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임자도를 만나다. 게시기간 : 2020-02-29 00: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2-27 11:0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
||||||||
천사섬 신안군의 임자도에 가면 이흑암리에 우봉 조희룡(1789〜1866)의 적거지(謫居地)와 그가 살던 옛집을 복원한 만구음관(萬鷗唫館)이 있다. 그리고 대기리에는 기념관이 있다.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같은 시기를 살았지만, 추사의 위세에 눌려 가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조희룡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 또 실시학사(實是學舍) 고전문학연구회 등의 노력으로 2004년 1월에 문화관광부 선정 ‘이 달의 인물’로 지정되면서 주목받았다. 그 후 15년이 지난 작년 9월 28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우봉 조희룡의 문학과 예술’이란 주제로 ‘조희룡 탄신 23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천사섬 신안군과 한국미술사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학술대회였다. 유수한 학자들에 의해 조희룡의 예술세계가 풍부하게 재조명되면서 이른바 ‘묵장(墨場)의 영수(領袖)’1)로서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졌다. 그의 집안은 조선후기에 영락하여 무반직(武班職)으로 출사하다가, 아버지와 그의 당대에 이르러 중인계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희룡은 임자도에 유배 오면서 신안군과 인연을 맺었다. 안동 김씨 세도가들과 왕실의 전례(典禮) 문제를 둘러싼 공방으로 권돈인·김정희 등이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때 김정희의 조아심복(爪牙心腹)으로 지목되어 함께 유배당하였다. 그는 78세까지 살았다. 그 중 임자도 유배기간은 1851년 8월 22일2)부터 1853년 3월 18일까지, 햇수로는 3년이지만, 실제 기간은 19개월에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길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에게 소중한 성취를 이루게 하였다. 원치 않았던 뜻밖의 유배였지만, 그의 예술에 획기적 전환의 계기 되었던 것이다. 외딴 섬 임자도가 어떻게 화참(畵讖)3)의 구현 공간이 되었을까? 오늘 이야기에서는 우선 그가 임자도에서 만난 자연과 주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런 만남으로 그의 그림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적거지, 만구음관(萬鷗唫館, 만 마리의 갈매기가 울부짖는 집) 당시 사람으로는 유난히 오래 살았던 조희룡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개월의 짧은 유배기간 동안 그의 주요 저술들이 대부분 이루어졌다. 유배기에 그는 예술에 관한 잡록인 『화구암난묵(畵鷗盦讕墨)』, 시집 『우해악암고(又海岳庵稿)』,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 등 3종의 책을 남겼다. 그밖에 그의 그림에 써 넣었던 화제들을 모은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도 유배 즈음에 완성한 것으로 보이며, 유배에서 풀려난 후 서울 강가에 은거하며 정리한 글인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이 또 그의 주요 저술로 꼽힌다. 따라서 유배기를 전후한 시기를 사상적 난숙기라 평할 수 있겠다. 이처럼 임자도의 유배생활은 그에게 뜻밖의 시간과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그의 생각들을 글로 표출하여 세상에 남게 하였다. 현존하는 작품들도 대부분 유배시절의 것들이다. 당호가 있는 그의 작품 19점 중 8점이 이때 나왔다고 한다. 이것 모두가 병풍·화첩·대련일 정도로 대작들이었다. 그의 그림 역량은 이때 최고 수준에 이르러 이론까지 겸비된 완숙의 경지로 들어섰다. 따라서 화가로서의 생애만을 본다면, 유배 전과 후로 크게 나눌 수 있을 만큼 유배경험이 그의 예술세계, 화풍의 변화 등에 미친 영향은 컸다.4) 결코 좋을 환경일 리 없는 유배지, 게다가 육지와 떨어진 섬, 아무 것도 없었을 것 같은 임자도에서 도대체 무엇이 그런 계기가 되었을까? 그의 거처는 문 앞에 외진 포구가 있는 바닷가 마을 이흑암리였고, 그의 집은 황토로 된 움집으로 게딱지 집[蟹舍], 달팽이 집[蝸廬] 같았다. 그는 자신의 오두막집을 화구암(畵鷗盦, 갈매기로부터 화의(畵意)를 얻는 집), 또 만구음관이라 불렀다.
그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자연과 어울려 있으면서도 섬이 주는 고독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그의 집 모습은 실경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의 「방운림산수도(仿雲林山水圖)」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래도 원치 않았던 유배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외로움, 울적함, 그리고 그리움이 떠나지 않았다. “해태전(海苔箋) 위에 몇 글자를 써내어서 ‘일망오운암(日望五雲庵)’이라 편액을 달고 싶네”5)라는 시를 통해 서울을 그리는 마음이 세월이 가도 여전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움이 크면 클수록 그가 느끼는 외로움, 적막감도 더 컸다. 자연, 그 무정(無情)한 곳에서 우정(友情)을 맺다. 그에게 절망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를 위로해 준 첫 번째 자연은 집 주변의 소나무와 대숲이었다. “위로됨은 이곳에 긴 대나무 잘 자라는 것”, “이 곳에서 기뻐할 것은 소나무와 대숲뿐”, “산죽 숲 속 작은 집이 은은하다.”라고 자위하면서 주변의 자연을 통해 유배생활에 적응해 갔다.
【그림4】 조희룡의 묵죽(墨竹)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는 수백 편의 시를 썼지만, 시는 그의 유배생활을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쓰면 쓸수록 외로움을 키웠다. 그래서 그는 문득 시를 덮어 두고 그림으로 들어갔다[閣詩而入畵]. “이에 시가 열 손가락 사이로 터져 나와 매화가 되고, 난초가 되고, 돌이 되고, 대가 되었는데, 연이어져 끝낼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림들이 곧 집에 가득 찼다. 이처럼 그림을 통해 가슴속 불평한 기운을 표출해내는 오직 이 한 가지 일이 일체의 고액(苦厄)을 극복해가는 법이라고 하였다.6) “시가 변하여 그림”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런 과정을 “저는 모래 사장의 갈매기와 더불어 세상 밖의 친구로 삼아, 무정(無情)한 곳에서 우정을 맺었으니[結契於無情處], 이야말로 참다운 우정을 맺은 것입니다.”7) 라고 하여 무정한 곳 즉 자연에서 진짜 우정을 맺었다고 표현하였다. 이렇듯 섬, 임자도의 자연은 그에게 창조의 바탕이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이를 그림으로 표현해 사람들을 위로하는 그림으로 재탄생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돌, 대나무, 산, 물, 조수(潮水) 등등 섬에서 흔히 보는 자연과 그 현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새로운 발견을 한다. 그 중에서도 돌과의 만남을 첫손에 꼽을 만하다. 돌에서 시작된 그림은 매화, 난, 대, 솔, 국화로 이어졌다. 두 해가 지난 어느 날 그는 산에 대하여도 새롭게 깨달았다. “나는 바닷가에 거한 지 이미 두 해가 되어, 네 계절을 두루 겪어 보았는데 바다 산은 다른 산들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봄산은 어둑하고 몽롱하여 안개가 낀 듯하고, 여름산은 침울하여 쌓여 있는 듯하고, 가을산은 겹치고 끌어당겨 흐르는 듯하고, 겨울산은 단련되어서 쇳덩이와 같다. 이러한 뜻을 바다 산을 그리려는 사람에게 줄 만하다. 그러나 바다 산을 보지 못하면 이것을 알 수 없을 것이며, 비록 보아도 그 뜻을 얻지 못하는 자는 능히 그릴 수 없다.”8)
바닷가에 살다보니, 그때까지 흔히 보았던 물도 새롭게 보였다. 날마다 바닷가의 물을 대하면서 물의 이치를 깨닫고 분별해 낼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했다. 돌 그림도 그렇고, 대 그림 역시 육지에서는 접해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따라서 애당초 이는 ‘변형에 의한 창조’의 단계를 넘어선 그야말로 홀로서기[不肯車後]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독창성이 새로운 경지에 다다랐음은 바로 이런 자연의 선물이었다. 주민과의 나눔, 선개(癬疥, 옴)의 고통에서도 벗어나다. 섬에서 사는 날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섬 주민들과도 만났다. 그러나 그 만남들은 어색함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시골 사투리[村語] 때로 들으니 격설(鴃舌)과 같아, 서로 만남에 마냥 되물어 비웃음 사네.”라는 시의 표현에서 그가 겪었을 어색함을 엿본다.
아무래도 아이들과의 만남이 쉬웠으리라. “구월 이십사일 다시 괴석 밭에 이르러 돌을 싣고 돌아왔는데, 아이 둘과 개 한 마리가 따라왔다.”, “눈보라치는 겨울 … 이에 홍매 한 폭을 그려서 글을 배우러 온 이웃 아이에게 주었다.”라 하듯이 아이들과 격의 없이 만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점차 주민들과의 만남도 이어졌다. 아이들에게 매화를 준 이후 매화 그림을 간청하는 이가 많아졌다. 대개는 꾸짖어 물리쳤으나, 어찌 한두 번 응해 준 적이 없겠는가. 이로부터 섬사람들도 매화가 있는 줄 알게 되었다. 이를 조희룡은 “이로부터 고기잡이들도 매화 그림을 이야기하나니. 우습도다, 한 가지 유희 이곳에 개시하였구나.”9)라고 하였다. 주민들과의 만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선개, 즉 옴의 치유였다. 그는 유배 온 이듬해 가을, 선개에 걸려 한동안 고생이 심하였다. 스스로 그 병의 원인을 “무엇이 빌미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 가만히 생각건대, 나는 본래 해물을 먹지 못하고 오직 닭고기를 좋아하는 식성이라. 이 섬에 들어온 두 해 동안 거의 몇 백 마리를 먹은 것 같은데, 이로 인해 풍이 발병한 것인가?”10)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선개의 고통이 심하자 그는 우스개 글을 쓰면서까지 이를 잊고자 하였다.11) 그런데 뜻밖에도 섬사람의 도움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장기를 호흡하는 나머지에 문득 선개의 증세를 얻어 큰 구슬 작은 구슬 모양의 것들이 온몸에 무수히 펴졌습니다. … 바다의 섬, 서넛 집이 사는 마을에서 한 양의(瘍醫)를 찾아 한번 치료를 하매 열에 일고여덟은 떨어져 없어졌으니 어찌 이곳에서 또한 이러한 보살의 손을 얻을 것이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일신상의 다행입니다.”12)
라 하였다. 설마 했던 후미진 섬에서 고통스럽던 선개를 치유 받았다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 신기했다. 이는 주민과의 접촉에서 일방적이 아닌 쌍방의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주민들은 그에게 어로지식을 전해주었고, 병을 치료해 주었고, 먹을 것을 대 주었다. 반면 그는 그림의 유희를 전해주었고, 홍재욱(洪在郁)·주준석(朱俊錫) 두 제자를 키워 시·화의 맥을 잇게 하려 시도하였다. 제자들에게 거는 기대 또한 컸다. 조희룡이 섬에 대해 지녔던 선입견에 상당한 오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두 제자와의 만남은 조희룡에게 커다란 위로였고 힘이었음은 분명하였다. 두 제자와의 만남도 섬에서의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그가 이룬 성과가 있다면 섬의 자연, 섬의 주민, 그리고 이를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조희룡의 역량, 이 삼위일체의 결과였다. 참고문헌 고석규, 「조희룡의 임자도 유배생활에 대하여」(『도서문화』24, 2004. 12,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화참(畵讖)의 구현(具顯) 공간, 임자도와 조희룡」(『우봉 조희룡의 문학과 예술 - 조희룡 탄신 230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 2019. 9, 신안군·한국미술사학회) 1) 오세창(1864∼1953)이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서 조희룡을 칭한 말로 “먹을 다루는 세계의 우두머리”란 뜻이다.
2) 8월 22일은 유배여정의 시작일이다. 따라서 조희룡이 임자도에 도착하기까지는 대개 보름 이상 걸렸을 것으로 보인다. 3) ‘화참’이란 그림에 미래의 조짐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4) 손명희, 「趙熙龍의 梅·蘭·竹·石圖 연구」(『미술사학연구』, 한국미술사학회, 2006. 12.), 267쪽. 5) 해태전은 김종이이고 오운은 오색 구름이 있는 서울 하늘을 가리킨 것으로 ‘日望五雲庵’이란 “날마다 서울 하늘을 바라보는 집”이란 뜻이다. 6) 「畵鷗盦讕墨」(『趙熙龍全集』2), 19항, 42쪽. 7) 「壽鏡齋海外赤牘」(『趙熙龍全集』5), 76쪽. “結契於無情處 是眞結契也” 8) 「畵鷗盦讕墨」(『趙熙龍全集』2), 49항, 69쪽. 9) 「又海岳庵稿」(『趙熙龍全集』4) 참조 10) 「畵鷗盦讕墨」(『趙熙龍全集』2), 61항, 93쪽. 11) 「壽鏡齋海外赤牘」(『趙熙龍全集』5), 36쪽. 12) 「壽鏡齋海外赤牘」(『趙熙龍全集』5), 79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