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시초대석] 작법으로 읽는 한시 절구(4) 그래도 ~있다 [猶有] 게시기간 : 2020-03-05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3-04 14:2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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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宣祖) 연간의 문신인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의 시이다. 이정형의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67년 선조 즉위년에 치러진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 진사 양과에 각각 2등, 3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인 선조 1년의 증광시(增廣試)에서는 갑과(甲科) 2위로 급제하였는데, 갑과 2위는 장원의 다음이라는 의미로 아원(亞元)이라고 칭할 정도로 인정받는 순위이다. 이후 예조참판, 우승지,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명나라에 몇 차례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저서로 『지퇴당집(知退堂集)』,『동각잡기(東閣雜記)』 등이 있는데, 특히 『동각잡기』는 조선 건국 배경부터 선조 때까지의 명신들의 언행, 정치 상황 등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데다, 국가의 전례나 관직의 전고 등을 살필 수 있는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자주 인용이 되고 있다. 이정형은 59세이던 1606년(선조 39) 9월에 삼척부사(三陟府使)가 되었는데, 이 시는 그 이듬해쯤에 지은 것이다. 경기도 양주에 선산과 만년 은거처가 있던 그로서는 인근의 강원도 지역이 낯설지 않은 곳이다. 24세, 49세 때 춘천의 천전(泉田)을 내왕한 기록이 있고, 52세 때는 강원도 관찰사, 58세 때는 삼척부사로 강원도와 인연을 맺었다. 그런 그에게도 강원도 산골의 적막함은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다. 시의 앞 두 구절에서 가도 가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들판을 말을 타고 내달릴 때의 쓸쓸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런 정경이 시의 끝까지 이어진다면 한없이 암담하기만 할 뿐이다. 시다운 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분위기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형시인 한시 절구에서는 이러한 분위기의 전환을 주로 제3구에서 처리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제3구를 전구(轉句)라고 부른다. 전환의 핵심적인 역할은 이 전구의 첫머리에 놓이는 시어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의 제3구에 쓰인 ‘유유(猶有)’라는 시어도 그런 역할에 아주 적합한 표현이다. ‘유유(猶有)’는 ‘여전히 ~은 남아 있다.’, ‘그래도 ~는 있다.’는 의미이다. 한시 절구의 3구나 4구에 자리하면서, 원치 않는 상황을 기술한 앞 두 구절의 분위기를 반전시켜 그 다음에 나오는 경물이나 상황으로 인하여 그나마 위로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정격(正格)이다. 얼핏 보면 시어의 뒤에 이어지는 경물이나 상황을 통해 아쉬움을 달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앞 구절의 상황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뜻의 ‘의구(依舊)’라는 시어와 그 용법이 비슷하다. 이 시어의 용법은 특이하게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지은 시에서 나란히 발견된다. 청음의 장손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은 「왕양명의 운자를 쓴 문곡의 벽파정 시에 차운하다[次文谷碧波亭用陽明韻]」라는 시에서 이 용법을 사용하였다.
숙종조 극심한 당쟁 속에서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실각한 뒤 유배 가는 아우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을 전별하면서 지은 시이다. 동음(洞陰)은 경기도 영평의 다른 이름으로, 장동김씨(壯洞金氏) 일가의 연고가 있는 곳이다. 앞의 두 구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탄식하고 ‘유유(猶有)’를 사용하여 희망적인 분위기로 전환하고 있다. 청음의 둘째 손자인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은 ‘유유’라는 시어를 사용하여 3수를 지었다. 그 중에 기사환국으로 조정에서 쫓겨나면서 지은 시가 있는데, 아우인 김수항이 같은 상황에서 지은 비슷한 제목의 시와 흡사하다는 것이 흥미롭다. 아래 시는 김수흥의 「기사년 2월에 엄한 유지를 받고 파직되어 도성을 나서면서, 도중에 읊조리다.[己巳二月 被嚴旨特罷出城 路中口占」라는 시이다.
그 아우인 김수항도 비슷한 시를 지었다. 「8월 19일 새벽에 도성 동쪽으로 나가며 잎으로 감회를 읊다.[八月十九日曉出城東 口占詠懷]」라는 시이다. 김수흥이 기사년에 지은 시보다 2년 전인 1687년 정묘년에 지은 것이다. 그 주석에 김수흥의 시 제목과 비슷한 “당시에 엄한 유지를 받고 도성을 나섰다.[時承嚴旨出城]”는 표현이 있다.
앞 두 구절에서 벼슬살이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떠나가는 홀가분한 심정을 표현하고, 뒤 두 구절에서는 임금을 두고 떠나가는 신하의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묘당(廟堂)의 높은 곳에 처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江湖)에 먼 곳에 처하면 그 군주를 근심하니, 이는 벼슬에 나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 라고 한 이래로 유가의 글에서 흔히 보이는 전형적인 사고이다. 김수흥의 호 퇴우당(退憂堂) 역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두 시는 이정형이나 김수증의 시와 달리 앞의 두 구절이 밝은 분위기이고 뒤의 두 구절이 어두운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유유(猶有)’라는 시어를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분위기의 전환을 이루어 낸 것은 차이가 없다. 지금 전대미문의 바이러스로 인해 나라 안, 아니 전 세계가 온통 뒤숭숭하다. 거주는 물론 출입국까지도 제한을 받는 실정이다.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각종 위기에 무심했던 탓에 너나없이 우왕좌왕하고 있고, 그에 따라 공포심은 더욱 극대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현대 문명의 발달에 부수되는 필연적인 폐해로,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오던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일이 닥쳤을 때 해결하면 되지.”라는 안이한 생각에 미처 철저하게 대비를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누구를 원망하고 배척할 게 아니라, 우선은 한마음으로 뭉쳐 극복하고 볼 일이다. 그리고 차제에 또 다른 위기의 발생 가능성을 점검하면 된다. ‘유유(猶有)’라는 시어처럼 국면의 대반전을 기대해 본다. 글쓴이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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