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둥그런 또는 네모 난 읍성들 게시기간 : 2020-01-11 07:00부터 2030-07-02 01:01까지 등록일 : 2020-01-09 18:2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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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은 군현의 치소(治所)인 읍을 둘러싼 성을 말한다. 해미읍성이나 고창읍성, 그리고 낙안읍성 등에서 그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어 읍성 자체는 그리 낯설지 않다. 이 읍성들은 언제 어떻게 세워졌을까? 『호남청사례(湖南廳事例)』 「창설(刱設)」조(1657년, 효종 8)에 따르면, 호남의 군현들을 연읍(沿邑, 바다와 접한 군)과 산군(山郡)으로 구분하였는데, 연읍은 나주 등 27읍이고 산군은 장성 등 26읍이었다. 이중 산군에는 전주, 금산, 남원, 광주, 구례 등 5곳에만 읍성이 있는데 비해, 연읍은 27곳 중 21곳에 있다. 그만큼 읍성은 연읍과 상관성이 높다. 읍성은 방어가 긴밀한 연읍을 우선하여 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조선 초기로 올라가 그 과정을 살펴보자.1) 왜구는 고려 말 조선 초 약 70년간 우리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하였다. 특히 고려 말 약 40년간은 그 피해가 컸는데, 그중에서도 서남해 연안과 섬의 피해가 컸다. 이 때문에 고려 정부는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까치 취하면서 방어에 급급했다. 그러다가 최영, 최무선, 이성계, 정지(鄭地) 등이 왜구 토벌에 나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이에 따라 조선 건국 후에는 연해지역의 경제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그 결과 바닷가 고을의 민생이 번성해졌다. 이제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 연해를 버리는 청야(淸野) 전략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415년(태종 15)부터 바닷가 고을을 적극 보호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는 곧 연해지역에 읍성을 지어 그곳을 직접 지키는 적극적 대책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청야입보(淸野入堡)2)를 장기로 하던 산성 위주의 전통적 방어개념이 여말을 거쳐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읍성 우위로 바뀌었다. 그 변화의 요인은 이렇듯 바닷가 고을의 민생이 번성해져서 그 경제적 가치가 커진데 있었다. 읍성 우위의 방어 전략은 1417년(태종 17)에 장사읍성(長沙邑城) 즉 무장(茂長)읍성3)을 쌓으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읍성 축조는 이어지는 세종 때 본격화하였다. 하삼도 각 고을의 성 중에서 방어가 가장 긴요한 연변의 고을들은 산성을 없애고 모두 읍성을 쌓도록 하였다. 1422년(세종 4) 10월에 장흥과 옥구현성을 축조하였고, 1423년(동 5) 2월에는 영광읍성을 축조하였다. 1424년(세종 6) 9월에는 낙안군 토성이 낮고 또 좁아지자 잡석으로 성기(城基)를 넓혀 쌓도록 하고, 이어서 10월에는 보성에 축성하였다. 1430년(동 12) 12월까지는 임피, 무안, 순천 등에도 축성하였다. 세종 30여 년 동안에 전라도를 비롯한 하삼도 대부분의 읍성이 축조되었다. 이렇듯 연해 읍성의 축조가 그 대체를 이루어가자 이는 연해 지역으로 사람들이 더욱 몰리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따라서 읍성은 애당초 연해민 보호라는 목적도 달성하면서 동시에 연해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효과까지도 가져왔다. 이처럼 읍성은 전통도시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성종대가 되면 연읍뿐만 아니라 내지(內地)에까지 읍성 짓는 일이 확산되어 갔다. 물론 내지의 읍성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읍성이 상대해야할 적은 왜구였기 때문에 “내지라 하더라도 혹은 변방에 가깝고, 혹은 왜객(倭客)이 경유하는 길”에 있는 고을들이 우선이었다. 이로 볼 때 읍성을 쌓는 원칙은 연변이 최우선이었고, 그 다음이 내지 중 왜구가 들어오는 길에 있는 요해처였다. 읍성 그 자체가 왜구에 대한 대비책이었기 때문에 왜구에게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곳이 읍성 축조의 우선 지역이 되었다. 초기 읍성의 위치는 어떻게 정했을까? 첫째는 지상(地相), 즉 땅의 생김새를 보고, 둘째는 친히 중앙관료가 체험하고, 그리고 셋째는 읍 인민의 의견을 취합하여 정하였다. 이때 입지의 조건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무엇보다 먼저 “지세(地勢)도 평평하고 넓으며, 한 고을의 중앙이 되어서 도로가 적당하게 균평(均平)”4)하여야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①물을 얻을 수 있는가? ②수재(水災)를 피할 수 있는가? ③백성이 살기에 편리한가? 라는 세 가지 조건이 주요했다. 이처럼 조선 초기 읍터를 정하는 기준을 보면, 읍성 공간이 인구의 집중·집적을 감당할 도시화 요소를 갖추고 있었는가를 우선하였다. 이후 읍을 만들거나 또는 옮긴 이유들을 집약해 보면, “마땅한 것을 관찰하고 그 사정에 따라 가장 적합한 곳을 선택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읍성의 모양도 특정한 형태를 강제하기보다는 땅의 생김새를 따랐다.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축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지형의 생김새에 따라 성의 모습이 바뀌는 것은 우리의 경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광주·전남 지역의 읍성들은 모두 15곳에 있었다. 그 읍성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옛지도에서 발췌하여 정리하면 다음 그림과 같다.
대개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길쭉한 사각형을 이루기도 한다. 개천을 자연적인 해자(垓子)로 활용하기도 하고 낮은 구릉을 이용하기도 하는 등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중 격자형 구조를 가진 정방형의 네모난 읍성이 있어 눈에 띈다. 광주읍성이 그렇고, 전북의 남원읍성이 또 특이하다. 남원은 신라 5소경 중 하나로 당나라의 유인궤(劉仁軌, 602~685)가 읍내에 정전법(井田法)을 써서 9개 구역으로 나누었다고 전해 오는데, 그 위에 읍성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네모반듯한 격자형 구조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광주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광주는 통일신라기 9주 중 하나로 무진주(武珍州) 라 불렀고, 그곳에 세워진 무진도독성(武珍都督城)은 역시 당나라의 도로망을 따라 격자 가로망 구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1378년(고려 우왕 4년) 왜구 침략을 막기 위해 축조됐던 광주읍성은 이 무진도독성의 격자 가로망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네모난 모양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네모난 격자 가로망이 말해 주듯이 광주읍성은 통일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광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무자비하게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 본격적인 도시화가 진행되어 지금 겉으로는 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최근에 들어 두어 차례 부분적인 지표 및 발굴조사가 있었고, 그 결과 옛 흔적의 일부를 찾아냈지만 그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하다. 읍성이 사라진 것은 광주만이 아니다. 광주·전남 읍성의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그림 1】 광주·전남 읍성의 분류 및 현황
참조 : 김만호, 「광주·전남 읍성(邑城)의 현황과 활용방안」(『광전 리더스 INFO』 104호, 2018. 08. 02.) 대부분의 읍성들이 흔적을 찾기 어렵게 사라졌다. 지방 읍성의 해체 계기로 흔히 1907년(광무 11) 각령(閣令) 제1호 「성벽처리위원회규정」의 반포를 들고 있다. 이 성벽처리위원회는 1908년(융희 2) 3월부터 서울 성벽 철거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인 성벽 철거에 대한 일반의 반발을 사게 되어 그 해 9월 내각령(內閣令) 제9호 「광무 11년의 내각령 제1호로 발표한 성벽처리위원회규정을 폐지할 것에 대하여」를 비준, 반포함으로써 해체되었다. 그렇다고 성벽 철거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서울의 성곽은 일제의 강압 하에서 전차궤도의 부설, 새 도로의 개설 등을 이유로 철거, 해체되고 말았다. 이 「성벽처리위원회규정」이 지방읍성 해체의 직접적 계기는 아니었지만, 이때를 전후하여 광주는 물론, 대부분의 지방읍성들도 철거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일제는 이른바 시가지계획이란 미명하에 누문(樓門)과 성벽을 마구 헐어내 버렸다. 이로 인하여 근대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모태였던 읍성은 전통의 모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채 왜곡되어 버렸다. 일제 강점이 아니었다면 우리 도시들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조선 초기 호남 읍성의 사정에 대하여는 고석규, 「조선 초기 서남해안 지방 읍성의 축조와 도시화 요소」(『전남사학』25, 전남사학회, 2005. 12.) 참조.
2)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마을을 비우고 인근 산성으로 대피하여 장기적으로 저항하는 수비 위주의 전법이다. 3) 1407년(태종 7) 무송(茂松)과 장사(長沙)의 두 고을 합하였고, 현의 이름은 두 고을의 첫자를 떼어 무장현이라 하였다. 왜구 방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1417년(동 17)에 장사읍성을 쌓았다. 문종 때는 이를 무장현읍성으로 불렀다. 지금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속한다. 4) 『성종실록』 권122, 성종 11년 10월 17일(계해)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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