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백양사 쌍계루, 문화공간의 변주(變奏) 게시기간 : 2020-03-03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3-02 10:1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
||||||||
김정호(金正浩)의 ‘산은 물을 나누는 봉우리 山自分水嶺’는 유명하다. 18세기 후반 우리의 국토와 산하, 도로와 시장 그리고 국경을 새롭게 발견한 신경준(申景濬) 또한 적었다. “산은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나뉘고, 물은 만 갈래가 하나로 합쳐 바다가 된다.”1) 이렇듯 물은 산에서 나와 고개 사이를 지나 고을과 들판을 적시고 바다로 모이며, 사람은 고개 넘고 물을 따라 고을과 나라를 만나고 너른 세계로 간다. 영산강의 한 줄기는 하얗게 솟구친 암벽이 장관인 백암산(白巖山)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조선후기 환양팔원(喚羊八元)은 하얀 양이 다소곳 앉아 설법을 들었다고 하여 백양사로 불리게 된 명찰이 있다. 당시는 백암사, 정토사였다. 1377년 2월 정도전은 유배지 회진을 벗어나 정토사를 방문하였다. 무열 장로가 남쪽 다리 밖까지 마중 나왔다. 정토사 주지 청수(淸叟)와 함께 세 사람이 누각에 앉았다. 무열이 자신의 천하 명찰 순례로 말문을 열었다.2) “내 일찍이 북으로는 연도(燕都), 남으로는 강소와 절강, 서쪽으로 사천까지 천하의 명산 거찰을 실컷 보았지만 산문이란 명승(名僧)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새삼 알았소.” 그리고 사찰의 창건과 중창 사적을 전하였다. “신라 때 이승(異僧)이 절을 세우고 지내며 백암사라 하였는데 송 경평(景平) 연간에 정토선사(淨土禪寺)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때 문도 선사 중 중연(中延)이 전당ㆍ문루ㆍ장실(丈室)ㆍ요사(寮舍) 등 모두 80여 칸을 갖추었는데, 중연의 문도가 교대로 전해오다가 일린(一麟)이 주관하였습니다. 왕사(王師) 각엄존자(覺儼尊者)가 8살에 일린을 따라 살았지요.” 신라의 이승은 실제 백제 무왕 때의 여환(如幻)으로 알려져 있으나 ‘경평(景平)’이 남북조시대 송 소제(少帝)의 연호(423∼424)라면 시대가 맞지 않는다. ‘경평’은 북송 인종의 연호 경우(景祐, 1034∼1037)와 영종의 연호 치평(治平, 1064∼1067)이다. 즉 고려 중엽 정토사로 이름을 바꾸며 거찰로 거듭났던 것이다. 중연과 일린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각엄존자(1270∼1355)는 송광사 수선사(修禪社)의 13세 사주(社主), 충정왕과 공민왕의 왕사였다. 법명은 복구(復丘), 자호는 무언수(無言叟)였다. 무열은 ‘각엄존자가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갔고 월남사와 송광사에 주석하다가 스승 일린을 기리며 정토사 중창 불사를 일으키고 대장경을 안치하며 법회를 열었음’을 설명하였다. 원오국사(1215∼1286)는 수선사 5세 사주, 각엄복구의 행적을 묘비명 등의 자료로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3) 10살에 원오국사에 의탁한 각엄복구는 대여섯 해 정진하다가 원오가 입적하며 소개한 대선사 도영(道英)의 문하에서 용맹정진, 21살에 선과에 장원하고, 월출산 월남사에 머물렀다. 수선사 8세 사주 자각대사(慈覺大師)가 학도를 맡기니 ‘자신이 얻은 바가 있은 뒤라야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인데 진실로 감당할 수 없다’며 백암사로 옮겨 십여 년을 지내고, 송광사로 들어가 수선사를 맡았다. 그간 정토사를 중창하고 중국에서 대장경을 들여와서 전장법회(轉藏法會)를 열었으니 1335년(충숙왕 4) 봄이었다. 말년에 왕명으로 영광 불갑사에 머물다가 1450년(충정왕 2) 왕사가 되었다. 공민왕 또한 ‘어려운 때 나의 다스림을 보필하고 조상의 교훈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왕사로 초빙하였지만, 초상화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였다. 1355년 백암사로 돌아와서 입적하였다. 세수 86년, 법랍 76년에 시호는 각진(覺眞)이었다. 다음은 열반 게송이다.4) 즉심즉불(卽心卽佛)은 강서(江西)의 노인이라, 비불비심(非佛非心)은 세상 밖 늙은이로세. 날다람쥐의 울음소리에 나 홀로 가노니, 열반에서는 생사가 본래부터 공(空)이로세. 무열은 청수가 백암사를 맡게 된 사연을 풀어놓았다. “각엄존자께서는 삼한명가로 여기 청수가 친조카입니다. 청수는 일국의 종사(宗師)로 학자가 구름처럼 귀의하였고, 또한 곁에서 모신 지가 오래되어 심정이나 의리로 보아 청수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절을 부탁하고 후사를 주관하도록 하였습니다.” 각엄은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와 왕명을 출납하고 왕실을 숙위하는 밀직사(密直司) 판사를 지낸 이존비(李尊庇, 1233∼1287)의 둘째 아들, 청수는 각엄의 동복형인 철원군 이우(李瑀)의 셋째 아들로 문하시중 이암(李嵒, 1297∼1364)의 아우였으니 당대 명가 출신이었다. 청수는 천태종 판사를 지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이란 품계와 복리군(福利君)이란 봉호까지 받았다. 법호는 징(澄)이며 별호는 운암(雲菴), 자칭 나잔자(懶殘子)라 하였다. 이색에 따르면 ‘내가 열예닐곱 때 유자들과 시구의 짝을 맞추고 술 마시며 노닐었는데, 지금 천태판사 나잔자가 우리들을 어여뻐하여 초청하고…’ 또한 ‘지금 천태종의 나잔자가 일찍이 유자들과 어울려 노닐기를 좋아하고 소동파의 시를 곧잘 강독하였으므로, 유자들이 그의 강의를 듣느라고 매일 자리를 가득 메우곤 하였다’고 한다.5) 불문에 의탁하기 전인지 모르지만 술을 좋아하고 시문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색이 나잔자의 방문에 즈음하여 읊었다.6) 시마(詩魔)에 씌우고 술에 엎드린 모임에서 나잔자는 그때 빈털터리 무전(無錢)으로 이름났지요. 모두 비처럼 구름처럼 뿔뿔이 흩어진 지금, 백발 되어 무슨 수로 미소년 때보다 넉넉하리오. 정토사를 맡은 청수는 ‘불상과 사천왕상, 염불ㆍ범패를 위한 종과 경쇠를 갖추고 곳간을 채웠다.’ 그러다가 1370년(공민왕 19) 홍수를 만나 다리와 누각이 쓸려나갔는데, 청수는 목재와 기와를 모아 금방 되살려놓았다. 이제 무열이 정도전을 초대한 까닭을 밝힐 때, “여기 누각에 올라 사방을 보면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으니, 어찌 우연이리요? 이제 선생과내가 마주 앉아 직접 보았으니 어찌 말이 없을 수 있으리?” 기문을 요청한 것이다. 기문은 요즘으로 말하면 격조 높은 기념사다. 정도전이 그간 무열이 말한 사찰의 내력을 옮기고선 간단히 매듭지었다. “훗날 누각에 오르는 사람은 산수풍경이 뛰어난 것만 취하지 말고 앞 사람의 공덕을 이어져왔음을 알아야 한다.” 정도전은 그해 7월 유배가 풀려 삼각산 옛집을 돌아가 몇 년을 부평 김포를 옮겨 다니며 강학하다가, 1383년 가을 동북면으로 가서 이성계의 막료가 되었다. 한편 청수는 정도전의 기문이 사찰의 내력은 소상하나 정녕 새로 지은 누각의 이름도 짓지 않았음이 아쉬웠다. 절간(絶磵)을 통하여 이색에게 기문을 다시 부탁하였다. 절간의 법호는 익륜(益倫), 당호는 송풍헌(松風軒)으로 나옹혜근의 문도였다. 시문을 좋아하고 정공권(鄭公權)ㆍ한수(韓脩)ㆍ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가 깊었다. 언젠가 절간의 시권을 보고 이숭인이 ‘막다른 골짜기 절간’ ‘솔바람 송풍’을 조합하여 재미있게 건넸다.7) “막다른 계곡 차디찬 물, 솔바람 집으로 쏟아지네. 개울물 솟아 활기차니 밤낮으로 솔바람도 떠들썩하리. 처음엔 하늘 노래인 듯싶었는데, 순임금 탕임금 음악과 비슷하여라. 우리 스님 가부좌 틀고서, 무현금(無絃琴)으로 화답하신 게야.” 절간은 이색도 자주 찾았다. 다음은 「윤절간의 방문」이다.8) 천마산 북쪽 고개 물이 잔잔하게 흘러, 서쪽 언덕 관음석굴 사이로 내려갔지. 예전에 물길 따라 오르락내리락 했던 생각나니, 박연폭포가 흡사 여산(廬山)인 듯싶더군. 개성의 천마산에는 절간이 한동안 머물렀던 지족암(知足菴)이 있고, 중국 강서의 여산은 삼천 척 내리쏟아지는 폭포로 유명하다. 절간은 이색에게 ‘쌍계루’란 누각 이름과 기문을 받고, 정몽주에게 제시(題詩)를 요청하였다.9) ‘제시’는 서화나 건물 등을 주제로 처음 짓는 원운(原韻)이다. 시 구하는 백암사 승려를 이제 만나고, 붓 잡고 쩔쩔매며 어찌 못해 부끄러워라. 청수가 누각을 세워 그 이름 처음 소중한데, 목은 어른 기문 지어 그 값이 더해졌네. 붉은 저문 산에 노을빛 아스라하고, 달그림자는 맑은 가을 물을 배회하리라. 오래도록 사람 세상에서 번뇌가 뜨거우니, 어느 날 훌훌 떠나 그대와 함께 오를까? 이렇듯 백양사 쌍계루는 한 시절, 무열과 청수와 정도전이 만났고, 절간과 이색과 정몽주가 어울린 생각 나눔, 문화공간이었다. 그러나 십여 년, 이들의 행로는 달랐다. 절간은 서역의 지공이 자리 잡고 나옹혜근이 건립한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대가람이 공역을 마무리하였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도 하나의 권력을 나눌 수 없는 엄혹한 상황에서 ‘함흥차사’로 이름을 남겼다.10) 그런데 이색의 기문과 정몽주의 원운시를 누가 백암사로 가져왔을까? 1) 『여암전서』 권10, 「산수고」 1 “一本而分萬者 山也, 萬殊而合一者 水也”
2) 정도전, 「白巖山淨土寺橋樓記」. 『삼봉집』에 「白巖山淨土寺記」란 제목만 실려 있으며, 조선총독부의 『朝鮮寺刹資料』에 수습되어, 지금 쌍계루에 걸려있다. 3) 조명세 외 역주 『조계산송광사사고: 인물부』 혜안, 2007. 4) 李達衷, 『霽亭集』 권3, 「覺儼尊者贈諡覺眞國師碑銘」 “卽心卽佛江西老 非佛非心物外翁 鼯鼠聲中吾獨往 涅槃生死本來空” 5) 『목은문고』 제8권 「휴 스님에게 주는 시의 서문 贈休上人序」 및 제20권, 「백씨전 白氏傳」 6) 『목은시고』 제28권 「나잔자의 방문이 고마워서 謝懶殘子見訪」 “結杜詩魔與酒顚 懶殘當日號無錢 諸生雲雨皆離散 白髮寧饒美少年” 7) 『陶隱集』 권1, 「윤스님 절간의 송풍헌시권 앞에 적다 題倫上人絶磵松風軒卷」 “泠泠絶磵水 落此松風軒 磵水源流活 松風晝夜喧 初疑奏天樂 復似韶濩音 上人跏趺坐 和以沒絃琴” 8) 『목은시고』 권19, 「倫絶磵來過」 “天磨嶺北水潺潺 西岸觀音石窟間 記得沿流曾上下 朴淵瀑布似廬山” 9) 『목은문고』 권2, 「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 『포은집』 권2, 「長城白嵒寺雙溪寄題」 “求詩今見白巖僧 把筆沉吟愧未能 淸叟起樓名始重 牧翁作記價還增 烟光縹緲暮山紫 月影徘徊秋水澄 久向人間煩熱惱 拂衣何日共君登” 10) 『목은문고』 제2권 「天寶山檜巖寺修造記」; 金守溫, 『拭疣集』 권2, 「檜庵寺重創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양주목」 ‘회암사’; 『태종실록』 권1, 1년(1401) 4월 28일 및 4권, 2년(1402) 11월 15일.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