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사랑은 국경을 넘어서: 목포 공생원 게시기간 : 2020-01-14 07:00부터 2030-08-01 00:00까지 등록일 : 2020-01-13 14:1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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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름, 한일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에 대해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하자, 일본 정부는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의 수출을 통제했다. 한국인들은 ‘노 재팬(No Japan)’ 운동으로 맞섰다. 이러한 갈등은 경제적·군사적 문제이기에 앞서 역사 인식의 문제다. 1945년 해방 이후 20년이 지난 1965년에야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한일기본조약에서는 이 문제를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2조)라고 정리했다. 한국 정부는 병합조약을 비롯해 국권을 일본에 넘긴 일체의 조약 및 협정들이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일제강점기는 불법 지배였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일본 정부는 합법적으로 체결된 조약 및 협정에 근거한 합법 지배였고, 다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무효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양국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에서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표현만을 사용함으로써, 무효의 시점이 언제인지 특정하기를 회피하였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이 점을 파고들어서, 한일협정으로는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배상 책임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논파한 것이었다. 한일 갈등의 뿌리가 역사 인식의 차이에 있는 만큼, 해법도 교류와 소통을 통해 상호 이해를 넓히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작년 여름 호남의 한 지자체는 한국근현대사를 배우고자 한국을 방문하려던 국내외 학생·강사들 가운데 일본인이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행사 지원 계획을 철회했다고 한다. ‘노 재팬’ 운동으로 부담이 컸겠지만 역사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웠다. 또 ‘노 재팬’ 운동이 일본인의 혐한 정서를 부추길 경우,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많은 시민들이 ‘노 재팬’ 운동은 일본 전체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인식을 왜곡하는 극우세력을 비판하는 ‘노 아베’ 운동임을 표방했다. 전선은 국경이 아니라 인식·지향을 기준으로 그어졌다. 목포 유달산 자락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공생원(共生園)의 역사에서 해방 직후 격동의 시기에 우리 국민이 보여준 또 하나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만날 수 있다. 공생원은 1928년 양동교회 전도사 윤치호(尹致浩)가 호남동 18번지에서 7명의 어린 고아들과 함께 생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공생원에 사는 고아들의 수가 급속히 늘어가는 가운데 정명여학교 음악교사였던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가 자원봉사자로 합류했다. 윤치호와 다우치 지즈코는 1938년 피지배 민족 남성과 지배 민족 여성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 및 공생원 아이들에 대한 봉사 정신을 바탕으로 부부가 되었다. <그림 1>은 1949년 부부가 맨손으로 땅을 고르며 아이들과 함께 짓기 시작한 지 10년만에 완공한 강당으로, 현재는 한글로 ‘공생원’을 새긴 석조 아치만 남기고 개축했지만 공생원의 남은 흔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공생원과 목포 시민들의 진가는 1945년 해방 이후에 드러났다. 다우치 지즈코는 1946년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1947년 다시 돌아와 ‘윤학자(尹鶴子)’라는 이름으로 공생원의 고아들을 돌봤다. 부부의 뜻에 감명을 받은 인근 대반동의 주민들은 정성을 모아 1949년 ‘공생원 20주년 기념비’를 건립해주었다(<그림 2> 좌측). 한국전쟁기에도 2차례 위기가 찾아왔지만,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1950년 7월 목포에 진입한 북한 인민군은 윤치호가 일본인과 결혼한 ‘친일 반역자’이자 이승만 정권에 가담한 ‘반동분자’라며 처형하려 했으나, 주민들은 이들 부부가 오랫동안 고아들을 위해 헌신해왔음을 강조했다. 윤치호는 9월 인민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다시 국군에 붙들려갔다가, 역시 목포 인사들의 구명 운동 덕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1951년 공생원 원아들을 위해 광주 전남도청으로 식량 원조를 요청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 홀로 남은 윤학자는 남편을 대신해 5백여 명이나 되는 고아들의 생계를 꾸려갔다. 1968년 사망하기까지 3천여 고아의 ‘어머니’로서 활약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화훈장(1963) 및 제1회 목포시민의 상(1965)을 수상했고, 장례식도 목포역 광장에서 제1회 목포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또한 1968년 경향신문사가 주최한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 대상에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앞두고 타개했기 때문에, 경향신문사는 대신 ‘어머니의 탑’이라는 이름의 현창비를 공생원 안에 세웠다(<그림 2> 우측). 윤학자, 즉 다우치 지즈코는 국적상 일본인이었지만,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생활하며 한국인에게 존경을 받은 것이다. 현재 공생원은 외손녀 정애라 원장이 운영 중이다. 아들 윤기 공생복지재단 회장은 일본에서 재일동포 고령자를 위한 ‘고향의 집’을 운영하며 한일 양국 사이의 민간 가교로서 활동하고 있다.
공생원을 중심으로 한 윤치호·윤학자 부부와 후손들의 삶을 통해, 정부 차원에서 한일 관계가 경색되어 있을수록 민간 시민단체 차원의 교류, 인간으로서의 교류가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를 단위로 하는 국제외교와 경제·군사적 이해관계의 대립은 사람 사이에도 국적을 기준으로 선을 그어버리기 쉽지만, 실제 사람들은 각자의 역사 인식과 지향에 따라 자국의 이해관계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한국인이면서 일본의 입장에 서는 이가 있는 반면, 일본인이면서 한국의 입장에 서는 이도 있는 것이다. 작년 10월에도 강제동원 피해자를 돕는 일본 시민단체 및 일본 최대 규모의 한국사학회인 조선사연구회 등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하고 일본 정부·기업·미디어의 변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처럼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데서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다우치 지즈코의 한국 이름이 ‘윤학자’가 된 연유를 살펴보자. 이는 일본인 가족의 호칭(family name)인 ‘다우치(田內)’를 남편 윤치호의 성인 ‘윤(尹)’으로 바꾸고, 자신의 이름 ‘지즈코(千鶴子)’의 한자는 ‘천학자’라고 한국식으로 읽은 다음 ‘천’을 빼서 한국인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이러한 작명법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다른 일본인 여성에게서도 확인된다. 진학문(秦學文)과 결혼한 미야자키 도시미(宮崎壽美)는 ‘진수미(秦壽美)’라는 이름을 썼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과 결혼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는 때에 따라 ‘리 마사코(李方子)’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1962년 남편과 함께 대한민국 국적 회복을 허가받아 명실상부한 한국인 ‘이방자(李方子)’가 되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려는 일본인 아내가 남편의 성을 자기 성으로 삼는 작명법은 이들이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곧 남편을 따르는 가부장적 방식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또 한국에서는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자기 성을 바꾸지 않는데, 결혼한 여성이 자신의 가족명을 남편의 가족명으로 바꾸는 방식은 오히려 일본식 가족제도였다. 일본인 아내가 일본적인 방식으로 한국 이름을 만들어서, 동성동본 혼인을 금지하던 한국에서 부부가 같은 성을 사용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한국인다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요체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봄직한 일이다.
윤학자 여사의 영문명이 다우치 지즈코(Tauchi Chizuko)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공생원 홈페이지(http://www.mksw.org) 윤기·윤문지, 2006(3판) 『어머니는 바보야』, 홍성사 田內基, 1984 『母よ, そして我が子らへ』, 東京: 新聲社 글쓴이 이정선 조선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조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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