 此便惠濟 如何如何 他處/可覓 而仄聞梁令有所求/ 旣瀝許多竹 則數合之惠/ 似非難事 故爲是並乞 恐有/害於謫客耳 萬萬心擾 他不宣/ 統希/崇亮 謹上狀 丙午十月初六日 再從 頤期 頓 病口所思 只是鶉首 而此無放/鷂者 貴處如有可圖之勢 多/少間惠濟如何 [최 생원 뢰여 시인에게 삼가 올리는 편지/ (수결) 삼가 봉함] 이른 겨울에 한거하시는 근황이 좋으신지? 향하여 위로됨이 적지 않네. 재종인 내 아이의 우환은 한결같이 위독하니 이즈음 초조하고 걱정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지난번에 부탁한 삼아 인삼은 천만 오로지 그곳만 믿고 있었는데 끝내 답장을 하지 않으니 어찌 그리 야박한가? 다시 여기저기 물어 구해서 이 위급함을 구제해주시면 어떻겠는가? 죽력을 막 약료에 넣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것을 얻을 수가 없네. 많이 바라지 않네. 단지 두 홉이면 한 열흘 복용할 것을 만들 수 있네. 이 사람 편에 보내 주시면 어떻겠는가?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지만, 들으니 양 영감이 구청하여서 이미 많은 죽력을 만들었다니 몇 홉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네. 그래서 이렇게 같이 구걸을 하네. 아마도 유배객에게는 해가 될 것 같아 만만 마음이 어지럽네. 다른 것은 이만 줄이네. 살펴주시게. 삼가 편지를 올리네. 병오년(1726, 영조2) 10월 초6일 재종 이기 돈 병든 입이 생각하는 것은 단지 메추리뿐이네. 이곳에는 새매를 날리는 사람이 없네. 귀하가 사시는 곳에서 도모할 수가 있는 형편이라면 다소간이라도 베풀어서 구제해주시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림2 이이기가 최몽현에게 보낸 간찰(20×34cm) 가로세로 20, 30여 센티 정도의 조그맣고 누런 한지에 쓴 간찰은 토호의 간찰이라기보다는 가난한 선비의 간찰이다. 피봉에 [뇌여 최 생원 시인 근상장]이라고 되어 있으니 자가 뇌여인 최 생원에게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뇌여는 최몽현의 자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먼 곳에서 지리산 자락 최씨가에 양자 들어온 재종간인 인척이다. 족보나 남원 사마안을 뒤져봐도 최몽현은 생원에 합격한 기록이 없다. 아마 상대방을 높여주려는 의미에서 ‘생원’이라고 부른 것 같다. ‘시인(侍人)’은 모시는 사람, 보통은 ‘집사(執事)’라고 쓴다. 피봉 아래에는 이이기의 수결이 되어 있고 근봉이라고 썼다. 내용은 모두 최몽현에게 이런저런 물품을 구청(求請)하는 편지이다. 자신의 아이가 위독하다면서 인삼, 죽력, 메추리 등을 요청하였다. 죽력은 대나무의 진액을 추출한 것으로 어린아이의 경기를 가라앉히고 막힌 것을 뚫어주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아이가 위독하여 급하기는 하겠지만, 문투의 형식이나 내용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없어 보인다. 아무리 없어도 선비는 서로 무언가의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구청을 하더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내는 것 없이 요구만 하고 있다. 이 간찰을 같이 읽은 연구자들의 의견은 한결같았다. 이 편지는 상대방에게 매우 결례를 하는 편지같다고. 조선후기의 토지대장인 둔덕방 경자양안을 분석해보면 이이기는 42부 6속, 아들인 이명필(李明弼) 이름으로는 7결 57부 7속의 전답을 소유하고 있다. 합하여 8결에 이르는 부농인 것이다. 8결 정도의 소유자면 자기 생활은 가능한 충분한 양반 부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기는 탐욕을 부려 군병을 동원하여 진전을 개간하고 재산을 늘리려고 무리를 하며 전횡을 하다가 사혐(私嫌)이 있는 남원부사의 간계에 걸려 효시를 당한 것이다. <영조와 호남어사의 문답> 1731년(영조 7) 정월 창경궁 진수당(進修堂).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지 채 3년이 되지 않은 때에 호남어사로 다녀온 황정(黃晸)의 보고가 있었다. 호남의 상황은 이미 어사의 서계(書啓)로 보고되어 영조도 두루 알고 있었다. 영조 : 이이기의 일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호남어사 황정 : 신이 상세히 탐문하고 조사하였는데 실로 너무 애매합니다. 대체로 전 남원부사 최집과 사혐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당초에 최집이 이이기에게 청혼을 하였는데 이이기가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으니 이에 유감을 품고 죄를 얽었다고 합니다. 신이 남원에 출도하였을 때에 이이기의 처와 딸이 산발을 하고 앞에 와서 언서로 의송을 하고 말하기를 ‘최집이 죄가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 꼭 밝혀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나갈 때에 그의 처가 곡하면서 말하기를 ‘이 딸이 지 애비를 죽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영조 : 그렇다면 ‘마음대로 군병을 발동하였다’은 애매한 것인가? 황정 : 돈을 주고 부렸다고 합니다. 어사가 서계로 보고한 내용에 이미 이이기가 남원부사 최집의 간계에 걸려 ‘마음대로 군병을 동원하였다[擅發軍兵]’는 죄목으로 효시를 당한 것은 억울하니 이를 다시 조사하여 원억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보고하자, 영조가 그 대목을 들어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영의정이자 약방 도제조인 홍치중(洪致中), 병조판서 겸 약방 부제조 김재로(金在魯)는 호남에 호부(豪富)한 자가 많은데 이들이 간전을 할 때 혹 사람을 고용하여 일을 돕게 하는 것이 있고 이것은 마음대로 군병을 발동하는 것과는 다르니 효시한 것은 과한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어사 황정은 좀더 자세히 보고한다. 즉 집 뒤에 큰 나무가 있어서 이를 벌채하여 물방아를 만드는 데에 속오군을 동원하여 운반한 것이고, 또 한 명당 각각 조미 1두를 지급했다고 하니 마음대로 징발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어사 황정이 출도를 하자 이이기의 처가 한글 원정을 내서 직접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하였다는 것이다. 남원부사 최집은 무반 출신으로, 황정이 어전에서 이이기 부인의 말을 빌어 자신의 딸 때문에 지애비가 죽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황정과 이이기 간의 혼담이 오고갔다는 것을 추측할 수가 있다. 조정에서는 이이기가 남원부사 최집의 간계에 걸려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 원억을 풀어주는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였다. 도승지 겸 약방 부제조인 박문수도 의견을 제시하였다. 어사가 말한 대로 억울한 것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호남의 호강(豪强) 토호는 이이기의 일로만 보더라도 나라를 무서워하고 단속하는 마음이 없는데, 지금 만약 신원을 하게 되면 호남의 호강배들이 조정을 경시할 것 같으니 억울하지만 몇 년 기다려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효시된 지 15년 후, 호남심리사(湖南審理使) 조영국(趙榮國)의 건의로 신원되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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