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노비가 된 대학자 : 정의의 법정, 「안가노안(安家奴案)」의 재해석 게시기간 : 2020-01-09 07:00부터 2030-05-04 04:00까지 등록일 : 2020-01-08 16:0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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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가노안」과 송익필> 우리나라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노비세습제라는 법제가 있었다. 노비제는 1894년 근대적 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부모 둘 중의 하나라도 천인이면 자식들은 모두 천인이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천인 신분 세습 원칙,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녀가 양인이 되는 ‘종모종량법(從母從良法)’, 소생 노비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에 따른다는 ‘종모법(從母法)’ 등은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 지켜져 온 원칙이었다. 「안가노안(安家奴案)」이라는 자료는 조선전기에 안씨 집안의 사비(私婢)였던 송사련(宋祀連)의 할머니와 그 자손들의 천첩 자녀 소생의 신분 결정에 관한 소송 문서를 베껴놓은 자료이다. 그 원문서는 남아있지 않지만, 패설류 자료집인 『대동패림(大東稗林)』에 「안가노안」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안가노안」은 거의 2만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결송입안과 관련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의 집에서 나온 문서라고 한다. 안가의 사비였던 중금(仲今)이 안돈후의 비첩(婢妾)이 되어 감정(甘丁)이라는 딸을 낳았고, 감정은 송린(宋獜)이라는 양인과 결혼하여 송사련을 낳았다. 송사련은 또 양인 여자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낳았다. 딸은 왕족인 한원수(漢原守)와 결혼하였고, 인필(仁弼)과 부필(富弼), 윤숙(胤淑), 익필(翼弼), 한필(翰弼) 등 다섯 아들은 모두 양녀와 결혼하였다. 표1 「安家奴案」 관련도 1586년(선조19), 안가가 소송을 제기하기 이전에 안가와 송가 사이에는 백 년 넘게 지속된 여러 사연들이 있었다. 송가가 안가와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중금이 안돈후의 비첩(婢妾)이 되었고 안돈후와 중금 사이에서 감정이라는 딸이 태어났다는 것, 그 딸이 송린(소철)이라는 양인과 결혼하여 송사련을 낳았다는 것이다. 안가 집안에서는 감정을 어머니가 다른 동생으로 인정하였다. 송사련은 안가 집안의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그래서 관상감에 들어가서 천첩 소생이긴 하지만 벼슬을 하고 있었다는 것, 송사련도 양녀와 결혼하여 6남매를 낳아 1녀는 왕족인 한원수와 결혼하였고, 5남도 양녀와 결혼하며 과거에도 응시하고 벼슬에도 나아갔다는 것이다. 안가 형제들과 친하게 지내던 송사련이 기묘사화(1519, 중종14) 이후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던 남곤과 심정의 무리들을 제거하려는 안처겸과 그 일파들의 음모를 밀고하여 안처겸은 물론 그의 아버지 기묘 현량과 출신인 안당 등이 모두 역모로 처단이 되었다. 이른바 신사무옥(1521, 중종16) 사건이다. 안가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유배되고 재산은 적몰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된다. 밀고한 공로로 송사련은 당상관에까지 승진하고 안가에게서 적몰된 많은 재산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권신 김안로가 축출되고 기묘사림이 복권되면서 안로, 안처겸도 복권이 되었다. 또 안씨 후손의 신원 상소로 안당이 복권되고 현량과의 자격도 회복되었다. 인종 대에 회복되었다가 명종 대에 다시 박탈되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선조 대에는 사림파의 집권에 힘입어 완전히 복권이 된 것이다. 안처겸의 아들 안로는 기묘 사림파의 입장에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를 편찬하여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송사련 자손들을 노비로 환속시킬 것 주장하였다. 이상이 안가가 송가들을 노비로 환천(還賤)시키는 소송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사정이다. 그림1 결송입안의 마지막 부분(1586년 나주목 노비 소송) : 결송입안은 노비나 토지 등의 소송의 결과를 공증하는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민사소송 판결문인 결송입안은 ①문서 제목(입안을 발급한 날짜와 관청 이름), ②소장(訴狀)의 내용, ③시송(始訟) 다짐(원고·피고 양 당사자의 소송 개시 합의), ④원고·피고의 진술, ⑤당사자의 주장과 증거 제출, ⑥결송 다짐(변론 종결의 확인과 판결 신청), ⑦ 판결 내용을 모두 기록하였다. 「안가노안」은 안가의 승소로 끝난 안가와 송가 사이의 노비 환천 소송이다. <정의의 법정 : 역사적 정의와 법적 정의> 오랜 시간이 지나고 역사는 흘러서 정의의 기준이 바뀌게 되었다. 사림 세력이 권신 소인배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명종 초기 소윤(少尹)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지만 사림의 지속적인 탄핵과 규탄으로 그들은 권력을 상실하였다. 특히 소윤의 실질적 기둥이었던 문정왕후의 죽음은 그들의 권력적 기반을 잃은 계기가 되었다. 명종이 후사도 없이 죽고 선조가 사림의 옹립에 의하여 왕이 되자, 이제 사림의 세상이 되었다. 이들 사림은 곧바로 ‘역사바로세우기’ ‘적폐청산’ 작업을 시작하였다. 안가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안가가 제기한 노비 환천 소송에서 송가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치열한 법적 투쟁이 벌였다. 안가 쪽에서는 안당의 손자이자 안처겸의 아들인 안로의 처 윤씨가 원고로서 소를 제기하였다. 송가 쪽에서는 송사련의 아들 인필이 중심이 되어 피고의 입장에서 방어를 하였다. 이 소송은 중금이 안돈후의 비첩이 되어 감정이라는 딸을 낳은 때로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고 그 사이에는 무려 세 세대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 쟁송에서 가장 큰 법리적 논점은 문서의 진위와 효력의 문제와 소송의 시효의 문제였다. 첫째, 문서(贖良 문서, 遺書)의 진위와 효력의 문제에 있어서 안가 측의 주장은 중금의 딸 감정이 속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의 후손은 모두 천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천인에 대한 소유권은 안가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송가 측에서는 감정이 보충군을 거쳐서 속량이 된 문서를 제시하고 속량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안가 쪽에서는 속량 문서를 당사자인 감정의 부친인 안돈후가 직접 제출하지 않고 감정의 이복 오빠가 제출하였으므로 법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한다. 판관은 안가의 주장을 따랐다. 둘째, 소송의 시효 즉 기한(小限, 大限) 문제이다. 송가 측에서는 설령 문서가 무효라고 하더라도 송가들은 이미 양인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감정의 아들인 송사련은 벼슬을 하여 당상관에까지 올랐다고 주장한다. 또 송사련의 자녀들은 모두 왕족과도 통혼하고 과거를 거쳐 벼슬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소송의 기한도 지났기 때문에 다시 환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안가 측에서는 오랫 동안 이들을 환천하지 않은 것은 친족골육상잔금지법(親族骨肉相殘禁止法)에 의하여 4촌 이내의 친족은 부릴 수가 없어서 소송을 하지 않은 것뿐이고 이제 6촌을 넘어섰기 때문에 환천을 하여 사역을 시켜도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논쟁에서도 판관은 안가의 주장이 채택하였다. <송익필과 제자들> 안가와 송가의 노비 환천 소송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송사련의 아들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이다. 송익필은 서인의 핵심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과 막역한 벗이었다. 송익필같은 대학자마저 천인으로 돌리는 이 소송은 사림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어 동인이 집권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이, 성혼, 정철, 조헌 등 서인 세력은 이산해, 유성룡 등 동인 세력에 밀리던 시기였다. 『대동패림』의 편찬자는 「안가노안」소송 문서를 그대로 베껴서 수록한 뒤 그 마지막 부분에 이 소송 사건에 관련된 명사들의 기록도 수록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택당(澤堂) 이식(李植) 등 명가의 글을 인용하여 송 나라 악비(岳飛)와 진회(秦檜) 후손 간의 토지 소송에서 악비 후손 편에 서는 것이 정의를 세운다고 생각한 것처럼 송가를 환천하여 안가의 노비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역사적 정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안가노안」은 기본적으로 동인이 서인을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편찬되었다. 법률적 정의보다는 역사적 정의의 입장에 선 것이다. 악비와 진회 후손 간의 토지 소송에서, 문서를 볼 필요도 없이 악비 후손의 승소로 판정한 판관의 행위를 찬양한 것은 역사적 정의의 입장인 것이다. 간사한 송익필이 율곡을 끌어들였다든가, 송가들이 다시 환천된 것은 사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평가인 것이다. 서인 측에서는 이러한 자료가 유포되는 것 자체를 기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안가노안」은 율곡-사계-우암 등으로 이어지는 서인-노론 세력에 반대하는 측에서 의도적으로 등사하여 전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2 『구봉집(龜峯集)』 : 「현승편(玄繩編)」에는 구봉 송익필, 우계 성혼, 율곡 이이 사이의 서간의 왕래, 학문적 문답 등이 수록되어 있다. 동인에 이어서 북인이 집권하여 서인이 거의 배제된 광해군 대까지는 송익필 등 송가에 대한 신원을 위한 청원은 접수조차 될 수 없었다. 제자인 조헌이 힘써 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 정권이 들어서자 송익필의 제자들은 비로소 스승의 신원 운동을 벌였다. 제자들과 그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된 『구봉집』에는 이러한 사정들이 소상하게 설명하고 스승을 위한 변명에 주력하였다. 1625년(인조3) 2월에 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약봉(藥峯) 서성(徐渻) 등은 스승을 위하여 신원 상소를 올린다. 동인인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 등이 이이와 성혼을 미워하고 그 증오가 송익필에까지 미쳐 반드시 이들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송사련의 어미가 이미 종량을 했고 송사련도 잡과 출신으로서 연속 2대에 걸쳐서 양역(良役)을 하였으며 또 60년 대한(大限)을 지났기 때문에 환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법전에 있다고 주장한다. 송익필은 환천이 실행되려 하자 몸을 빼서 도피 생활을 하였으나 그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여 자수하게 되고 그 형제들과 함께 변지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사면이 되어 돌아온 구봉은 더 이상 살 곳을 찾지 못하였다. 그는 제자 김장생의 주선으로 김장생의 사돈집에 기식하며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안가와 송가 사이의 노비 환천 소송 전말을 기록한 1587년 결송입안 「안가노안」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먼저 사림 세력의 복권과 소인배의 제거라는 역사적 정의의 입장을 드러낸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문서의 위조와 효력 문제, 과한법의 적용 문제, 골육상잔금지법의 문제 등 법리적 정의의 입장에서는 다툼의 소지가 많다. 이러한 법리적 판단은 역사적 정의를 세우는 측에 의하여 충분히 왜곡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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