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마음은 어디에서 갈리는가? 게시기간 : 2020-01-15 07:00부터 2030-08-14 12:00까지 등록일 : 2020-01-1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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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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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년 3월 7일 김인후가 그간 살던 백화정에서 멀지 않는 원당산 선영에 묻힐 때, 이항은 다음과 같은 만장을 보냈다.1) 승당입실(升堂入室)하는 선비가 드문 세상, 끝없는 연구 깊은 생각으로 더할 바 없이 정밀 자세하였소. 까마득한 천년의 잃어버린 단서를 찾았나니, 비록 사람은 떠날망정 당신이 밝힌 도는 절로 빛나리라. 흔히 상여를 따르는 깃발에 쓰는 만장은 가는 이의 혼백을 붙잡는 글이기에 애틋한 사연을 담기 마련인데 무척 담담하다. 마루를 거쳐 방으로 들어간다는 ‘승당입실’은 차분하고 순서 있는 공부로 점차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지금 백화정 기둥에 쓰인 영련(楹聯)이다. 이항은 늙어가면서도 공부를 향한 의지와 기운은 시들지 않았다. 후학에게도 용맹정진을 요구하였음은 물론이다. “배우는 자가 성인이 되겠다고 생각해야지 과거나 급제하겠다는 소성(小成)의 마음이라면 스스로 한계 짓는 것이니 공문의 죄인이며 우리 동아리의 죄인이다!”2) 이항이 생각하는 성인 공부는 많은 서책의 섭렵이 아니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사서(四書)’가 중요하였다. “주자는 성인 공부가 사서에 있다고 하였을 뿐 다른 책을 말하지 않았다. 그대들은 여러 책을 보지 말라. 육경(六經)은 그 다음이다.”3) 소싯적 무학(武學)의 동아리였던 남치욱(南致勗)의 넷째 아들 언기(彦紀)에게도 오직 한 글자 ‘경(敬)’을 놓치지 말라고 훈계하며 각별하게 일렀다. “지금 배우는 자들이 희귀한 책에 돈과 힘을 쏟고 있는데, 이렇게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여서는 죽을 때까지 성인의 문호를 엿볼 수도 없다. 모름지기 사서에 정통하고 능숙해야 한다.”4) 남언기(1534∼?)는 화순 동복으로 장가들고 순창 쌍치에 훈몽재를 열었던 김인후에게 배우고, 장성 백화정에도 출입하였다.5)남언기의 중형인 남언경(南彦經, 1528∼1592)도 이항을 찾았다. ‘군자의 마땅한 길[道]은 광대하고 은미하다 君子之道 費而隱’는 『중용』 12장을 물었다. 이 구절을 일찍이 주자는 ‘은미함[隱]은 도의 본체이며 광대함[費]은 도의 작용’이라고 풀었다. 그런데 은미함을 ‘형상이 생기기 이전의 무엇[形以上者]’, 광대함을 ‘형상이 있은 이후의 무엇[形以下者]’으로 설명하는 학자가 있었다. 『주역』의 ‘형이상자를 도(道)라 하고 형이하자를 기(器)라 함’을 상기하며, 은미함을 도(道), 광대함을 기(器)라 한 것이다.6) 그렇다면 은미함과 광대함은 도ㆍ기와 같이 다른 물건이 되는 것이다. 그럴 듯싶지만, 주자는 은미함과 광대함을 도의 본체와 작용의 관계로 보았지 다른 물건으로 나누지 않았다. 본체는 근원ㆍ원인ㆍ원칙, 작용은 운동ㆍ현상ㆍ사업으로 읽으면 무난하다. 이항은 주자의 견해를 충실하게 남언경에게 전달하였다.7) “광대함과 은미함을 나누어 말하면 광대함은 광대함이요 은미함은 은미함이지만, 합쳐서 말하면 광대함의 이면에 은미함 또한 있어서 광대함과 은미함은 일체가 된다. 따라서 형상이 생기기 전을 은미함이라 하고, 형상이 생긴 이후를 광대함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리송하지만 일상에 견주면 대강 다음과 같다. 약자를 살려야 한다는 원칙은 보이지 않고 은미하지만, 약자를 살리는 사업은 빛나고 광대하다. 원칙과 사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업 중에 원칙이 관철되고 원칙은 사업으로 발휘되므로 이를 형이상ㆍ형이하의 두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에 더하여 이항은 은미함과 광대함을 리와 기에 대비하며 이기일체설(理氣一體說)을 정당화시켰다. “무릇 광대함은 기(氣)에 속하고 은미함은 이(理)를 위주로 한다. 따라서 리와 기를 두 물건이라 하지만 본체는 하나이니, 둘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리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기대승과의 태극음양논변에서 피력한 이기일체설을 굳게 지켰던 셈이다. 이때 일찍이 서경덕 문하에서 공부하고 당시 신사조 양명학을 받아들였던 남언경이 어떻게 응대하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혹여 서경덕 문하의 선배에게 이항의 견해를 전달하였을지 모르겠는데, 이구(李球)가 ‘이기는 일체가 될 수 없다’며 이항을 반대하였다. 이구는 무협을 청산한 이항과 함께 윤정(尹鼎)에게 『주역』을 배운 젊은 시절 벗으로 서경덕 문하를 출입한 ‘종실(宗室)’학자였다. 이항은 허엽(許曄)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이구를 매섭게 응대하였다.8) “숙옥(叔玉: 이구)이 리와 기가 일체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는데, 그렇다면 기 밖에 리가 있다는 것인가? 만약 기 밖에 리가 있다면 천지간에 리일체(理一體)가 있고 또 기일체(氣一體)가 있게 되니 어찌 양체(兩體)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사냥을 좋아하는 이구의 취향까지 걱정 섞어 꾸짖었다. 허엽이 참의(參議)였을 때니 1561년 전후였다. 허엽은 일찍이 이항과 같이 학업을 연마한 나식(羅湜)에게 배우고 서경덕의 문하에 들었다. 당시 허엽(1517∼1580)은 은미함과 광대함을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로 이해하였다.9) 그런데 이항은 허엽에게는 다소 누그러뜨렸다. 리와 기가 비록 한 물건이지만 기준에 따라 앞과 뒤가 있다고 하였으니, ‘무릇 본체에서 논하면 리가 기를 앞서고, 작용에서 논하면 기가 리보다 앞섬’이라 한 것이다.10) 이러한 ‘이선기후(理先氣後)’ 혹은 ‘기선리후(氣先理後)’는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사단을 리, 칠정은 기에 나뉘어 붙일 수 있는가?’ 라는 사단칠정이기분속(四端七情理氣分屬) 즉 사칠논변의 성과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사단은 인의예지라는 본성이 절로 발휘되는 측은ㆍ수오ㆍ사양ㆍ시비의 마음이고 칠정은 사람에게 흔하디흔한 희노애락구오욕(喜怒哀樂懼惡慾)이다. 당시 이황은 ‘사단은 리의 발로이며 칠정은 기의 발로’라는 초기 견해를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 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發而理乘之”이라고 수정하고,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선악으로 나뉘지만 모두 정’이란 관점에서 “정이 발현함에 리가 움직이고 기가 갖추어지면 사단이고, 혹은 기가 감응하고 리가 타면 칠정 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이라며 물러섰다.11) 이때 리는 본성, 기는 기질, 사단은 순수한 도덕감정, 칠정은 일상의 보통감정이다. 문제는 본성이 녹아있고 기질이 작동하는 마음[心]이었다. 당시 선비들이 어떻게 마음을 갖출 것인가? 마음을 다하여 본성을 알고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함양할 것인가? 맹자의 구방심(求放心), 진심지성(盡心知性), 존심양성(存心養性)에 골몰하였던 까닭이었다. 이즈음 명나라 나흠순(羅欽順)의 학술이 소개되었다. 나흠순(1465∼1547)은 간혹 권신의 배척을 받았지만 30년 넘게 벼슬하여 이부상서까지 지냈다. 한때 불가의 ‘명심견성(明心見性)’에 심취하였고, ‘심즉리(心卽理)’ ‘마음의 도덕역량 지혜를 앎과 동시에 행할 것 致良知 知行合一’을 제창한 왕수인(1472∼1529)과도 교유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나흠순이 은퇴하고 20여 년, 정주리학(程朱理學)을 전공한 성과를 『곤지기(困知記)』에 담았다. 여기에서 선학(禪學)을 배척하고 왕수인의 ‘심학(心學)’ 또한 비판하였다. 특히 마음에 나아가 일상 사물의 결함이 없앤다는 즉심격물(卽心格物)을 거부하였다. 즉 마음을 밝히는 명심(明心) 자체가 궁리(窮理)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주(程朱)의 ‘사물의 도리를 연구하여 나의 앎을 극진히 한다는 즉물궁리(卽物窮理)’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충실하였음이다. 그러나 천지와 만물, 인간의 존재를 읽는 틀, 이기론에서는 주자를 따르지 않았다.12) “천지를 통틀고 고금에 걸쳐 하나의 기가 있을 뿐이다. 리는 처음에 별다른 한 물건이 아니다. 기에 의지하여 서며, 기에 붙어서 움직인다.” 주자의 이선기후(理先氣後), 이기이원론과 배치되는 기선리후(氣先理後), 이기일물론(理氣一物論) 나아가 유기론(唯氣論)이었다.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수한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고 정녕 중도를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심법 중의 도심과 인심에 대한 해석 또한 파장이 컸다.13) “도심은 성(性)으로 성은 도의 본체이다. 인심은 정(情)으로 정은 도의 작용이다.” “도심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 마음으로, 그 지극히 정밀한 본체를 볼 수 없으므로 은미하다고 한다. 인심은 감동하여 마침내 통하는[感而遂通] 마음이라, 그 지극히 변하는 작용을 헤아릴 수 없으므로 위태하다고 한다.” ‘희로애락이 아직 생기기 전[未發]은 도심이며, 희로애락이 이미 생긴 후[已發]는 인심’이라는 장재(張載)의 마음 이론을 계승하며 ‘미발(未發)의 성’을 도의 본체, ‘이발(已發)의 성’ 즉 정(情)을 도의 작용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때 ‘미발의 성’은 순수이성, ‘이발의 성 즉 정’은 일반감정이니, 도심은 순수이성의 마음이며 인심은 일반감정의 마음이다. 따라서 리가 기를 떠나지 않고 정은 성에서 생기듯이, 도심과 인심은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본체와 작용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심체용(一心體用)’은 도심은 천리(天理), 인심은 인욕(人欲)으로 규정한 정이(程頤)의 마음의 이분법에 대한, 중대한 수정이자 보완이었다. 장재 또한 이성과 감정을 아우르는 주인은 마음이라는 ‘심통성정(心統性情)’의 관점에서 하나의 마음을 도심과 인심으로 지칭하였다. 장재는 정이의 동시대 선배로 ‘리학(理學)’에 대하여 ‘기학(氣學)’을 제창하였다. 나흠순 또한 기학을 신봉하였다. 이러한 나흠순의 이기일물, 인심도심설을 당시 진도의 노수신(盧守愼)이 적극 공감하고 수용하였다. 1560년 초겨울 『곤지기』를 읽고 적었다.14) “글이 정대정미(正大精微)하고, 선유가 발견하지 못한 뜻을 많이 발견하였으니 정주문파(程朱門派)에 큰 공이 있다.” 노수신(1515∼1590)은 1543년 문과 장원으로 신진 청론(淸論)을 이끌며 ‘소윤’ 외척에 맞섰다가 을사사화로 벼슬을 빼앗기고 순천을 거쳐 진도로 유배당했었다. 스승 조광조가 재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가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무효가 되자 충주로 물러났던 이연경(李延慶)에게 배우며 사위가 되었다. 연산군에게 세 차례나 국문을 당하고 축출되었다가 반정 이후 복귀하여 부제학ㆍ예조참판을 지냈던 이자화(李自華)의 외손자였다. 이자화가 이항의 계부였으니 노수신은 오촌 생질이었다. 노수신 또한 ‘종구노선생 (從舅老先生)’으로 존중하였다. 1) 『일재집』 「挽河西」 “宜入升堂士所稀 硏窮殫思盡精微 寥寥千載尋墜緖 雖是云亡道自輝”
2) 『일재집』 「自強齋箴」 3) 『일재집』 「示諸生」 4) 『일재집』 「答南秀才彥紀書」 및 「又復南秀才書」 5) 『성호전집』 제68권, 「고반남선생소전 考槃南先生小傳」. 남언기의 장인 설홍윤(薛弘允)은 동복의 청취정(淸翠亭) 주인으로 1537년 생원시에 들었다. 6) 『주역』 「계사전(繫辭傳)」 상, 12장.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이에 앞서 5장에서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도 一陰一陽之謂道’라 하였다. 7) 『일재집』 「答南時甫彥經書」 8) 『일재집』 「答許參議曄書」(1); 허엽, 『草堂集』 부록 「行狀」(鄭逑찬). 허균은 훗날 조정의 후배를 규합하여 동인을 이끌었다. 세 아들이 문과에 들었는데, 막내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다. 여류시인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9) 『퇴계집』 권32 「우경선의 문목에 답하다 答禹景善問目」 “草堂說費隱 以形而上下爲言.” 초당은 허엽의 호, 경선(景善P)은 우성전(禹性傳)의 자(字). 10) 『일재집』 「答許參議書」(3) 11) 『퇴계집』 권17, 「기명언에게 답하다. 사단ㆍ칠정을 논한 세 번째 편지 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三書」 이른바 이황의 이기호발(理氣互發)과 기대승의 이기공발(理氣共發)이다. 12) 북경대 철학과연구실, 홍원식 옮김, 『중국철학사』 Ⅲ, 간디서원, 2005. 13) 盧守愼, 『穌齋集』 內集下篇 「人心道心辨」 “道心 性也, 性者 道之體也. 人心 情也, 情者 道之用也.…道心 寂然不動者也, 至精之體不可見 故微. 人心 感而遂通者也, 至變之用不可測 故危.” 14) 『소재집』 권7, 「困知記跋」(1560)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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